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양반계층이 청나라로 가는 사절단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서적은 당시 유학을 중시하는 양반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고민한 것을 풀어내지 못하는 성리학을 대신해서 천주학은 그 대안이 될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조정이 금기시하고 박해가 시작되어서 신부가 조선땅에 들어올수가 없었고 조선에 미사와 어떤 성사도 드릴수가 없었지요
조선땅에 몰래 들어온 선교사들은 성경대신에 교리를 갖고 들어온 것입니다
천주교공동체에 나오는 백성들이 가질수 있는 것은 오로지 중국 사절단에 부탁에서 청나라에서 가져온 성물과 묵주뿐이었지요 그런데요 놀랍게 그들중에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즐겁게 목숨을 내놓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박해시절도 아니고 주위에 많은 사제와 수도자가 있으며 교육도 체험할수 있는 기회도 많을 뿐더러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갖고 다니는 스마트폰으로 많은 신앙정보를 접할만큼 환경이 나아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앙생활에 전념할수 있는 일에는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이 빛나는 낮동안은 수없이 많은 별들을 거의 볼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필요이상으로 너무 많은 신앙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 반대로는 내자신과 내이웃에 대해서는 점차 관심을 두지 못하기 떄문이라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은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할때에 예수님은 "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교회는 그리이스어 에클레시아로 표현되는데 이는 백성들의 집합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건물이라는 색깔이 강한데 대한 다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용어로 말한다면 교회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땅에서 살아생전동안 한 일들을 죽어서 개별적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알고 있는데 왜 성경이나 교회의 가르침은 공동체성을 강조할까 입니다.
하느님은 일찍 유대민족을 택하시어 직접 가르치기고 그리고 지도자를 내세우거나 아니면 예언자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알렸지만 이를 수시로 하느님의 뜻을 거슬려왔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를 위해서 드디어 최종결심을 하셔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12제자를 선택하고 그들과 두루 다니시면서 여러가지 활동을 하시는데 그무렵에 제자중의 하나인 베드로가 고백한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태오복음에서만 이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인 예수님의 지체이시고 이를 알아듣는것은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이고 여기에 속한 하느님의 백성은 성령을 통해 받은 은사를 세상을 통해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일찍히 부터 이상한 주장을 하는 무리가 생겨나고 가짜성경이 퍼져나가기에 주님이 몸인 교회공동체를 통해 정화시켜나가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는 2천여년전의 예수님의 말씀안에 가두워진것이 아니라 말씀의 영이 성령에 의해서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이루는데 많은 어려움이 도사리는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우리자신과 이웃의 상태를 잘 알지 못하기 떄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백성들이 모인 공동체이기도 한 교회를 통해서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지금 미사는 크게 말씀과 영성체부분으로 나눗는데이는 각자 먹을 것을 가지고 마르코다락방에서 함꼐 나누워먹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기리는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공동체의 출발입니다
그런데요 도시가 발달하고 교회에 모이는 백성이 늘어나자 교회의 중심이 형식적인 전례에 몰두하게 되었고 세상의 일과 삶의 터전에서의 모습을 성찰하기 보다는 교회내의 운영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점차 본당조직이 비대해지는데 그일을 할 봉사자는 그만큼 늘어나지 못하기에 본당의 일은 극히 일부분의 지도자의 생각에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지식적으로는 많은것을 알고 있지만 이를 믿는 우리들이나 이웃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에 가깝다는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은 한떄에 무교회주의가 태동되기도 하였는데 그들 주장을 하는 이들은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 되는것이지 공동체가 왜 필요하느냐에 의구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은 우리 하느님의 백성이 주님과 늘 함꼐 한다는 생각보다는 하느님이 일러주신 말씀과 이를 하려는 제도에 지나치게 메여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개인 하나하나가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고 이들 체험을 교회공동체안에서 나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극복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삶의 현장이 되든 교회공동체안이 되든지간에 우리는 먼저 내자신과 이웃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하느님이라는 맑은 거울에 비춰보는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공동체가 초대교회에서 알고 있는 하느님백성의 모임이 아니라 교인이 만날수있는 거대한 건축물이라는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이 건강하게 생활하는데 보다는 건축물에 보다 많은 비용과 노력을 부담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제대위에 계시고 그리고 감실에도 계시고 우리가 모이는 곳에도 계시지만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이 화려하고 거대한 성물들을 많은 비용을 들여서 세운다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서는 구약의 십계명을 요약해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이들이 이웃과 더불어서 실천하는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에 사제가 적을떄에 전국에는 교우촌에서 공소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사제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곳에서 공소회장의 역할이 필요한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신앙의 자유가 생겨나고 외국인 주교가 오셨습니다 그분이 한국 교회공동체를 위해서 그 당시 본당보다 훨씬 많은 공소예절에 대해서 공소회장의 역할에 대한 지침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한달에 한번 모이는 구역.반모임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본당에서 몇번 모이고 제단체활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호흡으로 숨을 쉬듯이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런일은 특별한 은사로 홀로 수도생활을 하시는 분을 제외하고서는 여러사람들과 함꼐하는, 즉 공동체가 필요한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시노드에서 중시여기는 것이 경청입니다 다른사람의 애기를 귀기울려 듣는것입니다 이런것은 다른말로 우리들 모두가 내자신과 다른사람의 삶에 관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토1서 13장은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조금 다른 애기일수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유명한 의료인이 있습니다 그분은 허준입니다 그분은 그당시 백성들은 아파도 의원을 찾아갈 능력이 못되었습니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편찬해서 주변애서 흔히 구할수 있는 풀들로도 치유할수가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과 비슷하다고 여깁니다 우리는 분명 보이지않는 하느님을 믿고 성령을 통해서 이해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징후는 내자신과 이웃사람들의 삶속에서 분명히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요한1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가능한한 이웃을 자주 만납시다 그리고 관심도 많이 가집시다 그들이 동네에서 만나든 아니면 본당내에서 만나든 말입니다 그들 모두는 하느님이 지으신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금 신앙에 헌신하든지 아니면 신앙과 멀리 떨어져지내는지 무관하게 하느님의 귀한 자녀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꼐 하느님의 길을 같이 걸어갈수있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야 한다는것입니다
그안에서만이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떄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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