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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버림
에고의 해체
가령 참나의 시각에서 보듯
모든 게 완벽하여 지각된 "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일이 생기겠는가?
에고의 소멸
신에 내맡김
깨달음
02. 인간의 딜레마
들어가며
인간이 노력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발견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흔히 지금을 '정보시대'라고 부른다.
과학과 기술은
실용적 응용분야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는
촉매역할을 한다.
즉
일련의 끝없는 확장이
새롭게 등장하도록
촉진시키는 매개자인 것이다.
이런 확장을 하려면
새로운 개념의 계획과
지적 구성물(사고)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런 촉진활동을 통해
좀더 심화된 연구 개발을 뒷받침하는
새롭고도 상호관련성을 지닌
중요한 저서와 연구논문 등이 나왔다.
그리고
그런 저서와 논문은
다시 또 다른 발견의 순환으로 이어진다.
진화로 인한 스트레스
인간 지성의 진화는
잠재성의 출현을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 잠재성이란
또 다른 수준의 향상된 역량이
나타날 수 있도록
촉진하는 것이다.
지성의 내재된 기능은
의식자체의 내면의 빛이
빚은 결과다.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이런 능력은
호모 사피엔스 종에게만
나타난다.
호모 사피엔스 이외의 다른 생명체는
생물학적 운명과 잠재성을
비유동적으로 표출할 뿐이다.
끊임없이 진전되는 진화의 결과로
인류는
많은 재능을 부여받았지만,
동시에
지속적인 변화와
사회적 격변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따라서
부조화, 불협화음, 갈등은
인간 종에게 고유하게 나타난다.
이는
인류 역사의 93% 동안
전쟁중이었다는 기록으로
증명된다.
진화로 인한 변화때문에
인간 세상의 어디에서나
실존주의적 불안과 불확실성이라는
인간의 특성이 나타난다.
이 특성은
유전상 중대한 결함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정신이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분간할 수 없으므로
그러한 특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한계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집단적인 인류의 정신은
심지어 방안에 놓인 코끼리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가 된다.
이 한계는
에고의 핵심인
나르시시즘적인 성향이 지닌
허영때문이며,
천성적으로
순진무구한
무지때문이기도 하다.
에고는
필사적으로 의미와 확실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합리적 의사결정과 행동에 필요한 기초를 얻기 위해
여러 신념체계에 매달린다.
현자들은
인간의 모든 지식은
기껏해야 잠정적이고
추측에 불과하며,
나중에 교정될 수 밖에 없음을
이미 깨달았다.
심지어 소위
"사실"조차도
잠정적 언술에 불과하다.
데이터 분석은
맥락에 의존하고
따라서 나중에
재해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데이터가
끊임없이 덧붙여지면서
그 영향이 미치는
근접분야까지 바꾼다.
그 결과,
줄기찬 변화가 요구되는 의미와
중요성도 재평가된다.
결국
생존이
곧 과학이자
기술이 되었다.
의식연구의 발전
의식연구의 실용적 임상방법론(의식수준 605)이 발견되면서
진화의 나무에서
인간지식의 새로운 가지가 돋아났다.
이 연구는
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기본조건이 지닌 능력과
한계를 동시에 규명했다.
이 발견은
보통 사람들이 나약하게 만드는
부정적 자극이
영적으로 진화한 사람들에게
육체는 물리적으로 전혀 나약하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던
바로 그 시점에 함께
세상에 알려졌다.
진실한 사람들의 생리학적인 반응은
자극에 있어
진실수준이나
의식수준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 결과 1995년 "인간의 의식수준에 대한 질적, 양적 분석과 계량화(Qualitative and Quantitative Analysis and Calibration of the Level of Human Consciousness)"에 맨 처음 보고되었고, 이후 의식혁명에도 나왔다. 의식혁명은 매우 호평받으면서 널리 알려졌다. 또한 노벨 수상자들과 마케팅, 비즈니스, 공학설계 등 다양한 분야의 저명인사들에게도 인정받고, 게다가 그 가르침을 결합해 직접 고안한 프로그램을 영적 교사와 기관에서 다시 확인을 해주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다양한 분야에서 그 정보가 빠르게 확산되고 응용되었다는 사실은, 타고난 지성의 자질이 만든 결과로서 진화하는 인간의식의 준비성과 반응성을 잘 보여주었다.
의식연구에서 파생된 정보는 임상의학 분야에서도 통합되었다. 이로써 난치 환자와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는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해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정신병리 병원이 탄생했다(Hwakins & Pauling 1973). 의식수준의 척도는 심리학, 철학, 정신분석학 이론 그리고 고전적인 존재의 사슬(lovejoy 1936)로부터 파생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와 역사상 계속 반복되는 철학과도 일치했다.(Huxley 1945,Wilber 1997). 그 다음 1에서 1000까지 이 척도를 통해 전체 인간영역을 조사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 척도를 통해서 인간의 조건과 인간조건의 진화에 대해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연구에 따르면 현대인은 이중적 딜레마에 처해있다.
첫째, 인간의 정신은 그 타고난 설계와 구성때문에
진실과 거짓, 사실과 의견, 실재와 환상, 본질과 지각/외관을 분간할 수 없다.
둘째, 현대인은 과학적 원리에 따라 교육받아 비선형적 영적 실재나 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는 탓에
있을 법한 혹은 개연성있는 진실의 편린만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신앙과 이성"은 갈등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획되었다. 이는 1925년 스콥스 재판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그 갈등으로 발생했던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그 이슈가 사실상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유를 붙인다. 왜냐하면 그 이슈는 보다 큰 맥락에서 초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더 큰 맥락이건 선형적, 비선형적 영역을 모두 감싸는 보다 확장된, 포괄적 실재의 패러다임을 나타낸다.
가령 신앙과 비신앙의 관점에서 "교회와 국가간의 높은 벽"을 해석하는 경우처럼 갈등이 정치적으로 표출되면, 양측에서 전혀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는 호전적인 전쟁터와 같아진다. 한쪽은 신앙 그 자체 안의믿음을 주장하고, 한편 다른 한쪽은 역설적으로 세속적 비신앙에 대한 믿음을 주장한다.
맥락의 과학
앞으로 더 설명하면서 분명히 알게 되겠지만,
과학과 이성, 사회적 담론은
주로 내용이라는 선형적인 수준에서 작동한다.
반면
맥락에 따른 의미는
추상적이므로 비선형적 이해를 요구한다.
의식자체는 타고난 것이지만
맥락은 일반적으로 진술되지 않으며,
파악되거나 규정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진실자체에 대한 실질적 과학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하물며 그것을 입증하거나 확인할 방법은
아예 없었다.
따라서
인류는 불가피하게 허우적대고 버둥거리며
계속해서 끝없는 재앙에 빠질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령 다른 결과를 바라면서 정작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양상을 보인다).
다음장에서 좀더 살펴보겠지만,
맥락이 확장되면
갈등의 해결이 촉진된다.
예를들면
물리적 세계는
흔히, 산, 바다, 화산, 숲, 또는
모래사막으로 덮인 건조한 곳으로 서술된다.
적도는 덥고 극지방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용어는
차이들 때문에 서로 다른, 혹은 개별 세상을
잘 설명해내지 못한다.
그것은
눈으로 관찰한 지역과 공간을 표시하는
묘사 중심의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령 위성처럼 고도가 훨씬 더 높은 곳에서 보면, 지구 표면의 온갖 특성들을 동시에 관측할 수 있다. 우리는 그 특성을 따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런 특성이 일종의 갈등을 나타낸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묘사 중심의 서술적 용어가 제한된 지역과 시점을 언급할 뿐이며, 전체를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제한된 위치에서 포괄적 전체로 맥락을 확장하면
자동적으로 애매모호성이 해결된다.
지금 보면 말도 안되지만
과거에는 지구가 둥글다, 편평하다, 또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 등을 둘러싼
열띤 논쟁이 있었다.
이와 똑같은 유형의 사이비 딜레마가
지금도 과학/이성/ 대 종교/영적 진실과
믿음에서 반복된다.
하지만
맥락을 확장하면,
갈등은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갈등은
자의적이고 제한된 시각과 관찰로 생긴
정신작용의 인위적 결과(인공산물)에 불과하다는 점도
밝혀질 것이다.
따라서
패러다임의 한계는
곧 에고의 핵심인 나르시시즘적 성향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면서 생겨난다.
에고는
그 자체의 승리를 위한 진실과 통합성을
희생시킨다.
(과학은
의식수준 400에 한정되어 있다.
반면 비선형적 맥락이나 영적 실제는
500 혹은 그 이상으로 측정된다).
그렇게 비전이 제한되면
인간의 평화와 진보는 손상되고
그 뿐만 아니라 지혜와 행복에도 걸림돌이 된다.
게다가
에고는 이기려는 욕망때문에
진실성 혹은 통합성을 내팽개친다.
이는 억지로 짜맞추어 진행된 스콥스 재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재판중에 클래런스 대로는 논의되어야 할 핵심 문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상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에 대한 인신공격에 빠져 있었다. 알다시피 실제로 진화와 창조는 하나의 동일한 사안이다. 다만 진화론과 창조론을 서술하는 관점이 서로 다를 뿐이다. 그 서술 자체가 패러다임의 한계에 불과한 것이다.
진실로부터 계속 일탈하면
재앙에 버금가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니
그런 일탈을
단순히 지적 호기심으로 여기고 가볍게 넘기면 안된다.
역사를 통틀어 전인류에게 고통을 안겨준 바로 그 요소가 스콥스 재판의 갈등에 내재되어 있다. 대규모 전쟁, 살상, 파괴도 선전 선동된 거짓으로 말미암아 발생한다. 따라서 전세계에 핵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는 이 시점에서 패러다임과 맥락을 이해하는 일은 인류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에고의 핵심인
나르시시즘적 성향이 지닌 허영은
무한하고 경계가 없다.
심지어 대규모 인종살상이나
자살의 시점으로까지 이끌 수도 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에고의 환상이 있다.
허나 이 환상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근원은
에고 자체의 나르시시즘적인 눈먼 성향안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바로
주기적으로 폭발하여
전세계적으로 인구를 대량 살상하곤 하는
시한폭탄의 뇌관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붓다와 그외 여러 현자들이 설명하듯이
'무지"가 죄와 고통의 근원이라면
진실을 파악하고 확인하는 능력이
인간의 구원은 물론 진실을 향한 필수적인 도전에 있어
핵심열쇠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은
나르시시즘이라는
에고의 핵심에 의존함으로써 손상된다.
이 사실은
거부되고 억압되고 매우 젊잖게
인식바깥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에 의한 정신의 손상이라는 결함은
흔히 메시아를 자처하는 나르시시즘적 과대망상증이라고 일컫는 조건에서
지독하게 드러나고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 과대망상증은
의식수준 30으로 측정된다.
(진실대 거짓, 15장 참고).
피리부는 사람 역할을 하는 인식상의 오류
세상은
연극처럼 펼쳐지는 수많은 원인에 현혹된다.
그리고 이 원인은 사실상 허위에 기초한다.
이런 경향의 좋은 사례가 바로 카리스마 넘치는 흡인력을 자랑하는 전세계 독재자들이다. 그들은 역사적으로나 지금이나 모두 의식수준 80에서 180으로 측정된다. (이는 범죄자와 수감자의 의식수준과 같은 수치다). 따라서 독재주의는 사실상 정치적 범죄다. 이는 가족이든 누구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행위를 보면 명백해진다. 반대파 학살은 대개 "국가의 적", 변절자, 믿음이 없는 자 혹은 반대 정당이나 신념체계에 충성했다는 의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아무리 봐도 빈약하기 그지없는 근거들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굶어죽어가는 국민을 학살하고 국가를 파멸과 대량파괴로 몰아감에도 불구하고 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서 거의 광신에 가까운 추종을 받는다.
이렇게 볼때,
인간이 진실과 허위를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은
국가와 전세계 수준에서 자행되는
대규모 자살행위와도 같다.
에고가 실수로 향하는 성향
인간정신은
실존적 불안때문에
광신적, 무차별적 논쟁하기에 좋은 정보라면
작은 조각도 움켜쥐려고 한다.
(그 예로 전체 블로그 사이트는 의식수준 180으로 측정된다).
모든 것은
아이디어나 슬로건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다음 어떤 형태로든 그 정보가 전달되고 확산되기 위해
필요할 뿐이다.
그 내용이
아무리 어리섞고 엽기적이고
심지어 틀렸다고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확장은
과장과 의도적 왜곡은 물론,
감정의 흐름과 선전주의가 보태져
속도가 빨라진다.
맥락이 없다면
그 중요성이나 의미는
온전히 관찰자로 남겨진다.
그리하여
똑같은 정보가 기계적으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것이다.
거짓의 해로운 영향은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보다 널리, 깊이 전파된다.
표현의 자유를 공정하고 공평한 보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기실 표현의 자유와 보도의 공정성은 비례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부풀려진 격언에 불과하다.
그런 보도는 역설적으로 허위와 증오에 진실이나 진실과 동일한 신뢰도와 타당성(상대주의)을 부여한다. 허위와 진실을 구분하는 일은 오롯이 개별 시청자의 몫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미국 인구의 55%, 전 세계 인구의 85%는 이를 분간할 능력이 없다).
정신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미친듯이 버둥거린다.
그래서
모든 견해는 그저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며 덧없는 것임을 시인하기는 커녕,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사생결단하는 성향을 보인다.
밈(유전적 문화전달요소)은
반복에 의해 마치 전염병처럼 빠르게 확산된다.
그리하여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이 심각한 일탈행위는
그 자체로 자가증식적 성질을 띠며,
자기 안에 이미 파괴적 생명을 품고있는 셈이다.
매우 심각한 거짓은
대개 수세기 동안 끈질기게 증식하면서 그
저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나곤 한다.
역사상 가장 현저한 사례중의 하나가 바로 의식수준 90인 "시온 의정서"다. 시온 의정서를 통한 매우 심각한 거짓이 반 자유주의를 확산시켰고, 급기야 나치 선전의 근간이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것은 여러나라에서 잘못된 교리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 심지어 헨리포드를 오염시키기도 했다. 놀라운 점은 그 책은 전부 어느 프랑스 풍자소설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내용과 똑같은 교리를 지금도 여전히 아랍세계에서 학생들에게 사실상의 진실로 가르치고 있다. 그 결과 지금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증오와 전쟁의 원천이 된다.
마르크스 계열, 변증법적 유물론이 "세계적 진보주의"니 "뉴 래프트"같은 새로운 철학적, 수사학적 변장을 하고서 계속 다시 등장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이들은 유행하는 '포스트 모던"하고 상대론적인 이론처럼 보이기 위해서 교육기관을 사로잡아 논리와 이성의 기본 요건마저 버리게 한다. 호로비치는 소위 "파시스트 좌파"때문에 에모리 대학에서 표현의 자유를 거부당했다. 대학 캠퍼스에는 가령, 보수적 학생회 등이 강압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방해하는데, 이는 허버트 마르쿠제의 철학적 이론과 그의 비평이론(의식수준 150)에 영향받은 것이다.
400대 상위수준에서 측정되는
유서깊은 이데올로기가 볼때는
매우 이상야릇하지만,
소위 명망있는 대학에서조차
의식수준 90정도로 측정되는 교수를 초청하여
증오, 불관용, 음모이론에 휩싸인
편집증적 망상을 강연한다.
가령, 미국이 9.11 사태를 은밀히 조직했다. 홀로코스트는 신화일 뿐이다 등의 음모론은 의식수준 90, 때로는 그 수치를 밑도는 것이다. 예일대에서는 초청받은 어느 합창단이 미국에 축복을 이라는 노래를 부른다고 학내에서 물리적 공격을 받았으며, 학내에서 국가 연주는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사실 학계 자체가 현재 의식수준 190으로 하락한 상태다). 에모리 대학은 "모든 백인은 인종주의자다. 그러므로 재교육 주입이 필요하다"라고 가르친다.
거짓이 음모이론 이데올로기(의식수준 160)처럼 보일때에 표면적으로 합리화 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것을 목청높이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 합법적 통화(진실) 대신에 위조지폐(거짓)를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는자는 없다. 이와 반대로 "정상이 아닌 교수들"은 탐욕스러운 기업가들과 똑같은 망상에 빠져 돈을 갖고서 장난치는 형국을 보인다. 가령, 대학교수 연봉이 10만달러라면 그럴만한가?
온전한 진실에 대한 존중,
더불어 거짓을 인식하고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은
의식의 진화는 물론, 영적 진화자체의 가장 중요하고도 진보된 태도다.
여러 중대한 발견은
인간생활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다.
불과 21세기에 들어와서야
항생제와 면역법의 발견으로
과거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감염질환과 전염병이 사라지고 있다.
과대망상과 편집증적 망상은 예전에는 정신병, 뇌매독, 또는 심각한 정신질환의 특성으로 인식되었지만, 지금은 인간에고와 미디어 자체에 만연한 질병으로 결합되었다.
미디어는 거짓의 전파라는 세균을 먹고산다.
새로운 질병이 가져오는 결과는
과거의 질병만큼이나 심각하다.
왜냐하면
스스로 진실과 거짓을 분간할 수 없는 순진한 사람들이
잘못된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죽음을 낳기 때문이다.
어떤 전쟁에서든
가장 많이 살상 당하는 쪽은
바로 민간인이다.
그러므로
거짓은
대량 기아사태, 대대적인 파괴, 극도의 고뇌, 고통, 집단학살,
대량 살상을 낳는다.
순진한 에고는 전쟁을 비롯해 진짜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에 관한 진부한 의견(의식수준 185)과 소망 충족적 판타지에 쉽게 속는다. 세상은 순진하게도 이런 진부한 말은 물론 이데올로기적 허구와 유엔(의식수준 180)같은 가짜 해결책에 의존한다. 그 결과 이데올로기적으로 꾸며낸 세계 연합체는 심지어 공공연히 벌어진 전쟁이나 명백한 인종학살 사태를 규탄할 수도 없다.
가짜 해결책의 또 하나 불리한 점은,
그들이 확증가능한 진실에 근거한 실질적 해법을 찾는 일을
오히려 사전에 막고 방해한다는 것이다.
또한
가짜 해결책이나 이데올로기적 허구는
도덕적 등가성(의식수준 170)이라는 궤변을 내세워
사실을 논리적 오류에 빠뜨리고 왜곡하는 것은 물론,
더 중대하게는 그 맥락까지 왜곡시켜
어떤 행동이라도 정당화되고 홍보될 수 있게 만든다.
이미지의 최면효과
현재 전세계 독재자들과 불량국가 지도자들은
대략 의식수준 80-180정도로 측정된다.
사회에 해를 끼치고
문화적으로 손상을 입히고 퇴행하는 모든 양상은
200수준 이하로 측정된다.
그와 같은 경향은
윤색된 이미지로부터 추동력을 얻으며
이때 그 이미지는 연예계 유명인사를 거쳐 대중화되어
더욱 빨리 퍼진다.
그러한 유명인사들은
아첨을 떨며 독재자를 껴안으면서
멍청하게 사진을 찍곤한다.
의식측정이 없다면
문화와 경제, 정치와 법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유혹에 빠지는 부도덕함을
서로 분간하기가 어렵다.
제아무리 지독하고 크다 할지라도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모든 탐닉행위는
대중화나 사법상의 변덕에 의해
얼마든지 합리화할 수 있다.
가령 2007년 6월 콜로라도 대학 볼더 캠퍼스에서 "마약을 하고 콘돔없이 섹스하라"고 주장했던 콜로라도 학생 강연(의식수주 180)이 그 좋은 사례다.
인간정신은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진실과 거짓을 분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매끈한 이미지와 발표로 눈부신 매력을 발산하는,
양의 탈을 쓴 잘 세공된 위선자들에게
쉽게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양의 탈을 쓴 늑대는 불길한 의식수준인 120으로 측정된다).
지도자들은 기저에 깔린 평판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많은 공적 인물들이 처음에는 진실인척 하다가 나중에는 대중의 인기와 과대망상증에 굴복하는 점이 현실적으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대중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인물들의 의식수준이 하락하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권력은 부패한다라는 명제는
누구나 다 아는 흔한 이야기이며,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다.
겉으로 대단해보이는
전세계 저명인사들 중에
매우 심각하게 타락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폴레옹부터 히틀러를 거쳐
현재 독재자들, 그리고 과거 '노예 해방자'로 간주되는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현재 해방자이며 그렇다고 소문난 지도자들까지
죄다 그 반대편으로 변해갔다.
역사적으로 볼때,
오늘의 해방자는 내일의 독재자다.
그들 중 다수는 초기에 최고 400수준까지 측정되었지만,
나중에 200이하까지 내려가곤 했다.
이와 똑같은 현상은
끊임없는 대중 스캔들로 타락하는 최근의 문화뿐 아니라
고대문화에서도 발생했다.
전체 문화내에서 영적 지식과 진보에 대한 가짜 모방이 이루어졌다. 이 모방은 그 차이를 탐지해 내기 위해서 의식측정 기술의 전문지식이 필요할 정도까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인터넷상에서도 소문난 영적 프로그램을 보여주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모으려고 한다. 그런 프로그램들은 대개 즉각적인 깨달음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터무니없는 약속을 떠벌린다. 이런 것들은 모두 상당한 돈을 주고 이루어진다. 특별한 축복이나 힘을 준다며 5천달러, 혹은 그 이상에 판매되곤 한다. 확실히 그런 모집권유나 유혹은 영적 에고의 나르시시즘에 영합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문제를 키우는 형국이 된다.
외부의 영향을 쉽게 받는 순진한 에고에게 특정한 사람이나 어떤 생각의 길이 두드러지거나 각광을 받거나 뉴스가 된다는 단순한 사실은 신뢰라는 신화적이며 마법적이며 미화된 아우라를 부여하기 마련이다. 이 아우라는 어쩌면 중요하게 들리는 직위나 이름, 제목때문에 더욱 강화될 것이다.
보호장치
진실을 찾는 사람은
내면의 겸손과 지혜를 통해
인간정신자체의 타고난 한계를 진지하게 알아차린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의 중재자로서
더이상 개인의 민감한 에고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가 확증가능한 실재에 근거한다는 점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전세계 인구의 약 85%가 의식수준 200이하로 측정된다는 인식을 통해 증명된다. 이를 총괄하면 인간이 직면한 전체 문제의 92%이며, 이들은 사회 전체의 부정적 결과 중 55%만큼을 가져온다. 총괄하자면 특정 소집단은 사회내에서 계층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의식수준 200이하로 측정되는 특정 소집단은 손상된 실재의 대체 현실속에서 살아간다.
심지어 진실한 기관안에도 전혀 진실하지 않은 개인과 하자있는 기능영역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로 책임있고 진실한 기관은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바로잡아 나간다.
따라서
항상 완벽해질 필요는 없지만
늘 관심을 갖고 즉각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
정직은
실수와 오류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고쳐나가는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미덕이다.
모든 인간과 인간이 만든 기관은
일종의 학습곡선 위에 서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실수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난이 아니라 넉넉한 관용이 더 적합하다. (기독교 신학체계에서도 기술적으로 보자면 죄는 사실상 실수나 오류에 해당한다).
해결책
자기기만의 씨앗은
인간정신의 구석진 곳에 숨겨져 있으며,
구원의 씨앗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구원의 씨앗은
의식영역 자체의 천성적인 부분이다.
의식연구라는 방법론을 활용함으로써
이제 정신의 타고난 한계를 뛰어넘어
본질과 외관을 분간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정신의 불가사의를 해결하는 수단이다.
그 불가사의란 소크라테스와 데카르트가 매우 정확하고 규범적으로 진술했으며, 스콥스 재판에서 분명히 드러났던 바로 그것이다. 정보시대는 분명 허위정보를 퍼뜨리는 성향이 있긴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진실(본질)과 거짓(외관)을 분간할 수 있는 수단도 제공했다. 이점은 개인의 행복을 비롯해 인간생활의 모든 면에 있어서 잠재적 혜택을 안겨주는 분명하고도 심오한 함의가 있다.
여러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지식은 수많은 진보를 이루어 냄으로써 철학이 태동하던 시기의 회의론의 진상을 밝혀내고 심지어 조롱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인간정신은
그 어떤 새로운 발견에 대해서도
언제나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새로운 발견 앞에서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고
오랫동안 품어왔던 견해를 반영하는 도전을 스스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가령 참나의 시각에서 보듯 모든 게 완벽하여 지각된 "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일이 생기겠는가?
에고는 필사적으로 의미와 확실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합리적 의사결정과 행동에 필요한 기초를 얻기 위해 여러 신념체계에 매달린다
의식연구라는 방법론을 활용함으로써 이제 정신의 타고난 한계를 뛰어넘어 본질과 외관을 분간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정신의 불가사의를 해결하는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