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는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기록적인 문체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를 소설에 도입함으로써
현대소설에 기폭제 역할을 한 인물이다.
프랑스 소설에 황금시대인 19세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작가 중 한 사람으로,
19세기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로 꼽힌다.
또한 당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저널리스트이자 지식인이기도 하다.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가 간첩 누명을 썼을 때
그의 무죄를 주장하며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형식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논설을 발표하면서
이 사건에 뛰어든 일도 유명하다.
에밀 에두아르 샤를 앙투안 졸라는
1840년 4월 2일
파리 생조제프 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랑수아 졸라는 베네치아 출신 이탈리아인으로 토목 기사였다.
3세 때 아버지가 일 때문에 가족들을 데리고 엑상프로방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7세 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고 아버지가 주도하던 운하 공사가 중단되면서
엄청난 채무를 지게 되자
어머니가 시 당국과 소송을 벌이는 것을 보고 자랐다고 한다.
부르봉 중등학교를 거쳐
파리의 생 루이 중등학교를 다녔는데,
부르봉 학교 시절에는 장차 위대한 화가가 되는 폴 세잔을 만나 우정을 나누었고,
시와 희곡을 습작하며 보냈다.
졸라는 에콜 드 폴리테크니크 시험에 두 번이나 낙방하고,
22세 때 아셰트 서점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3년간 일하면서 습작을 계속했는데,
이때 과학적, 실증주의적 사상을 기반으로 한 사실주의 문학에 눈을 떠
시와 희곡을 그만두고 단편소설이나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서점에 취직한 이듬해
낭만주의적 성향이 짙은 단편집 《니농에게 주는 이야기》를 펴냈으며,
이어서 자전적 성향이 짙은 첫 소설 《클로드의 고백》을 펴냈다.
소설을 쓰는 동시에 〈르 프티 주르날〉, 〈르 피가로〉 등 주요 신문에
서평과 예술 비평을 기고하면서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했다.
비평가로서 나름의 입지가 굳어지자
그는 26세 때 서점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전업 작가의 길을 모색한다.
특히 이 시기에 그는 폴 세잔, 마네, 피사로, 모네 등 이후 인상파라고 불리게 될 화가들을
옹호하고,
보수적인 아카데미에 반발하는 비평을 싣기도 했다.
졸라는 공쿠르 형제와 플로베르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는데,
27세 때 이들의 영향을 받은 자연주의적 작품 《테레즈 라캥》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졸라의 초기 대표작으로,
당대 파리의 사회상 및 인간 심리를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묘사하여
졸라에게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불륜과 배우자 살해 등의 자극적인 소재 때문에 외설 논란에 시달렸다.
졸라는 '나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 그대로를 묘사하는 것',
'소설은 심리학적인 실험의 장'이라는 견지를 고수했는데,
이런 관점에서 《테레즈 라캥》을 외설로 비판한 루이 윌바크와 논쟁을 벌이며
자신만의 자연주의 소설 이론을 확립해 나간다.
또한 이 과정에서 졸라는
하나의 시대와 사회에 대한 거대한 모자이크가 될 만한 소설 시리즈를 구상했는데,
이 구상은 〈루공 마카르 총서〉라는 이름으로 완성된다.
1871년부터 매년 1권 정도씩 집필하여
1893년에 전 20권으로 완성되었으며,
프랑스 제2제정 시대의 사회사를 일가족의 가족사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 주는 기획물이다.
제1권 《루공 가의 재산》에서 시작해
제20권 《파스칼 박사》로 끝나는 이 총서에는
《목로주점》, 《나나》, 《제르미날》, 《대지》, 《인간 짐승》 등
졸라의 대표작들이 대부분 포함된다.
졸라의 작품들은 출간될 때마다 노골적 언어와 외설적 내용을 이유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으로
여성 세탁부 제르베르의 비참한 삶을 통해 파리 하층민 노동자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목로주점》,
파리 상류 사회 고급 매춘부의 성공과 몰락을 다룬
《나나》 등은
출간 즉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런 스캔들은 오히려 졸라에게 작가로서의 유명세와 두둑한 인세를 안겨 주었다.
특히 《목로주점》은
당시 문학적 금기와 같았던 민중, 특히 여성 노동자를 주제로 한
최초의 소설이자 베스트셀러였다.
이 작품은 졸라에게 '19세기 문학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선사해 주었다.
졸라는 자신의 작품을 외설이라고 생각지 않았고,
이런 논란에 대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루공 마카르 총서〉를 통해
하층 대중, 특히 개인보다는 집단을 묘사하면서
당대 사회 및 인간의 추악함과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또한 동일 인물을 여러 작품에서 여러 대에 걸쳐 다루는 방식으로,
인물들에게 미치는 유전적, 환경적 요인을 고집스럽게 추적했다.
개혁가적인 성향이 짙었던 졸라는
자신의 작업이 인간 생활의 개선과 진보를 이끄는 동력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졸라의 주위에는 많은 문인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플로베르, 모파상, 공쿠르 형제 등과 자주 어울렸다.
또한 졸라는 자신의 논지,
즉 자연주의적 소설관을 잡지에 꾸준히 발표했으며,
이런 소론들을 모아 《실험소설》을 출간하면서
자연주의 이론을 확립했다.
한편 《목로주점》, 《제르미날》 등의 작품은
연극으로 각색하여 상연하기도 하는데,
광산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연극 〈제르미날〉은
당국의 검열에 의해 상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졸라는 기본적으로 이상주의적 개혁가이자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런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은 만년에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이다.
1894년 10월 31일, 독일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혐의로
프랑스의 포병대위 드레퓌스가 체포되었다.
군법회의 결과 드레퓌스는
군적 박탈과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았는데,
드레퓌스는 시종 억울함을 호소했다.
더구나 이 사건의 진범이 에스테라지 소령으로 밝혀졌음에도 판결은 번복되지 않았다.
이는 드레퓌스가 유대인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1870년 보불 전쟁 이후 프랑스 내에서 반독일 감정이 악화되어 있던 데다,
주로 대금업에 종사하면서 왕당파를 지지했던 유대인에 대한
프랑스인의 반유대주의 감정이 뿌리 깊었기 때문이다.
졸라는 이 사건을 접하고,
1898년 1월 13일
〈로로르〉 지에 〈공화국 대통령 펠릭스 포르 씨에게 보내는 편지(나는 고발한다!)〉를 통해
해당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원했다.
이에 프랑스의 지식인과 청년들이 재심 청원에 같이 했으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반유대주의 감정이 팽배했던 프랑스 사회에서
졸라 및 진보 지식인들의 태도는
유대인을 옹호하는 행위로 비쳤고,
보수주의자와 일반 시민의 비난이 쇄도했다.
이에 졸라는 국방부장관에 의해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어
징역 1년 벌금 3천 프랑을 선고받았으며,
레종 도뇌르 훈장도 박탈당했다.
졸라는 선고일 저녁에
런던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1년 후 드레퓌스 사건 재심이 열리기 전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드레퓌스의 원심 판결은 번복되지 않았다.
1900년에는 드레퓌스 사건을 묻어 버리고자
의회가 관련자들을 모두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사면시키기까지 했다.
이 일에 대해 졸라는 항의의 의미로 침묵을 선택하고,
이듬해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기고 문집 《멈추지 않는 진실》을 출간했다.
그리고 런던 망명 시절부터 이 사건을 모티프로 하여 집필하던 소설 《진실》을 계속 써 나갔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의 전반적인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 프랑스 사회가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큰 획을 그었다.
졸라는 1902년 9월 29일 파리의 집에서 벽난로 가스 유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사인은 분명했지만,
일각에서는 반드레퓌스주의자들의 암살이라는 의심도 있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아나톨 프랑스가 〈인류 양심의 한 획〉이라는 조문을 낭독하며 그를 기렸다.
1906년 드레퓌스는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었으며,
졸라의 묘가 팡테옹으로 이장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에 1908년 졸라의 유해가 팡테옹에 안치되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그 뒤를 따르며 애도했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