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달팽이 2
-지라산 반야봉 눈꽃 산행 - 김옥자
지난 번 지리산 종주 때, 남겨 두었던 반야봉을 찾아 가기로 했다. 단풍이며, 들꽃이며, 저녁노을이며, 일출 같은 볼거리도 좋겠지만, 그런 목적이 아니어도, 메이크업을 다 지운 맨 얼굴 같은 반야봉을 만나고 싶었다.
주능선에서 살짝 벗어나 우뚝 솟은 반야봉(1,732m)은 지리산에서는 제2주봉으로 불린다. 높이가 아니라 중심이되는 능선이 기준이라고 한다. 첫째 날, 금요일은 노고단 대피소와 탐방로를 사전 예약하고, 둘째 날, 토요일은 새벽이 밝아지는 대로 일찍 출발해서 반야봉을 다녀올 계획이었다.
차는 3시간을 달려 성삼재 주차장에 주차했다. 여기서 노고단 대피소까지 한시간 가량 올라 가지만, 다음날 노고단고개에서 반야봉까지 약5.5km 거리를 원점회귀하기로 계획하였으니 다소 힘든 겨울 산행이다. 다행히 같이 가기로 한 일행이 있어서 안심이었다. 이미 일기예보를 보고 떠나긴 했어도 지리산의 사정은 달랐다.
눈은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임도에서 부터 쌓여 있었다. 겨울 산행의 기본 장비를 장착하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하니 직원의 안내 말씀으로 밤에도 눈 예보가 있으니 성삼재에 차를 두신 분은 더 아래 시암재에 차를 옮겨 두고 오라는 말씀이었다. 오후 3시 30분, 저녁이 되어가는 이 시간에 한 시간을 다시 내려가서 1.4km 더 아래에 차를 두고 또 다시 오르막을 걸어서 올라온다는 것은 체력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기로 하고 일단 오늘은 그냥 두기로 했다.
방을 배정 받아 배낭을 두고, 노고단 탐방 입장 마감 시간인 오후 4시를 간신히 통과해 아무도 없는 둘 만의 겨울 노고단에 올랐다. 지리산의 모난 바람은 다 노고단 정상을 지나는 듯 했다. 방한 체비를 단단히 한 덕분에 매운 칼바람 속에서도 설경을 즐길 수 있었다. 구름에 쌓인 반야봉, 햇살이 설핏설핏 비치는 능선들, 멀리 보이다 말다 하는 섬진강의 곡선을 따라 그리며 조망하다가, 노을이 없는 서쪽 하늘만 자꾸 바라보며 일몰 시간에 대피소로 내려왔다.
대피소에서의 식사는 버너를 사용하지 않고 발열체에 생수만을 이용한 비화식 도시락으로 먹었다. 어두운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취사장 안에서는 하얀 김을 내 뿜으며 밥은 익어가고, 나란히 앉아 창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둘은 영화 속 같은 산장의 분위기에 취하였다.
새로 단장한 1인 1실 캡슐 같은 노고단 대피소에서 1박은 너무도 가슴 부풀었다. 전기 콘센트와 개인 난방조절도 가능해서 얼마든지 뜨끈뜨끈하게 잘 수 있었다.
사방이 나무로 짜여진 1인실에 고요하게 누워 있으니, 이 정도면 관이 네 개 정도는 되겠다 생각하며 면적을 가늠해 보았다. 왜 하필이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더듬어 보니, 예전에 입관 체험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아주 의미 있었고, 마음이 참 편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밤에도 눈은 계속 되어 새벽녘에 나와 보니 눈이 더 하얗게 쌓여 있었다.
눈이 쌓인 산길은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는데, 다행히 새벽에 우리보다 먼저 종주 길에 나선 발자국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맑은 날 기준으로 중년 여성의 느린 걸음을 충분히 감안하고, 사진 찍는 시간, 쉬는 시간 다 포함하여 넉넉잡아서 왕복 8시간을 예정했었다. 그러나, 눈길을 걷는 건 모래사장을 걷는 것처럼 더디고 체력이 많이 소모 되었고, 시간도 더 많이 걸렸다. 노고단 고개를 지나 돼지령을 지나고 한참 만에야 피아골삼거리 이정표가 나왔다. 임결령 쉼터를 지나 노루목 삼거리 까지도 힘든 오르막 구간이 있고, 발자국만 따라 얼마를 걸었는지 반야봉에 도착하려던 예정 시간은 이미 지나고 있었다. 발자국는 고맙게도 우리가 가려던 목적지 반야봉 까지도 나 있었다. 반야봉에서 내려오시면서 우리가 올 줄 알고 발자국을 내어 주었다던 농담 같은 말씀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눈 산에서 앞사람의 발자국이 이렇게 소중하고 고마운 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럴 때 ‘눈 발자국’ 이라는 시가 생각나 찾아 보았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
畓雪野中去 不須胡亂行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조선후기의 문신 이양연 (1771~1853)이 지은 한시라고 한다.
무릎까지 폭푹 빠지는 산길에서 잘못 디디면 허벅지까지 푹 빠지는 통에 발을 빼고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었다.
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옆 머리카락은 하얗게 상고대가 되었고, 콧물은 잠시만 안 닦으면 금방 고드름이 되어버린다. 콧물 닦는 손수건이 얼어서 튀긴 명태껍데기 같았다. 깊은 곳은 눈의 깊이가 1미터나 되어 스틱이 손잡이까지 푸욱 빠진다. 노루목 삼거리에서 반야봉으로 가는 오르막 한 시간은 마지막 난 코스다.
지리산을 가기 전 한참 푹 빠져서 들었던 <이원규시 /안치환 노래 >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의 끝 구절 나레이션 부분이 자꾸자꾸 귓전에서 맴돈다.
-전략-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힘든 오르막을 숨을 고르며 느릿느릿 오르며 화두처럼 생각한다.
내가 지금 무얼하고 있는가, 나는 왜 걷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가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르막 길에서 체력이 떨어질 때마다 끊임없는 질문지를 던지며 뒤따라 걷는다. 다행히 산행을 같이 하게 된 일행이 나보다 생생하게 앞에 잘 가 주어서 힘이 되었다. 나와는 처음으로 산행을 같이 해보는 일행인데, 하필이면 아무 볼 거리도 없고, 힘든 겨울산행에 첫 동행을 하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춥지도 않고 아픈 곳도 없이 컨디션은 양호한데도 발걸음을 따라갈 수가 없다. 산행은 그래서 좋다. 늦어도 목적지는 도착하고, 느려도 안전하기만 하면 되었다. 때로는 무기력해지고, 때로는 의문의 마음이 일 때, 이런 산행을 하고 나면 알 수 없는 내면의 힘이 생긴다. 한 때 몸이 먼저냐 정신이 먼저냐를 놓고 갈등 한 적이 있었는데, 둘은 항시 같이 가야 하지만, 굳이 겨룬다면 몸이 먼저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래서 체력을 단련해야 되는가 보다.
목적지인 반야봉을 인증하고 곧바로 내려왔다. 구름이 기득하여 전망은 기대할 수 없었다. 사방이 온통 눈밭이고 눈바람이 불어서 어디에 아늑하게 앉아 밥을 먹을 자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반야봉 아래 노루목 삼거리 바위 뒤에서 눈바람을 피해 간단히 점심 요기를 하였다. 얼마나 추운지 생수도 꽁꽁 얼어서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껴야 할 보온병에 있는 물을 사용해 눈밭에 서서 비화식으로 점심요기를 간단히 하고, 원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돌렸다. 바람이 불어 우리가 걸어왔던 발자국이 금새 눈에 묻혀 희미해져 간다. 다행히 우리처럼 원점회귀 하는 분이 한 두분 앞서 갔고, 발자국이 생겼다. 우리의 전체 산행시간은 아홉시간, 노고단 대피소로 돌아온 시간이 오후 4시30분이었다. 거북이 걸음보다 더 느린 지리산 달팽이가 겨울에도 나타난 모양이다.
이제 내일 걱정하기로 하고 두었던 자동차를 생각할 시간이 되었다. 차를 가지고 내려갈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보니 내려가는 차단기는 열리지만 갈 수 가 없다. 체인도 없고, 방전으로 시동도 안걸린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토요일 저녁이라 노고단 대피소는 만원이라 받아주질 않는다. 길은 얼어 올라오는 차량이 통제 되었으니 자동차보험 서비스도 소용없었다. 지자체에서 시암재까지만 제설작업을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어제 저녁 다시 내려가서 시암재에 차를 두고 오라는 얘기였구나, 뒤늦은 이해가 되었다. 시암재에 차를 옮겨 두기만 했어도 일은 엄청 수월하게 해결되었을 것임을 뒤에 알게 되었다. 옛말에 ‘미련은 먼저 나고, 지혜는 나중 난다’더니,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성삼재 통재구간도 구조차는 올라가게 해 준다고는 했지만, 결빙구간을 선뜻 와 주겠다는 차는 없었다. 방법은 구례군청에서 허용한 안전장치를 한 택시만 성삼재까지 운행 된다고 하였다. 방전된 차는 성삼재에 두고 둘은 택시를 타고 구례읍 동경장에서 하루를 더 묵었다. 그나마 다음날이 일요일이어서 다행이었다.
뜻밖에 1박을 더하게 되면서 시간과 비용은 더 들었지만, 덤으로 얻은 것은 너무 많았다.
귀찮더라도 안내 매뉴얼에 따를 것, 어려울 때일수록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해결하면 답이 있다는 것, 시간보다 돈보다 사람이 중하다는 것, 보석은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숨어 있다는 것, 바라는 마음 없으면 원망도 없다는 것, 모든 주어 진 일에는 뜻이 있다는 것, 길이 아닌 길은 없다는 것.....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긍정의 에너지로 동행했던 나의 파트너로 좋은 사람 하나 얻었고, 취사장에서 버너가 없는 우리에게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채워주신 산객, 길을 분간할 수 없는 눈 덮인 산길에서 앞서가며 발자국을 내어주신 종주하시는 분, 자동차가 방전되고 결빙구간 통제로 인하여 속수무책일 때 산 아래에서 위에서 서로 성삼재의 노면 상태를 확인해가며 일회용 체인과 배터리충전용 점프 선까지 준비해서 나의 차 백호를 무사히 구출해 주신 지리산 약수물 같으신 구례 택시기사 분들, 끝까지 친절로 응대해 주시고 전화로도 도움 주셨던 대피소 직원이며, 구례 군청 당직자 분까지. 그리고, 혼자 갔었다면 노고단에서 그쳤을 산행인데, 목표지점 반야봉까지 눈 속을 헤치며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같이’그리고 ‘함께’라는 힘이 얼마나 큰지 새삼 알게 되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이프리카 속담이 떠오른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여행에서 얻은 값진 보석들, 나의 길에 도움 주신 분들 한분 한분 모두가 ‘나’라는 연극 무대에 등장하는 <나오는 사람들>이다.
결국 지리산 반야봉의 민낯을 보러 갔다가, 나의 벌거벗은 민낯을 발견하게 되었고, 아무것도 볼거리가 없어도 좋다던 산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새하얀 설국에서 파란만장 스토리가 화려한 잊을 수 없는 겨울 눈 산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