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장준하 장남이 털어논 의문점
장준하 평전/[1장] 풀리지 않는 의문사 반생의 위업 2008/10/07 08:00 김삼웅 필자는 1983년 7월 초 서울 성북구 방학동 모 호텔에서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과 만나 부친의 사인과 그 주변 얘기를 두 차례에 걸쳐 들었다. 이 내용은 정리되어 <신동아> 1983년 8월호에 '아버님은 암살당했다'라는 장호권의 이름으로 실렸다. 잡지사의 청탁을 받고 필자에게 원고정리를 부탁한 것이다.
이때에 들었던 내용 중 주요 부분을 <신동아>에서 발췌한다.
아버님이 박정희씨와 구체적으로 접촉(?)하게 된 것은 5.16 이후였다고 생각한다. 5.16 직후 어느날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밑에 있던 육군 모 대령이 거액의 수표를 갖고 종로에 있는 사상계사로 아버님을 찾아와 회유에 나섰다. 군사정권을 지지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아버님은 대령의 뺨을 때려 내쫓았다고 한 얘기를 들었다. 이것이 아마 아버님과 박대통령, 김종필씨 사이가 나빠지게 된 감정상의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군사정권과 <사상계>와는 심한 갈등관계를 빚게 되었다. 물론 군사정권에 비판적인 <사상계>의 논조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갈등의 배경에는 이런 감정도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석 12)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으로 기억된다. 정계 원로인사 몇 분과 재야인사 몇 분의 은밀한 회동에서 장선생을 박정희를 깨뜨리는 데 앞장세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이 무렵 아버님은 평소에 잘 출입하지 않았던 동교동 김대중씨 댁을 찾아가기도 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종합해 볼 때 무엇인가 어마어마한 일을 추진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석 13)
다음은 이부영 민주당최고위원께서 직접 들은 이야기로서, 그가 김준엽 전 고대총장에게 들은 말이라면서 내게 전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사고직전 아버님이 김 전 총장을 찾아와 “박정희를 깨치는 것은 민중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니 게릴라전으로라도 박을 제거해야 하겠다.”고 말하여 자기가 말렸다는 것이다. 아버님은 그날 “군부쪽에도 상당한 연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버님은 김경원(전 주미대사, 청와대비서실장) 씨로부터 변고를 당하기 3개월 전쯤에 “몸 조심하라”는 내용의 전화를 받은 바 있다. 그래서 아버님은 “내가 독립운동하면서 죽지 않고 지금까지 덤으로 살아왔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몸 조심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김경원씨는 <사상계>의 단골 필자중의 한 분으로 아버님과는 오랜 인연이 있었던 분이었다. 때문에 무엇인가 집히는 것이 있어서 ‘몸조심’을 귀뜸했을는지 모른다. 결국 아버님의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수상쩍은’ 행동이 정보기관의 촉수에 잡히게 되고, 상대측은 김대중씨의 동경납치 실패사건도 있고 하여 더욱 치밀한 방법을 택한 것이 약사봉 계곡의 실족사를 가장한 살해음모가 아니었을까. (주석 14)
나는 1976년 4월 19일 테러를 당하여 3개월 반 동안 서울 경희의료원에서 입원을 한 적이 있다. 아버님의 변사사건 후에 친지들과 언론사 등에서 사인을 밝히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의문사’를 제기했던 <동아일보> 관계자들이 구속되는 등 당국의 탄압이 심해지고, 정국이 더욱 경색되어 가면서 한 재야인사의 의문사에 대한 규명활동도 묻혀졌다.(중략)
그런데 하루는 입원중인 병원으로 하비브(전 주한미국대사)씨가 갑자기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방문은 경찰의 봉쇄로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하비브는 며칠 후 비밀리에 인편으로 한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지금도 그 편지 내용에 대해 의아스럽게 여기고 있다.
내용인 즉 “당신 아버지 장준하씨가 이루고자 했던 일이 곧 이뤄질 터이니 몸조심하고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 정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만나고자 했고, 그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지 전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단순한 위안의 편지라기에는 하비브의 비중과 서한의 내용 때문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준하가 이루고자 했던 일’이라면 민주화와 민족통일이었다. 그 외의 그의 심중에 또 다른 무엇이 있었다면 ‘일본군 출신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권력으로부터의 제거’였을까.
미국과의 관계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밝혀 둘 것이 있다.
196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은 분열되어 있었다. 공화당은 일찌감치 박정희 대통령을 후보로 내세워 2기 집권의 채비에 나섰다. 그 무렵에 미국 정부에서 사람이 찾아와 아버님께 <대통령이 되는 길>이란 책과 당시 외국의 수상이나 대통령이 즐겨 쓰던 까만 모자를 보내왔다. 책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그 모자는 지금도 어머님께서 보관하고 계신다. (주석 15)(이 책은 <사상계> 사장실에 비치되어 있었고 주간 안병욱은 이 책을 읽고 있는 장준하를 보고 정치에 뜻이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아버님과 김재규(전 중앙정보부장)씨의 ‘세간의 오해’에 대해 이 기회에 몇 가지 사실을 밝혀두고자 한다. 김재규씨와는 공적인 관계 이전에 집안간의 연고가 있었다. 김재규씨의 형님인가 누가 우리 할아버님께 가르침을 받은 바 있어 두 집안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가끔 왕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버님이 국회의원이 되고 국방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김재규씨는 군단장으로 재직하면서 국방위에 자주 출석하여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 아버님의 강직한 성품과 김재규씨의 직선적인 성격 때문이었는지 두 분은 전혀 다른 입장에서도 심정적으로나마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것 같다. (주석 16)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그러니까 1976년 말쯤으로 기억되는데,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그래서 남산 근처에서 만났다. 아버님 사후 처음으로 만난 셈이다.
김부장은 그날 “자네 부친의 사망 사건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란 말을 했다. 하비브씨가 했던 말과 연결되어서 무엇인가 집히는 듯 했지만, 얘기는 더 이상 진전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0.26사태가 있기 3개월쯤 전 다시 사람을 시켜서 나에게 “미국으로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제의를 해왔다. 필요하다면 여권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김재규 부장이 왜 나보고 미국에 나가 있으라고 했는지, 단순한 친절이었는지,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는지, 지금도 나는 그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더욱이 그런 제의가 있은 지 얼마 후에 김부장의 ‘10.26거사’가 있었고, 그는 처형되었다. 김재규씨는 인간미가 있고 의협심도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와 아버님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도 알 길이 없다. 아버님의 생전의 ‘미수’에 그친 ‘거사’와 죽음의 진상에 대한 그의 인식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주석 17)
이 부분과 관련하여 필자가 ‘민주화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 김재규의 가족이 그의 명예회복에 대해 신청했었다. 위원회에서는 장호권씨의 증언을 듣고자 그를 초청하여 증언을 들은 바 있다. 장씨는 여기서도 앞에 인용한 비슷한 내용을 진술했다.
주석
12) 장호권, '아버님은 암살당했다', <신동아>, 1983년 8월호, 김삼웅 엮음, <민족주의자의 죽음>, 학민사, 1993.
13) 앞의 책, 304쪽.
14) 앞의 글, 304~305쪽.
15) 앞의 글, 301~302쪽.
16) 앞의 글, 302쪽.
17) 앞의 글, 303~304쪽.
이때에 들었던 내용 중 주요 부분을 <신동아>에서 발췌한다.
아버님이 박정희씨와 구체적으로 접촉(?)하게 된 것은 5.16 이후였다고 생각한다. 5.16 직후 어느날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밑에 있던 육군 모 대령이 거액의 수표를 갖고 종로에 있는 사상계사로 아버님을 찾아와 회유에 나섰다. 군사정권을 지지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아버님은 대령의 뺨을 때려 내쫓았다고 한 얘기를 들었다. 이것이 아마 아버님과 박대통령, 김종필씨 사이가 나빠지게 된 감정상의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군사정권과 <사상계>와는 심한 갈등관계를 빚게 되었다. 물론 군사정권에 비판적인 <사상계>의 논조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갈등의 배경에는 이런 감정도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석 12)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으로 기억된다. 정계 원로인사 몇 분과 재야인사 몇 분의 은밀한 회동에서 장선생을 박정희를 깨뜨리는 데 앞장세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이 무렵 아버님은 평소에 잘 출입하지 않았던 동교동 김대중씨 댁을 찾아가기도 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종합해 볼 때 무엇인가 어마어마한 일을 추진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석 13)
다음은 이부영 민주당최고위원께서 직접 들은 이야기로서, 그가 김준엽 전 고대총장에게 들은 말이라면서 내게 전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사고직전 아버님이 김 전 총장을 찾아와 “박정희를 깨치는 것은 민중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니 게릴라전으로라도 박을 제거해야 하겠다.”고 말하여 자기가 말렸다는 것이다. 아버님은 그날 “군부쪽에도 상당한 연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버님은 김경원(전 주미대사, 청와대비서실장) 씨로부터 변고를 당하기 3개월 전쯤에 “몸 조심하라”는 내용의 전화를 받은 바 있다. 그래서 아버님은 “내가 독립운동하면서 죽지 않고 지금까지 덤으로 살아왔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몸 조심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김경원씨는 <사상계>의 단골 필자중의 한 분으로 아버님과는 오랜 인연이 있었던 분이었다. 때문에 무엇인가 집히는 것이 있어서 ‘몸조심’을 귀뜸했을는지 모른다. 결국 아버님의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수상쩍은’ 행동이 정보기관의 촉수에 잡히게 되고, 상대측은 김대중씨의 동경납치 실패사건도 있고 하여 더욱 치밀한 방법을 택한 것이 약사봉 계곡의 실족사를 가장한 살해음모가 아니었을까. (주석 14)
나는 1976년 4월 19일 테러를 당하여 3개월 반 동안 서울 경희의료원에서 입원을 한 적이 있다. 아버님의 변사사건 후에 친지들과 언론사 등에서 사인을 밝히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의문사’를 제기했던 <동아일보> 관계자들이 구속되는 등 당국의 탄압이 심해지고, 정국이 더욱 경색되어 가면서 한 재야인사의 의문사에 대한 규명활동도 묻혀졌다.(중략)
그런데 하루는 입원중인 병원으로 하비브(전 주한미국대사)씨가 갑자기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방문은 경찰의 봉쇄로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하비브는 며칠 후 비밀리에 인편으로 한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지금도 그 편지 내용에 대해 의아스럽게 여기고 있다.
내용인 즉 “당신 아버지 장준하씨가 이루고자 했던 일이 곧 이뤄질 터이니 몸조심하고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 정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만나고자 했고, 그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지 전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단순한 위안의 편지라기에는 하비브의 비중과 서한의 내용 때문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준하가 이루고자 했던 일’이라면 민주화와 민족통일이었다. 그 외의 그의 심중에 또 다른 무엇이 있었다면 ‘일본군 출신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권력으로부터의 제거’였을까.
미국과의 관계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밝혀 둘 것이 있다.
196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은 분열되어 있었다. 공화당은 일찌감치 박정희 대통령을 후보로 내세워 2기 집권의 채비에 나섰다. 그 무렵에 미국 정부에서 사람이 찾아와 아버님께 <대통령이 되는 길>이란 책과 당시 외국의 수상이나 대통령이 즐겨 쓰던 까만 모자를 보내왔다. 책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그 모자는 지금도 어머님께서 보관하고 계신다. (주석 15)(이 책은 <사상계> 사장실에 비치되어 있었고 주간 안병욱은 이 책을 읽고 있는 장준하를 보고 정치에 뜻이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아버님과 김재규(전 중앙정보부장)씨의 ‘세간의 오해’에 대해 이 기회에 몇 가지 사실을 밝혀두고자 한다. 김재규씨와는 공적인 관계 이전에 집안간의 연고가 있었다. 김재규씨의 형님인가 누가 우리 할아버님께 가르침을 받은 바 있어 두 집안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가끔 왕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버님이 국회의원이 되고 국방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김재규씨는 군단장으로 재직하면서 국방위에 자주 출석하여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 아버님의 강직한 성품과 김재규씨의 직선적인 성격 때문이었는지 두 분은 전혀 다른 입장에서도 심정적으로나마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것 같다. (주석 16)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그러니까 1976년 말쯤으로 기억되는데,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그래서 남산 근처에서 만났다. 아버님 사후 처음으로 만난 셈이다.
김부장은 그날 “자네 부친의 사망 사건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란 말을 했다. 하비브씨가 했던 말과 연결되어서 무엇인가 집히는 듯 했지만, 얘기는 더 이상 진전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0.26사태가 있기 3개월쯤 전 다시 사람을 시켜서 나에게 “미국으로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제의를 해왔다. 필요하다면 여권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김재규 부장이 왜 나보고 미국에 나가 있으라고 했는지, 단순한 친절이었는지,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는지, 지금도 나는 그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더욱이 그런 제의가 있은 지 얼마 후에 김부장의 ‘10.26거사’가 있었고, 그는 처형되었다. 김재규씨는 인간미가 있고 의협심도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와 아버님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도 알 길이 없다. 아버님의 생전의 ‘미수’에 그친 ‘거사’와 죽음의 진상에 대한 그의 인식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주석 17)
이 부분과 관련하여 필자가 ‘민주화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 김재규의 가족이 그의 명예회복에 대해 신청했었다. 위원회에서는 장호권씨의 증언을 듣고자 그를 초청하여 증언을 들은 바 있다. 장씨는 여기서도 앞에 인용한 비슷한 내용을 진술했다.
주석
12) 장호권, '아버님은 암살당했다', <신동아>, 1983년 8월호, 김삼웅 엮음, <민족주의자의 죽음>, 학민사, 1993.
13) 앞의 책, 304쪽.
14) 앞의 글, 304~305쪽.
15) 앞의 글, 301~302쪽.
16) 앞의 글, 302쪽.
17) 앞의 글, 303~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