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
모든 신들 위에 경외로우신 분이시다
(시편96,4).
이 절은 하느님의 우월성을 강조한다.주님께서 하신 일은 위대하므로 주님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다.“모든 신들 위에 경외로우신 분”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말한다(시편89,8참조).이것은 주님이 모든 신들과 비교될 수 없음을 표현하는 방식이다.이것은 주님이 모든 신들과 비교될 수 없음을 표현하는 방식이다.‘모든 신들 위에’라는 다신론적 표현은 다른 민족들이 여러 신을 섬기는 것을 시인이 부정하지 않음을 알려준다.그러나 여러 신은 헛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그런 신들 위에 존재하시는 것이다(5절).‘경외로우신 분’은 원수들을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두려움은 불완전한 존재가 자기와는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하여 느끼는 기본적인 감정이다.여기에 옛사람들이 하느님을 보면 죽는다는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이사6장참조).아우구스티누스는,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주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설하였다.그에 따르면,‘그리스도는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작아지셨지만,더없이 위대하시다.모든 신들 위에 경외로우신 분이 그분을 핍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겁먹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분이 바로 몸값을 내시고 피를 흘리시어 온 세상을 되사신 분임을 우리가 알려야 한다’(보르고뇨 1995.158-161).
시편 96편의 전체적 의미:96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주님의 통치를 노래한다.시인은 온 세상이 주님을 노래하여 모든 민족이 주님께 경배드리게 한다.96편에서 주님은 창조주로서 온 세상의 임금이요 유일한 임금이시다.동시에 세상의 심판자시다.그분이 오시면 세상의 헛것들이 드러나고 주님의 영광이 밝혀질 것이다.이 영광스러운 임금의 오심은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서이며,누리를 의롭게 하고 백성들을 성실히 다스리시기 위해서다.마지막 절의‘의롭고’와‘성실하게’는 주님의 통치 원칙을 말해준다.우주적인 하느님께 대한 반응도 하늘,땅,바다,온 세상,모든 민족을 포괄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어떤 제한도 없음을 알려준다.찬미받으실 주님은 오시는 주님이며 이미 이 세상에 역사하시는 하느님,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그럼으로써 당신의 엄위와 존귀,권능과 영화를 이 세상에 떨치시는 분,유일하신 창조주요 임금으로서 온 세상과 온 우주를 지배하시는 분이다.이런 하느님께 마주 나아가며 인간은 자연과 함께 기쁨 속에서 웅장한 찬미가를,새로운 찬미가를 부른다.이 시편은 장소적으로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제한 없이 미래를 향해 무한한 전망을 펼친다.이 전망의 끝은 하느님의 오심이다.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러 오신다고 표현하는 이 시편(또한 98편)의 노래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기린다.그들은 전통적으로 이 시편을 크리마스 전날이나 크리스마스 당일 전례에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의 탄생과 동시에 재림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하였다.그리스도는 이미 오셨고 다시 오실 것이다.주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민족들 가운데서 의로움과 성실로써 통치를 실현하신다.시인에 이해 오실 분으로 예고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오고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23-3 시편90-150편/전봉순 著/바오로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사명
19.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지상 사명을 성덕의 길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1테살4,3)이기 때문입니다.모든 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의 사명입니다.또한 이는 역사의 정해진 때에 복음의 한 측면을 반영하시고 구현하시고자 하신 아버지의 계획입니다.
20.그 사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충만한 의미를 지니고,오로지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하여야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그 핵심이 되는 성덕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분 삶의 신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이는 인격적인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결합하여,그분과 함께 계속하여 죽고 부활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예수님의 지상 생활의 다양한 측면들을 자신의 삶으로 재연하는 일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그분의 알려지지 않은 삶,공생활,가장 소외된 이들을 가까이하신 모습,그분의 가난,그리고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다른 여러 방식들을 우리 삶으로 되살려야 하는 것입니다.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이 제시한 대로,이러한 신비들에 대한 관상은 우리의 여러 선택과 태도에서 이러한 신비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끔 우리를 이끕니다.“에수님 생애의 모든 것은 그분 신비를 가리키는 표징”이기 때문에,“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성부의 계시”이고“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속량의 신비”이며“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총괄 실현(recapitulatio)의 신비”이고,“그리스도께서 몸소 살며 겪으신 모든 것을 우리가 당신 안에서 그대로 살게 하시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것을 겪으십니다.”
21. 아버지의 계획은 그리스도이시고,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입니다. 결정적으로,우리 안에서 사랑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성덕은 다름 아닌 충만하게 실천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성덕의 척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다다르시는 경지에서 비롯됩니다.따라서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우리 전 생애에 걸쳐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각 성인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풍요로움에서 이끌어 내시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선사하는 메시지입니다.
(명동 성당 03/17)
22. 주님께서 한 성인을 통하여 건네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깨달으려면,세부적인 것들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거기에는 과실도 실패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성인이 말하는 것이 전부 다 온전히 복음에 충실한 것만은 아닙니다.성인의 행적이 전부다 진정성이 있고 완전한 것만은 아닙니다.우리가 관상해야 하는 부분은,성인의 온 생애와 성화를 향한 전 여정,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반영하는 그의 모습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반영하는 그 성인의 모습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지닌 전체적 의미를 우리가 파악할 수 있을 때 드러납니다.
23.이는 우리 모두를 부르는 강한 호소입니다.여러분도 자신의 온 생애를 하나의 사명으로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하느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베푸는 표징들을 인식함으로써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십시오.여러분 삶의 매순간에 또 여러분이 해야 하는 모든 선택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늘 성령께 여쭈어 보십시오.그리고 여러분의 사명에서 그것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 식별하십시오.그리고 성령께서 여러분 자신 안에서,오늘날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반영할 수 있는 그러한 인격적인 신비를 형성하실 수 있게 하십시오.
24.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세상에 건네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그 메시지, 그 말씀이 무엇인지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기를 빕니다.이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성령께서 여러분 자신을 변모시켜 주시고 새롭게 해 주시도록 스스로를 내어 맡기십시오.그렇게 할 때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중한 사명에서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저지르는 수많은 실수와 과오 속에서도 여러분 자신이 사명을 완수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다만 이를 위해서,여러분은 사랑의 길을 저버리지 말고 정화하시고 빛을 비추어 주시는 그분의 초자연적인 은총에 언제나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하느님이겠지.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 아버지.네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을 지도 아시지.난 이돌이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몰라.하지만 분명 무언가 쓸모가 있을 거야.만약 이게 쓸모없다면 모든 게 쓸모없어지거든.저 별들도 그렇고,너도 그렇고.아티초크 머리를 한 너도 무언가 쓸모가 있단 말이야.”
이 장면에서 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보았고,돌을 보았습니다.우리는 땅 위의 작은 돌맹이들이지만,“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마태21,42)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 영화들,특히 <달콤한 인생>은 여러 진영에서 비난을 받았는데,성직자들 사이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모든 시대에는 그만의 편협함이 있기 마련입니다만,그것이 때로는 모순적이라 트레비 분수에서 한 여인이 물창구치는 장면에서는 그토록 엄격하던 비평의 잣대가 관대해졌죠.
하지만 그 이면에는 본질이 있습니다.진정한 예술이 보여 주는,깊은 곳을 파고드는 단단한 바위 같은 본질 말입니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는 이 영화가“죄와 순수함의 관계”를 깊이 파고들며,당대 가톨릭 신앙의 진수를 보여 주는 걸작이라고 평했습니다.나자레노 타데이 신부는 이 작품에서“위대한 그리스도교 영성”을 발견했다고 말했죠.또한 펠리니 감독과 각별한 친분이 있던 비르질리오 판투치 신부도“ 이 작가의 모든 작품에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숨결이 깃들여 있다.”라고 전했습니다.이 셋의 평가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모두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그 시대의 영화들은 우리가 반드시 되새겨야 할 귀중한 유산입니다.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깊은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본문50~51쪽)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미여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봄/이성부)
늘~
행복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