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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설교전문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새생명 축복
2023. 4월 둘째주 부활주일 설교 6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십시오.”
성경: 고린도전서 15 : 35 -58
-임평구 목사
♣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부활의 의문을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부활 사건은 큰 의문을 던져줍니다. 누구든지 죽기에, 살아나 우리와 함께 하지 않기에 생기는 일반적인 의문입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도전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이 질문은 두가지를 동시에 묻습니다. 첫 번째는 어떻게 썩어 없어진 몸이 다시 살 수 있느냐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부활한다면 어떤 몸으로 부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바울의 명쾌한 해답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 영적인 몸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가지십시다.
씨의 비유 (36-38절)와 모든 생물들의 육체의 양식(39-41)이 서로 다름은 부활체의 전제입니다. 결국 부활체는 존재 양식이 지금과는 다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활체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입니다. (42-44절)
신령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42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2-44)
씨를 심으면 씨가 썩고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썩어질 육체가 죽어 없어지면 영적인 몸이 다시 삽니다. 바울의 결론은 육의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 즉 영의 몸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가 있으면 이 육신이 썩어 없어진 후에 존재할 영적인 몸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의 생명이 끝난 후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 두 제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슬픔 중에 낙심하여 옛 생활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한 밤에 에루살렘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달려가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했습니다. 두 제자의 생애는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사명을 회복하여 진실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회복되고 사명이 회복되어 새로운 길이 그들에게 열린 것입니다.
2. 사망은 패배자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직접적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우리가 부활할 날을 묘사합니다.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51-52)
마지막 날에 나팔소리가 나면 우리 모두가 홀연히 변화됩니다. '홀연히'라는 말은 '순식간에' 혹은 '눈 깜짝할 사이에'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렇게 갑자기 변화됩니다. 그러면 죽은 자들은 썩지 않는 몸을 입고 다시 살고 우리 살아있는 자도 변화됩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53)
'입는다'는 말은 '옷을 입는다'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날이 되면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원어의 의미는 입을 것이라는 미래가 아니라 입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말씀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의 몸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또한 사망이 사라집니다. 5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54)
'삼킨다'는 말은 목말랐던 사람이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버린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마셔버렸다는 말입니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었다'는 말을 원어에 따라 직역하면 '사망이 승리에게 삼켜졌다'는 말입니다. 이 문장의 주어는 사망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망은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 주어는 숨겨져 있습니다. 이 말속에 숨은 주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을 삼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수동태를 '거룩한 수동태'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25장 8절을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서에는 실제로 하나님이 주어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사망을 삼켜버렸습니다. 다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이제 사망은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55절에서 바울은 당당하게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호세아 13장 14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사망을 향해 그의 패배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하게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망을 극복한 자만이 외칠 수 있는 외침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3 . 옛사람을 죽이고 주님과 연합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부활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두 가지로 권면합니다.
① 옛사람을 죽임으로 (50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50)
혈과 육을 가진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혈과 육은 단순히 우리의 육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죄악된 본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떻게 하면 부활합니까? 죽어야 부활합니다. 무엇이 죽어야 합니까?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매일 나의 옛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매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옛 성품이 죽을 때 비로소 부활하는 것입니다.
② 승리하신 주님과 연합함으로 (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7)
이 이김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승리하신 주님과 연합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여러 종류의 고난과 아픔을 겪고 삽니다. 그 모든 고통은 사실상 이 땅의 삶을 끝내는 종국, 즉 사망의 그림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날 사망이 삼킨 바 될 때에는 그 고통 역시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
사도 바울은 이 마지막 구절에서 견실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당시에 부활에 대해 의심하게 하고 신앙을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합니다. 여기서 주의 일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복음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복음사역을 성실하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에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 복음 전도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바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와같은 사람입니다. 아멘.
(20230408)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십시오.”
성경: 고린도전서 15 : 35 -58
-임평구 목사
♣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부활의 의문을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부활 사건은 큰 의문을 던져줍니다. 누구든지 죽기에, 살아나 우리와 함께 하지 않기에 생기는 일반적인 의문입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도전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이 질문은 두가지를 동시에 묻습니다. 첫 번째는 어떻게 썩어 없어진 몸이 다시 살 수 있느냐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부활한다면 어떤 몸으로 부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바울의 명쾌한 해답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 영적인 몸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가지십시다.
씨의 비유 (36-38절)와 모든 생물들의 육체의 양식(39-41)이 서로 다름은 부활체의 전제입니다. 결국 부활체는 존재 양식이 지금과는 다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활체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입니다. (42-44절)
신령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42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2-44)
씨를 심으면 씨가 썩고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썩어질 육체가 죽어 없어지면 영적인 몸이 다시 삽니다. 바울의 결론은 육의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 즉 영의 몸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가 있으면 이 육신이 썩어 없어진 후에 존재할 영적인 몸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의 생명이 끝난 후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 두 제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슬픔 중에 낙심하여 옛 생활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한 밤에 에루살렘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달려가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했습니다. 두 제자의 생애는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사명을 회복하여 진실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회복되고 사명이 회복되어 새로운 길이 그들에게 열린 것입니다.
2. 사망은 패배자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직접적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우리가 부활할 날을 묘사합니다.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51-52)
마지막 날에 나팔소리가 나면 우리 모두가 홀연히 변화됩니다. '홀연히'라는 말은 '순식간에' 혹은 '눈 깜짝할 사이에'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렇게 갑자기 변화됩니다. 그러면 죽은 자들은 썩지 않는 몸을 입고 다시 살고 우리 살아있는 자도 변화됩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53)
'입는다'는 말은 '옷을 입는다'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날이 되면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원어의 의미는 입을 것이라는 미래가 아니라 입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말씀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의 몸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또한 사망이 사라집니다. 5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54)
'삼킨다'는 말은 목말랐던 사람이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버린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마셔버렸다는 말입니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었다'는 말을 원어에 따라 직역하면 '사망이 승리에게 삼켜졌다'는 말입니다. 이 문장의 주어는 사망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망은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 주어는 숨겨져 있습니다. 이 말속에 숨은 주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을 삼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수동태를 '거룩한 수동태'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25장 8절을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서에는 실제로 하나님이 주어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사망을 삼켜버렸습니다. 다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이제 사망은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55절에서 바울은 당당하게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호세아 13장 14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사망을 향해 그의 패배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하게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망을 극복한 자만이 외칠 수 있는 외침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3 . 옛사람을 죽이고 주님과 연합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부활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두 가지로 권면합니다.
① 옛사람을 죽임으로 (50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50)
혈과 육을 가진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혈과 육은 단순히 우리의 육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죄악된 본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떻게 하면 부활합니까? 죽어야 부활합니다. 무엇이 죽어야 합니까?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매일 나의 옛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매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옛 성품이 죽을 때 비로소 부활하는 것입니다.
② 승리하신 주님과 연합함으로 (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7)
이 이김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승리하신 주님과 연합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여러 종류의 고난과 아픔을 겪고 삽니다. 그 모든 고통은 사실상 이 땅의 삶을 끝내는 종국, 즉 사망의 그림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날 사망이 삼킨 바 될 때에는 그 고통 역시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
사도 바울은 이 마지막 구절에서 견실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당시에 부활에 대해 의심하게 하고 신앙을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합니다. 여기서 주의 일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복음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복음사역을 성실하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에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 복음 전도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바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와같은 사람입니다. 아멘.
(202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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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설교전문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새생명 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