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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살리는 바울
2016, 6, 5
행20: 1-12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전하고 이제 마게도냐 여러 교회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 자기를 처음 이방인들에 파송한 수리아안디옥교회에 갔다가 예루살렘에서 오순절을 보내고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 예상치 못한 소요가 일어나 그의 계획은 잠시 뒤로 미루어 졌지만 곧 그 소요가 그치고 교회도 안정되자 바울은 다시 로마로 갈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바울은 제자들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마게도냐는 바울 사도가 전도하여 세운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 그리고 베뢰아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 교회를 방문하여 믿음을 굳게 하고 헬라로 갔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헬라에 있는 교회로 고린도교회를 포함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의 아덴과 고린도는 아주 근거리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사도가 헬라에 3개월 동안 머물러 있었다고 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고린도교회에 3개월 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3개월 고린도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로마서를 기록하여 로마로 보냈던 것입니다.
그가 방문하게 될 로마에 로마서를 기록하여 미리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깊이 연구하는 시간을 준 것입니다.
로마서는 인간의 죄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 사함 받는다는 것과 죄 사함의 믿음을 통해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과 성령이 믿는 자안에서 능력으로 행하시여 죄를 회개하게 하시며, 말씀을 열어서 보게 하시고, 주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되시며, 주의 영으로 인도 하시며, 살아계시는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복음을 깊이 이해하려면 로마서를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는 복음의 넓고 깊고 높은 면을 치밀하게 기록한 책입니다.
내가 수요일 마다 로마서를 강해한지 거의 5년 정도 됩니다.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나는 복음의 은혜와 그 깊이를 이전과는 크게 다르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복음에 대한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의 이해가 달라지면서 내 믿음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그 영적인 체험에 다 이르지 못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그 로마서를 고린도교회에서 3개월에 기록하여 로마교회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에 기록된 많은 영적인 것들을 체험하고 아는 것에 또한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로마서를 기록하여 로마로 보낸 다음 고린도에서 바로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배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공모를 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는 그 계획을 바꾸어서 그가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베뢰아 빌립보에서 배타고 드로아로 돌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드로아까지 함께 간 제자들의 이름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사람 가이오와, 더베 사람 디모데,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가 일곱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함께 복음 전파에 충성된 일군들로 하나님 나라에서도 알려진 귀한 이름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 준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영광 된 일은,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할 때 우리 주님은 내 신앙고백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시며 또 천국 열쇠를 내게 주노라.”하셨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큰 권세를 주신 것을 깨닫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람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주는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 명부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고 하셨지 았습니까?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천사들 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첫 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들만이 복음으로 사람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일곱 명의 제자들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천사들과 다른 것은 주의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주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절에 “그들은 먼저 드로와에 가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했습니다.
바울과 누가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닷새 만에 드로아에 도착하여 일곱 제자들과 함께 이레를 머물러 있었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그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행하는 모든 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이토록 자세히 사도 바울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어디선가 우리 중에 누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자도 없고 자신을 위해 죽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가 죽고 사는 일 보다 주를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일이 우선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고린도후서12장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셋째 하늘까지 들려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고 돌아 왔기 때문일까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세상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원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육신으로 이 땅에 있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좀 더 큰 그림을 그리며 주께 헌신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주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리아 같은 우리 옥합을 깨트려 주께 부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주님께 칭찬 받고 무엇인가 상을 받을 기대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이제 그가 떠나면 다시 만나지 못할 그 제자들에게 교회와 주의 일을 부탁하며 일주일 동안의 즐거운 교제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사도는 돌아온 주간의 첫날에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기 위해서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 주간 첫날 다시 말해서 지금의 주일 날 떡을 떼기 위해 모였다는 것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날은 안식일 즉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고 예배드리는 날이 주일날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유대교의 그것과는 크게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는 오래 동안 유대교에서 파생되고 발전하고 변종된 일종의 유대교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여 주께서 재림해 오시는 그날까지 떡을 떼며 기념하라 하셨고, 우리가 속죄함을 얻고 부활하여 생명을 얻는 것도 유대교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예배드리며 떡을 떼기 위해서 매주 첫날 즉 주일날 모이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 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서기 55년경에 기록된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서도 주일날 모여 떡을 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서기 61년에서 63년경에 기록되어 고린도전서보다 거의 7-8년 뒤에 기록된 것으로 그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날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최후의 만찬을 가지시며 제자들에게 내가 다시 오는 날까지 주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떡을 떼며 기념하라고 지시하셨기 때문에 초대교회에서는 매 주일마다 떡을 떼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찬식을 갖기 전에 성찬의 의미를 전했을 것입니다.
그 이튼 날 떠나야 하고 이 밤이 그들과는 마지막이 되기 때문에 강론을 길게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교회를 맡기며 형제자매들과 성령과 사랑으로 하나 되며 복음을 전할 것을 간곡히 부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밤은 떡을 떼기 위해 모인 시간이기 때문에 주께서 못 박히신 대속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복음의 깊은 데까지 자세히 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강론하는 시간이 길어 밤중까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제자들의 가슴에 복음을 그 밤에 깊이 새겨 주고자 했을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가슴에 새겨져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주의 말씀이 가슴에 믿음으로 새겨져 있는 사람들은 그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씀은 주의 영이십니다.
주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이나 행위에까지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밤에 주의 말씀을 그들에게 깊은 인상으로 심어주고 떠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내가 항상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내게 듣는 복음을 통해서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성령을 아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담대히 말씀드리자면 이 시대는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많지 않고, 성령님을 실제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 앞에 가진 사명의 첫 번째 일은 여러분들을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 일은 여러분들에게 성령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알지 못하면 육신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내 마음에 항상 간절한 소망으로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거듭난 주의 종으로 성령을 실제로 아는 주의 종으로 인정하신다면 여러분들은 내 말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 들으셔야 하고 내가 전한 말씀대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믿음을 갖는 사람도 없고, 성령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 나라 생명의 씨가 그 영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요, 사람의 생각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이해나 지혜나 이성을 꿰뚫고 지나서 그의 영혼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복음이 그들의 지혜나 이해나 이성 안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아는 이는 많지만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죄 사함을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다 담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아는 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는 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그들의 죄 값으로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 사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잘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죄를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자기가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 보다 자기 지혜와 판단을 우선에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진실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아는 이들은 하나님이 그를 많은 사람들 중에서 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생각이나 판단보다는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우선에 두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재끼고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예수 믿는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해서 그들의 죄 값으로 예수께서 자기 몸을 나무에 달려 희생 제물로 드린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방식이 아니요, 사람의 지혜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의 죄를 심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이해나 지혜로 그것을 헤아리고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지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시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들의 죄를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넣어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그 믿음이 우리들에게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하늘의 천사들도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모든 것,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자에게 죄를 사해 주시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넣어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분명히 그것도 조금도 의심 없이 아는데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 주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 주셨다는 확실한 인증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분명하게 깨닫는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다면 죄 사함 받는 믿음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다면 그 의심부터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 그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그를 인정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이 행하신 것에 의지하고 신뢰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속죄의 피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죄 사함의 은혜의 언약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분깃에 참여하라는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아는 것은 아주 확실합니다.
우리의 눈도 착각을 일으킬 수 있고, 듣는 귀도 우리에게 착각을 일으킬 수 있고, 우리의 감각도 착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가르치시는 성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성령은 우리에게 착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우리가 느끼고 아는 것보다 더 확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안에서 확신하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강론하고 있는 건물은 3층으로 된 건물인데 그의 강론을 듣는 이들이 3층까지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등불은 윗 다락까지 많이 켜 있었는데 유두고라는 청년은 3층 창에 걸터앉아 강론을 듣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강론이 길어져 밤중까지 계속되자 유두고는 졸다가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내가 성지순례하면서 본 당시 로마식 건축은 3층이라 하면 우리들의 건물처럼 낮은 3층이 아닙니다.
졸다가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높이입니다
그가 죽었다고 하는 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확인한 죽음이요, 의사인 누가도 확인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내려가서 그 청년 위에 엎드려 그를 안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떠들지 말라 그의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강력한 안수가 필요할 때 죽은 자의 위에 엎드려 기도했던 것은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 위에 올라가 그를 안고 기도할 때 죽은 자의 영혼이 그들에게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이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유두고가 다시 살아난 것을 통해서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사도 바울의 몸에 나타나 역사하시는 그 성령의 능력은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능력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능력은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대로 예수를 믿는 그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의 생명을 얻는다는 확실한 증거를 얻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이 일로 인해서 더 큰 확신과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