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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4월 25일, 19살의 청소년이 자살했다. 당시 이름도 없이 고(故) 윤아무개 씨로만 알려졌던 고인의 유서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수많은 성적 소수자들을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성경적이고 반인류적인지…… 죽은 뒤엔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윤 ○○은 동성애자다’라고요.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해 고통 받지도 않아요.”
이름 없는 그의 죽음에 당시 인권단체들은 ‘사회적 타살’이라며 침통해 했다. 매년 4월마다 그에 대한 추모 행사가 열렸고, 비로소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됐다. 동료들은 그의 본명보다는 시조시인으로 사용하던 ‘육우당’이란 이름으로 그를 기억한다.
올해 고(故) 육우당의 10주기 추모 행사 중 하나는 27일 저녁 대한문 앞에서 열리는 추모문화제이다. 대한문은 어떤 곳인가? 역시 ‘사회적 타살’이라 지목되는 쌍용 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 24명의 죽음을 추모하는 곳이다. 1년 전 ‘더 이상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가파르게 이어지던 자살 곡선을 멈추기 위해 천막 농성이 시작된 곳이다. 그런데 정부는 비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던 그 작은 천막을 염치도 없이 철거해버렸다. 지난 4월 4일의 일이다. 대한문 앞 인도 위에 급조한 화단이 만들어졌고 공무원과 경찰들이 매일 나와 그 화단을 지킨다. 해고 노동자들은 화단 앞 맨땅 위에서 하늘을 이고 추모를 이어가고 있다.
추모와 애도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충분한 추모와 완전한 애도란 가능치 않다. 그런데 우리는 왜 추모와 애도를 계속하는 것일까? 저명한 철학자인 주디스 버틀러는 “애도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폭력에 대항하는 데 필요한 삶에 대한 더욱 예리한 느낌을 잃게 된다.”고 했다. 그 “예리한 느낌”이란 건 뭘까?
나의 운명과 당신의 운명이 근원적으로나 최종적으로나 분리될 수 없다는 느낌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숱한 인연 중 어떤 인연을 상실할 때, 내가 잃어버린 것은 그 인연을 구성하는 상대방인 ‘당신’만이 아니다. 잃어버린 ‘당신’과 함께 ‘나’ 역시 사라지게 된다. 또 나와 당신의 관계는 전적으로 나와 당신만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다. ‘나’와 ‘당신’의 관계를 특별하게 구별 지으면서도 연결하는 인연들, ‘우리’의 관계성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은 그런 중요한 관계의 끈을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애도는 혼자서 골방에서 슬퍼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구성하는 복잡한 수준의 정치공동체의 느낌을 제공해준다고 했다.
버틀러는 이런 질문도 던졌다. “누가 인간으로 간주되는가, 누구의 삶이 삶으로 간주되는가, 무엇이 애도할 삶으로 중요한가?” 성소수자 추모행사가 해고 노동자의 문제와 한 장소에서 만난다는 것을 이 질문과 연결해본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하지 무슨 성적 지향이 중요한 문제라고…’, ‘인권운동이 큰일을 해야지, 너무 소수자의 문제에 매달리는 거 아냐’라는 볼멘소리를 듣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부인 당하거나 존재 자체로 말미암아 위협받지 않을 권리,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인정받을 권리를 외친다. 해고 노동자들은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희생이 노동자들에게만 전가된 불평등함을 지적한다. 또한 이 사회 속에서 노동자 신분이 겪는 불평등과 무시를 호소한다. 둘 다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선거 전 약속을 헌신짝 취급하는 여당과 일부 세력의 압력에 꼬리 내리기에 여념이 없는 야당이 합작으로 배신의 연속극을 찍어대고 있다. 바로 여기서, ‘성소수자나 노동자가 인간으로 간주되는가?’, ‘성소수자나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애도할만한 삶으로 여겨지는가?’는 공통된 질문이다.
유엔의 정책방향성을 보여주는 반기문 총장의 발언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발언록이다. 최근 몇 년간 반 사무총장은 성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발언을 힘주어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반 사무총장의 사견이 아니라 유엔의 정책 방향성을 보여준다.
2011년 6월 17일, 유엔인권이사회는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대한 유엔 결의안’을 처음으로 채택했다. 이 결의안을 전후로 해서 정부들의 의견도 달라지고 있다. 2005년에 당시 유엔인권위원회(현 유엔인권이사회의 전신) 차원에서 처음으로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에 관한 공동성명’이 제기됐을 때는 겨우 32개국이 서명했을 뿐이었다. 2011년에는 85개국으로 늘어났고, 그 결과 최초의 유엔결의안이 채택된 것이다.
또 유엔은 이 결의안에 기초해서 2011년 12월에는 유엔인권최고대표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 역시 최초의 공식적인 유엔 보고서로서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을 이유로 한 개인들에 대한 차별적인 법과 관행, 폭력행위에 관한 보고서’란 제목으로 노동, 교육, 건강 분야 등에서의 차별과 성소수자들에게 자행되고 있는 증오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핵심적인 권고사항은 동의한 성인 간의 동성 관계를 범죄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법이 있다면 폐지하라고 권고하고 있다(보고서 84(d)). 아울러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을 차별금지 사유로 명시한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하고 있다(보고서 84(e)).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회의 방향성은 거꾸로 가고 있다.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은 반대 세력에 굴복한 의원들의 퇴보로 법안 자체가 철회될 예정이라 하고, 문용린 교육감은 성적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의 전면 개정을 부르짖고 있고, 동성애를 처벌하는 군형법 제92조6을 폐지하기는커녕 더 개악하려는 시도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추모와 애도의 정점은 우리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적 조건을 바꾸는 것일 게다. 그중 하나가 차별을 조장하는 법의 폐지이고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의 제정이다. 인종차별과 성차별, 노동차별을 없애는 것과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없애는 것은 다르지 않은 인권투쟁이다. 미국의 경우, 2009년 통과된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범죄를 처벌하는 법은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이후 제정된 법이다. 혐오범죄 항목에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을 추가한 것이다.
입법을 위해 노력해온 이 중에 주디 쉐퍼드가 있다. 그녀의 아들인 매튜 쉐퍼드는 1998년 동성애를 혐오하는 두 청년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당시 매튜는 20살의 대학생이었다. 아들의 죽음 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맞서 온 어머니는 법안 통과를 기뻐하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누구이며, 당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마음을 여십시오. 편견과 추측을 쫓아버리십시오. 증오를 이해와 공감과 수용으로 바꾸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지지해주십시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성소수자 차별 반대 발언들2013년 4월 15일, <인권, 성적 지향, 성정체성에 관한 오슬로 회의>에 전한 비디오 메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