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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피의 세례’에도 투표율 95.5%… 제헌의회 선거의 기적 이끌다
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조선일보
복거일 소설가
입력 2023.09.13. 03:00업데이트 2023.09.13. 08:18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09/13/MU3N5NZE3JF7ZHL7ZCUG3IXW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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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한국에서 선거를 실시하는 일을 주관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들어와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시리아, 프랑스, 중국, 인도, 엘살바도르,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필리핀의 8국 대표들은 인도 대표 메논을 임시의장으로 뽑았다.
제헌의회 개원… 이승만 "투표율 90% 넘는 건, 세계에 민족의 애국심 보여준 것" -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개원식이 열리고 있다. 개원식에는 5·10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 198명(정원 200)이 참석했다. 이승만은 개원식에 앞선 예비 회의에서 국회의장으로 당선됐다. 소련은 남로당을 앞세워 5·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전국에서 폭동을 일으켰지만 선거는 95.5%의 투표율로 마무리됐고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이승만은 투표율이 90%를 넘은 것에 대해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세계에 표명한 것"이라고 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메논은 하지 주한 미군 사령관과 겐나디 코로트코프 러시아군 25군 사령관에게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나 코로트코프는 답신하지 않았고, 대신 유엔 주재 러시아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거부 의사를 밝혔다.
러시아가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거부하자, 이승만은 즉시 남한에서 총선거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은 ‘미국과 러시아가 동시에 철군하고 남북요인회담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을 폈다.
위원단 안에서도 의견들이 엇갈리자, 위원단은 메논으로 하여금 유엔 본부의 지침을 받아오도록 했다. 메논은 소총회에서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네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소총회는 첫 대안인 ‘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한국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안’을 결의했다. 이승만의 방안에 우호적인 메논이 그 방안의 타당성을 널리 알린 덕분이었다.
한국임시위원단 의장 메논이 유엔 본부로 떠나기 전날,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메논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모윤숙과 메논은 연인이었다. 밤이 깊었으므로, 모윤숙은 거절했다.
이승만이 말했다.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고비에 밤이고 아침이고가 있나?”
모윤숙은 금곡릉에 달구경 가자고 메논을 꾀었다.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차나 한잔 하자면서 이화장으로 들어갔다. 이승만이 마당으로 뛰어나와 그들을 반겼다.
이승만이 떨떠름한 메논에게 차를 대접하는 사이, 프란체스카 여사는 모윤숙에게 한지 두루마리를 건넸다. 위원단은 한국 지도자들 200인 이상의 날인을 받은 의견서를 요청했는데, 비서의 실수로 이승만은 뒤늦게야 마련한 것이었다. 이화장을 나오자, 모윤숙은 메논에게 두루마리를 건네면서 이실직고했다.
메논이 유엔 본부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이승만은 Marion Moh(모윤숙) 명의로 열 통 넘는 전보를 쳐서 자신의 주장을 상기시켰다. 메논은 Marion Moh에게 꼬박꼬박 답신을 보내왔다. 덕분에 이승만의 주장에 비판적이었던 메논은 적극적으로 그의 주장을 소총회에 소개했다.
이승만을 깊이 관찰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월터 로버트슨이다. 일본의 항복 뒤, 미국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세력 사이의 ‘국공휴전(國共休戰)’을 주선했는데, 당시 로버트슨은 미국 대통령 특사 조지 마셜 원수를 보좌했다. 이어 한국전쟁 막바지에 이승만이 반공포로들을 석방해서 온 세계가 경악했을 때, 그는 미국 대표로 이승만과 협상해서 사태를 깔끔하게 수습했다.
은퇴한 뒤에 로버트슨은 당시를 회고했다. “(이승만은) 모택동과 같은 종류의 헌신적이고 굳센 광신자(fanatic)였다…장개석도 그랬다.” 그리고 덧붙였다. “만일 당신이 그런 (광적인) 부분으로부터 그를 떼어낼 수 있었다면, 당신은 그보다도 더 매력적이고, 부드럽고, 점잖은 노인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장개석, 이승만, 그리고 모택동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자기 신념에 맞는 나라를 세웠다. 역사의 물결이 유난히 거세었던 20세기 전반의 동아시아에서 광신자의 풍모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을까? ‘미인계’로 자신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이승만의 행적이 던지는 진지한 물음이다.
남한 총선거가 확정되자, 러시아는 곧바로 선거 방해에 나섰다. 그리고 두 가지 공작을 추진했다. 먼저 시작된 공작은 남로당과 그 외곽 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동원한 전국적 폭동이었다.
2월 7일 시작된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교통이 마비되고 통신이 끊기고 공장들이 멈췄다. 곳곳에서 경찰서들이 폭도들의 습격을 받았고, 많은 경관들이 살해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공연히 투표 방해에 나서서, “미제가 꼭두각시 유엔을 통해서 획책하는 제국주의 선거”에 참여하는 매국노들을 처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이 ‘2.7구국투쟁’이라 부른 이 폭동은 전국을 혼란에 빠뜨렸고 정상적 선거 활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그동안 폭동을 일으켜서 체포된 공산주의자 669명을 미군정청이 석방한 조치였다. 한국임시위원단은 도착하자마자 정치범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한민당 대표 김성수는 ‘남한에 정치범은 없고 폭도들만 수감되었다’고 설명했지만, 위원단은 수감된 공산주의자들을 풀어주라고 거듭 요구했다. 그런 압력에 굴복해서, 하지 사령관은 그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자연히, 남로당의 조직이 완전히 복구되었고, 기세가 오른 남로당 지도부는 폭동을 통한 선거 방해를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선거 방해가 가장 심각했던 지역은 제주도였다. 4월 3일 남로당 간부 김달삼의 지휘 아래 제주도 좌익이 봉기해서 경찰관들과 ‘반동분자’들을 습격하고 살해했다. 이 지역의 좌익은 우익에 대한 반감이 유난히 커서, 경찰관을 ‘개’라 부르고 경찰관들과 우익 인사들의 가족들까지 해치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래서 같은 남로당이 일으킨 전국적 규모의 폭동들인 ‘대구폭동’이나 ‘2.7구국투쟁’보다 제주도만의 ‘4.3사건’이 오히려 피해가 훨씬 컸다.
이런 사정에다 반군이 한라산에서 유격전을 폈다는 사정이 겹쳐서, 미 군정청과 대한민국 정부의 무자비한 대응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고한 주민들이 참화를 입었고, 그 상처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또 하나의 공작은 ‘남북협상’이었다. 남한 총선거를 거부한 김구와 김규식을 평양에 초청해서 남한 정부의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시도였다. 이 공작에서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한다”는 공동 성명서가 나왔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와 남한 ‘좌우합작’의 우익 지도자 김규식이 가담한 터라, 남한 총선거 비난 성명은 유엔 주도의 남한 총선거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이승만은 러시아 주도의 선거 방해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궁극적 충성심은 소비에트 러시아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번 선거의 본질은 자유주의를 따르는 민족주의자들과 전체주의를 따르는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대결임을 일깨웠다. 그리고 “민족 진영에서 어떤 개인이나 어떤 단체가 승리할까가 우리의 문제가 아니요, 오직 독립주의와 독립반대주의와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기회만 엿보는 중간주의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떤 주의가 성공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서 투표”하라고 구체적 지침을 제시했다.
좌익이 일제히 폭동을 일으킨 터라,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승만을 따르는 독립촉성국민회 청년단, 대한노총, 서북청년회 같은 청년단체들이 치안 유지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좌익의 선거 방해에 맞섰다.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전국 각지에서 봉화 시위, 관공서 습격, 입후보자와 선거 관계자들에 대한 테러, 교량과 철도 파괴, 전화선 끊기와 전신주 뽑기를 통한 통신 방해, 각종 시설들에 대한 방화와 같은 폭력 사건들이 일어났다. 인명 피해도 엄청났다. 선거공무원은 15명이 죽고 61명이 부상했다. 입후보자는 2명이 죽고 4명이 부상했다. 경관은 49명이 죽고 128명이 부상했다. 경관 가족은 7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했다. 우익 인사는 11명이 죽고 47명이 부상했다. 일반인은 107명이 죽고 387명이 부상했다. 폭도는 261명이 죽고 123명이 부상했다.
남녀 모두 평등하게 투표 - 1948년 5·10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아이를 업은 여성의 모습도 보인다. 5·10 총선은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인들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그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선거구들에서 투표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투표자들은 아침부터 긴 줄을 서서 기다렸고 흡족한 마음으로 ‘투표’라는 낯선 일을 치렀다. 덕분에, 끝내 투표를 진행시키지 못해서 선거가 연기된 북제주군의 2개 선거구를 빼놓은 198개 선거구에서 당선자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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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환경 속에서 가까스로 태어나려는 대한민국이 ‘피의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기적이란 말은 너무 헤프게 쓰이지만, 이번만은 적절한 표현이다. 그런 기적은 유권자 813만2517명의 96.4%인 784만871명이 등록했고 등록 유권자의 95.5%인 748만7649명이 투표했다는 사실이 증언한다.
‘5.10 총선거’는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아 본 적이 없는 한국인들에겐 새로운 경험이었고 한국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점을 잘 보여준 것은 투표장의 풍경들이었다. 여성들이 투표장에 나온 것 자체가 혁명적이었다. 비밀 투표가 처음인지라, 아내가 남편을 따라 기표소에 들어가려는 일이 흔했고, 선거관리 요원들이 부부를 떼어놓느라 애를 먹었다. 기표소에서 나오면, 사람들은 흔히 선거관리 요원에게 투표지를 내밀었고 투표지를 접어서 투표함에 넣으라는 안내를 받아야 했다.
한국임시위원단은 남한의 선거가 “발언, 언론 및 집회의 자유라는 민주적 권리들이 발휘된 합당한 정도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으며 “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었고 한국인들의 대략 3분의 2를 이루는 주민들이 사는 한국의 지역에서 유권자들의 자유 의지의 유효한 표현을 이루었다”고 발표했다.
하지 사령관은 이번 선거가 “만일 전 조선 역사상에 있어서가 아니라면 근대 조선사상에 가장 중대한 진전”이라 평했다. 이승만도 흡족한 마음으로 “금번 총선거에 90퍼센트 이상의 호성적(好成績)을 얻은 것은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세계에 다시 한번 표명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승만의 평가대로 “호성적을 얻은” 남한 총선거에서 가장 많은 것을 잃은 세력은 남북협상파였다.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 선언했으니, 이제 국회를 중심으로 펼쳐질 남한 정치에선 설 땅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남로당의 선거 방해가 워낙 극렬했고 피해가 커서, 남북협상에 대한 기대나 지지도 크게 줄어들었다.
무엇보다도, 남북협상에서 얻은 것이 없었다. 김구는 김일성에게 “선물”을 달라고 요청하면서 감옥에 갇힌 조만식을 석방해서 자신과 함께 남한으로 가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이런 부탁마저 야멸차게 거부했다. 남북협상파의 쓸모는 이미 다한 것이었다. 결국 김구와 김규식이 이끈 남한 대표단은 남한의 총선거를 비난한 것 말고는 이룬 것 없이 돌아왔다.
모윤숙(왼쪽) 시인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의장 메논(오른쪽). 두 사람은 연인 사이였다. /조선일보DB·게티이미지코리아
2023.09.13 06:50:52
문자 그대로 암울했든 시절, 그 당시 이승만이 없었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까? 자유민주를 위해 혼신의 힘을 바친 사람은 오직 이승만이었다. 진정 그는 이나라의 국부다. 집권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 부패 독재의 낙인은 이승만을 보좌한 당시 자유당 인간, 이승만 개인은 어떠한 부조리와 부정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젠 전체를 내다보고 이승만의 평가를 다시 해야 될 싯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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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06:47:51
좌파들이 대한민국 건국 1948년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 현재 중국이 한반도를 식민지화시키려는 동북공정의 모든 논리는 1948년 5.10 총선거로 모조리 무력화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중국에 대한민국을 상납하려는 좌파들은 1948년을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대한민국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식민지였다는 중국의 역사왜곡이 먹혀들어가려면 조선의 왕조시대의 역사가 그대로 이어져야 하고, 1948년 5.10총선거처럼 전국민이 자기손으로 자주독립 주권국을 만들어내는 역사는 부정되어야만 한다. 1948년 5.10총선거는 국민 손으로 5천년의 왕조시대와 노예시대를 끊어버리고 국민 각자의 선택으로 노예가 아닌 자주독립국가의 당당한 주권자가 되고자 선택을 한 날이다. 그리고 이 자주독립적인 선택 덕분에 현재의 국제체제에서 독립주권을 가진 국가로 공인을 받은 것이고. 이것은 중국에서 주장하고 있는 모든 동북공정을 단 하나의 사례로 무력화시키는 역사적 사례이기 때문에 꼭 기억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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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06:35:41
대한민국의 뿌리를 바로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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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07:52:07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시를 쓴 모윤숙의 헌신도 시처럼 비장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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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07:47:41
물로 씌어진 이승만의 이름을 청동에 새길 시간이다. 기적의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며 자유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동참하자~ 이승만 기념만 설립에 벽돌 한 장을 내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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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07:57:20
김구,김 규식 신파조에 매몰되어 공산당(김 성주)을 정상적 인간으로 생각하는 과오를 범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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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07:32:37
복거일주필의 이승만에세이 기다려집니다 감사합니다. 위대한 건국대통령을 알게 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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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07:02:17
좋은 연재글 잘 읽고 있습니다. 오늘편은 편집오류가 있으니 수정 바랍니다. 아래 문구에 이어지는 문장들이 글 중간과 끝에 두 번 반복됩니다. "한국임시위원단 의장 메논이 유읜 본부로 떠나기 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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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06:31:58
1960,70년대 우리 젊은 이들이 마음주었던 제3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이승만대통령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고 청렴하고 전쟁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제대로 치루며 국가재건에 성과를 올린 지도자가 또 있었나 찾아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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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08:21:46
미군정청의 여론조사 결과 자유주의보다 사회주의가 좋다는 쪽이 80%를 넘었다. 특히 교육 받은 자들일수록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 그랬던 한국이 반공국가가 된 것은 6.25 때 공산당의 실상을 민초들이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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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08:33:58
정말 이승만 대통령은 현실을 정확하게 보셨군요. 김구와 김규식은 상황 파악에 오류를 범했고요. 김구와 김규식은 이미 북한에 러시아의 조정을 받은 벌갱이 김일성 정권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긴 게 큰 잘못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놈인지를 모르고 이상적인 꿈에 젖어 있었던 거지요. 그러나 이승만은 현실을 정확히 보았다는 게 위대한 겁니다. 이승만 같은 지도자와 모윤숙 같은 애국시인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참 아슬아슬했군요. 그런데 그 첫번째 총선에서 국민 95%가 투표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병원 입원 환자 빼놓고는 다 나와서 투표했다는 건데, 당시 나라를 세우려는 열망이 대단했군요. 정말 기적으로 대한민국을 세운 거로군요. 이런 나라를 요즘 민주당 종북 좌파, 주사파들이 다시 북한으로 만들려고 발악하는 거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내년 총선 승리한 뒤 벌갱이들 쓸어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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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08:36:33
... 지금도 기억되는 이승만 대통령의 구국 충정 연설 대목 ~ " 뭉치면 살구 , 흩어지면 죽는다 " .. 자유민주 애국민 이라면 국가위기의 상황시엔 자기최면 하듯 각골명심 해야 할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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