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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산을 보다가 길을 잃었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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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보다가 길을 잃었다]
류순자 시집 / 세종문화사(2014.05.25)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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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보다가 길을 잃었다
류순자
이 벅찬 세상 돌고 돌아
유일한 희망으로 그 길 가고 있다
짐 내려놓고 그 길에 혼자 남게 된 지금
시간이 지날수록 빗소리는 나를 놓지 않는다
부서져 감겨드는 바람 때문일까
연둣빛 몸 출렁이는 산의 가슴에
견고한 믿음의 잎만 돋는다
얼마나 간절히 문 닫은 세월인가
달아나려던 뿌리 깊은 아픔의 시간이
쉼 없이 다가오는 빛을 만나
여름 넘어섰다
슬픔의 한구석에 언제나처럼 자리한 꿈
오래되니 지척에 두고도 잠지 못하는 것을
하늘이 내려다본다
오 눈부셔라 너의 흔들림
불혹의 바람
류순자
인연의 봄을 따라 걷는 길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음의 틈새로 스미는
소용돌이치는 이제야
가던 발걸음을
바람 부는 쪽으로 돌린다
궂은 바람의 시작에도
푸른 꿈을 꾼다
빈 가슴 채워주는
빛으로 올까
아직은 여름의 조각들이 숨어 있다
소리 없이 몰려온 바람에
붉게 타오르는 생각들
흩날리는 속삭임이 보인다
생각의 가지에 상처 날까
시름 돋는 오늘
햇살이 내 발들을 지켜본다
찔레꽃 1
류순자
수천 번 다짐하면서도
마음의 틈새로 스미는 봄빛에 감전된 듯
산자락에 앉아 옷섶을 물들였다
가슴 누르다가 맑고 시린 가슴은
바람결 부딪혀도 서성였지
생각을 여과하는 동안
가슴 죄는 일 얼마였던가
뒤엉킨 생각의 가지를 치면서
신선함에 다시 흐르는 생각만 키우다가
위안인 그대 내 안에 흐르는 샛강
바람이 시작되는 위로할 수 없는 마음 한편
밀려와 숨어든 햇살은 칭칭 동여맨 가슴을 풀고 있다
민가해지는 나를 이겨내는 사이
노오란 그리움은 반란하는 슬픔이다
낯설기만 한 너를 위하여 더 기다려야 하는
아픔이 남았다
마음에 대한 감사가 눈물이 날 것 같다
다가설 수 없는 나를 흔드는구나
순응하지 못한 나
그늘의 몸
생각의 누드 1
류순자
깊숙이 자리 잡은 남은 어둠 속을
내가 한 점 바람으로
닿는 곳마다 이리 빛나는구나
마음 한구석 잠깐씩 돌아서서 키 재던 생각
겨우내 입은 상처는
떠나지 않는 그리움의 시간을 가둔다
맴도는 기억 달아나는 산그늘에 앉았다가
이 긴장의 도가니 속 메아리만 남겨둔
산등성이의 힘에 발목 잡혔나
그리움만큼 깊어진
푸른 강을 꿈꾸고 있다
거슬러 오르는 바람도 만나고 햇살도 만나
우우우 일어서는 봄
꽃샘바람을 막막하게 바라보며
숨겨두고픈 마음 꼭꼭 여며도
그 눈부심에 구름을 걷어 안고
우주를 흔들어 깨운다
대청호에서
류순자
오름길 지나서 남은 말 잊힌 이제
따라오던 바람마저 문득 그립다
가던 길 피해 기억 속 출렁이던 발걸음에는
먼지만 수북하다
길만 탓하다가 떠나고픈 자리에서
애증으로 견디어가는 영원한 그리움이다
세상에 알리는 자유는 내게 한줄기 빛이다
떠나고픈 이 자리에서 의식의 벽에 부딪혀도
슬픔의 날개를 폈다
오늘만의 위안일지라도 기억 언저리 맴돌다가
앞서가는 그림자 잡지 못하는 어둠을 걷는다
타버린 가슴 왜 매운 연기가 나는 걸까
일상처럼 수줍게 보이고 싶던 마음이
나를 흔드는 오늘, 햇살 속에 팔을 뻗는다
매달리지 않아 물 내린 풀들의 아픈 수런거림
견디는 일만 남았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앉아
한참 두리번거렸다
꽃샘바람에게
류순자
온 땅이 만상을 잡고 있듯
내가 너를 피할 수 없지
너를 만나고 마음에 금이 간다
불혹의 나이에 시선의 기억 잘 익어
안으로만 키우는 하얀 그리움
기막힌 상처이지
꽃샘바람이 낸 상처마다
파랗게 피는 아픔마다 봄이 될까
이제 막 피어날 꽃봉오리 여백이 많다
부딪쳐야 할 온 마음 드러나는 이 봄에
줄 것 없는 나는
비애 속을 바라보았지
내 뜨락 비 내려 꽃잎 하나 파르르 흔들린다
거대한 바람 소리에 지고 말 꽃은 아니지
눈물이 막 지려 하는 꽃은
열매를 위해 내어 주는 자리일까
첫눈을 보며 1
류순자
창밖에 혁명의 아침처럼
밀려오는 그리움 얼마나 빛났는지
집중의 바람 안고
눈자위에 어리는 푸른 슬픔
슬퍼서 어둠인 나는
생기 품고 때 없이
푸르게 흐른다
그대 온 후
세상은 지금 통화중
텅 빈 하늘가 바람 소리에
그리움의 끝에서 서성이는 나
길 내는 그리움 몇 거느리고
출렁이다 돋아나는 슬픔의 빛
결박된 마음은
끝내 섬이 되어
내 안을 펼쳐 보인다
오는 길 얼마나 빛났는지
길 위에서 1
류순자
그 찬란한 하늘 보았지
눈부심에 나도 걷잡을 수 없는 속앓이가 터졌나보다
근심의 가지 하나 끌어안고 사는
이 땅의 냉기에 맞서 눈을 부릅떠도
그저 웃기만 했지
부드러운 바람의 눈초리에 어리둥절하다가
돌아선 길가 젖은 세월만 켜켜이 쌓인다
내게 보여준 슬픔을 잊지 못한 채
기다림은 희망으로 향하지
꿈 되어 자라는 것들은 고고하다
아직 초록이 더 많은 세상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두리번거리다가
어둠으로 남는 기억을 버린다
끝없는 의혹으로 아주 더디게 간다
오가는 발자국 소리 떠나고 나서야
달려오는 너의 모습 속에[서 주름을 본다
온 힘 다해 지나온 길
소리 없이 스미는 바람 이기다
그 빈자리 닦는 지금
맑은 실핏줄로 흐르며
이제야 가진 것 없어도 평화롭다
새 1
류순자
가까이 가고 싶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바람 소리에
공허가 채워지고
먼 산 발치에서 이렇게
베인 가슴 버티며
하염없이 침묵만 지켰다
속살 깊이 바늘 꽂히는
위험인 줄 알면서도
기침 소리마저 낼 수 없다
상처뿐인 세상
산골짜기에 숨어
막막함을 찢는
처절한
울음의 종이 되었다
불면 1
류순자
내 안의 얼음 층 녹이진 못해도
바람과 햇살과 새들
순백의 아침을 여는 오늘도
지혜의 웃음 주며 덩그러니 서 잇는 산
들여다보다가 이미 내가 물들었나 보다
그 산은 자존의 목숨으로 묻어둔 채 침묵이다
삐죽 나온 사방의 길을 살피는 미련들이
쏘옥 쏘옥 돋아 얼마나 많은 시간 헤매었던가
날카로운 침묵 속에 서 있는데 이 걸음
아직은 부드러운 세상 길을 낳을까
몸 낮추는 바람 있기에
뭇 발자국 치솟는 푸르름의 한 복판
바라보는 나는 슬픔으로 흐르다가
소리 없이 오는 봄에 갇혀
세월을 잡고 내가 가진 이 봄
알고 싶다
몸 낮추는 바람 있기에
아직은 부드러운 세상
연
류순자
오랜 결박에서 풀려나고 있다
막막한 하늘을 겨냥하던 시선
억겁의 인연일까
이 길 가면 푸르게 살아갈 꿈이 있다
어둠일지라도 활활 불길 되어
번뇌의 줄 풀고
꼬리마다 꿈을 꿰는 시간 속에
시름을 물고 달아나는 그 어디쯤
바람의 전설에 불을 켜라
때론 바람에 휘말리는
거대한 날개
질주하는 신경의 분자
우주를 안고 있다
맑은 혼으로 하늘을 닦으며
하늘과 땅이
내 의식의 끝을 부여잡고
줄다리기하고 있다
목련
류순자
어느 혼의 설렘인가
의식의 가지 찾아온 햇살에
처연한 맥박 누가 가두었는가
위안의 손길 벗어나
마음 죄며 살아온 날들
눈부신 항변에이 시작되나보다
긴 한파에도 침묵하더니
바람의 수런거림에 옹이진 가슴
솟구치다 솟구치다
간간히 맺히고
새로운 세상 보다가
내 목숨의 꿈길 부여잡고
숨죽여 흘린 눈물
누가 흔들었을까
아무렇게나도 않게
엷은 햇살은 이어지고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가
이 봄에 아득히 나부끼는
그리움
바람 소리
류순자
가야 하는 길 멀리 보이는
낯익은 그림자
스쳐 가는 바람인가
그리움에 휘감긴 길들이 마중하는 걸까
서글픈 세월 안고 누가 저리도 내 이름
부르는가
내가 먼저 흔들리는 지금은
눈물 같은 희망 몇 개가 발자국 내며 온다
현으로 찬바람의 옷자락을 잡아
가만히 기대 보는 지금은 부끄런 가슴이다
이따금 지나는 바람이 무등 탄다
충전된 마음도 힘이 되는가
갈수록 더 멀어진 세월은
억겁의 시간 흘러도 욱신대는 낯선 상처
말하지 아목해도
미련처럼 아우성치는 마음
어디를 둘러봐도 바람 소리 난다
아침
류순자
햇살 부신 아침
그리움이 눈을 뜬다
내게 오는 넌
맑은 실핏줄로 흐르는 위험이다
한 치의 헛디딤도 없던 나
눈 깜빡할 사이에
슬픔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눈물이 번지는 줄 모르고 그리움 밟는다
푸른 그리움 시작되면
기척 없는 바람 보듬는다
침전된 마음 한복판을 빠져나온
집요한 생각의 줄기가
홀로 뜨겁게 입김 드러낸다
연꽃
류순자
내가 가꾸어야 할 이 영토에
비집고 들어온 수초들
그 사이에서 슬그머니 익는 인연
고단하게 자라는 모습
언제 여기 있었던가
가끔 타오르는 나 한 번도
풀 수 없었지만
생육을 방해하는 오염이여
나를 혼란스레 하지 마라
척박한 세상 소리 없이 닦으리라
발걸음마다 맹세가 따갑다
외경스러운 그리움의 꽃잎 하나
피어나는 소리가 저리 요란한가
내 앞을 햇살이 괴롭혔어도
몇 개의 소리를 아는 이제
길 묻은 자의 이정표가 되리라
산사에서
류순자
바람이 쓸려가는 물안개처럼
흘러가야 하는 세상을 안다
내 안의 평화 다시 올까
이 넉넉한 품에서
맑은 치유로 위안받고 싶다
눈부신 시선 앞에 소리 없이 피는
내 몫의 그리움인가
따뜻한 시선에 푸른빛으로 울며
지켜보던 내가 젖는다
아름드리로 자란 내 안의 나무
빛나는 세상 향해 지난 이야기들
가만가만 초록으로 피워내는 뜻
누굴까 내 마음 가져가는 이
분분한 세상 비껴 스스로 차오르는
샘물 같은 나
어쩌지요
바람의 집
류순자
미루나무 사이로 낮달이 눈 맞추고
고르지 못한 세상에 매달려
살아 숨 쉬는 슬픔 하나 있다
얼마나 더 기다리면
이 안타까움들 꽃으로 피워낼 수 있을까
문득
누군가 상기된 얼굴로 나를 부른다
바람의 길 보며
그 길 풀 섶에서 놓친 보물을 찾듯
집중하는 내 슬픈 눈
살아온 날들 눈물이 거듭되면
혹여 차가울까
바람의 귀엣말에 가끔 귀 기울여도
발효되지 않은 기억만 반발하는
슬프고 깊은 그리움
바람 부는 날
류순자
몇 개의 풍경이 기다린다
만나면 더 외로워지는 이 길
시간의 얼굴 떠오르면
차라리 눈을 감는다
나를 흔들어 놓고 너는 어디 있느냐
생각의 문을 열면
하나의 강이 된다
세상의 파도를 살피다가
정지한 풍경 속에
불러도 대답 없는 그리움
더는 빛나지 마라
비늘 몇 개가 내 몸 어딘가 달라붙는다
마지막 몸짓처럼
그 길
류순자
닿을 것만 같은 길
언제부턴가 위안으로
몇 개의 미소가 보인다
봄이 되는 바람 놓지 않으리라
다가오려 하면
고개 숙이는
발길 달래어 놓고 상심이다
해와 달이 술래잡기하듯
묵묵히 받쳐준 우산이;
또 다른 무게로 짓누른다
꿈과 희망으로
나를 타이른다
번뇌를 확인하며 가지런히 놓인 나를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눈물로 황사를 지운다
바람에 다친 나를 견디다
일제히 몰려온 시선에도
꿈쩍 않고 살몃 드러낸
말 없는 발걸음
나무의 독백
류순자
넓은 세상 접하지 않았다
푸른 혈기로 살랑대던 기억 있었던가
몸 다 태울 수 없어 마음 다스렸지
시름도 사라지고
갚아야 할 인연의 빚
깨닫는 오늘
알려고 하지 않아도
기다려 본 이는 안다
불혹의 오후에 조채된 봄은
무욕의 빛깔인 것을
바람의 말에도 허위의 가벼움 속에 있고 싶었다
마음이 빗물처럼 스며 비로소
가벼움 사이 걸으며 평화로워진다
자비의 숨결 기리는
눈부신 숨결 기리는
내 이마 위 별들이 아프게 반짝인다
젖은 귀 닦아온 생애
기다리는 마음이다
천년이 가도 그대가 깃들인 땅에
어긋남 없는 한 그루 나무
순결한 곡조로
정성 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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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여성들도 사고방식이 변해야 사는 시대,
유교문화만 고집하면서 조선 시대 여인으로 살아온 난
늘 부족한 자신을 극복할 할 수 없었다.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난
압박된 마음들을 위안하며 살아오면서
글쓰기는 모든 아픔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시인으로 사는 삶은, 종교 이상의 구원이었다.
정신의 자유만으로라도 찾기 위해 인고의 삶을 모태로
이제 한 시대를 세상의 보물들을 찾으며
고양된 정서와 위안이 되는 시를 쓰겠다.
문학만이 내 존재 이유를 증명해 줄 것이다.
구원해 줄 것이다.
지켜봐 주신 모든 분의 사랑의 힘에 감사드린다.
2014년 5월에
류순자
이 시집을 아버지께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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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자 詩集 [※산을 보다가 길을 잃었다※]
[ 시 해설 ] -
풍경에서 건져 올린 눈부신 말들의 노래
문효치(시인, 전 국제PEN 이사장)
문학평론가 김남석은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가 점점 길어지고 복잡해지고 있다 한다. 그런 젊은 시가 우려스러운 것은 시인들이 ‘세상의 넓이’를 ‘시의 넓이’로 환원하여 받아들이려 하고, 이러한 욕망을 거꾸로 적용하여 ‘시의 넓이’가 곧 ‘세상의 넓이’로 맹신하며, 그 넓이만으로 시 의식을 측정하려는 전도된 인식이 확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넓이에의(자발적인) 강요’는 한편으로는 미덕이지만, ‘깊이에의 천착’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대단한 실책이 아닐 수 없다(『어려운 시들』)”고 했다. 류순자 시인의 시에는 김남석이 말한 ‘세상의 넓이’뿐만 아니라 ‘깊이에의 천착’까지도 가늠할 수 있는 시인의 내면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라 하겠다.
사진작가이자 카피라이터인 최현주는 한 장의 사진에서 시를 찾아내 우리에게 읽어준다(월간『사진예술』-사진으로 시를 읽다-연재). 맛있는 요리를 맛보는 것처럼 맛깔나게 풀어낸 그녀의 글을 읽으면 한 장의 사진에서도 무한한 상상력을 rM집어낼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류순자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최현주가 문득 생각났다. 류순자 시인의 시에서 풍경이 들어있는 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다. 그리고 그 풍경은 단지 보여주기만 하는 풍경이 아니라,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풍경이라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다.
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일상의 풍경들이 새로운 언어의 모습으로 재창조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류순자 시인의 상상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녀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옆구리를 스쳐 가는 바람에서, 매일 맞이하는 날씨에서, 걸어 가는 길 위,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마주치는 곳에서…… 눈 길 닿는 곳, 발길 닿는 곳 그 어디에서든 언어의 새로운 모습을 그려내는 재주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 사무치는 그리움과 견고한 자기절제, 숙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기다림을 풀어내고 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시인은 때로 아파하고 눈물 흘리면서도 묵묵한 나목처럼, 겨울 산처럼 인내하면서 희망을 놓지 않고 세상을 보듬어가는 철학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풍경에서 건져 올린, 아프지만 깊고 눈부신 말들로 우리에게 가만가만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다.
시인이 걷는 길과 그 길의 끝에서 만나는 이야기들을 뒤 따라가 보자.
칼바람이 다치게 해도 가던 길목
부딪친 아픔 눈부시다
언제나 차분히 속삭이던 기척
어딘가를 돌아오는 목숨인가
바람의 손 잡고 하고픈 말
지금은 때가 아님을 알아
지천으로 늘어놓는 희망의 가지 잘려도
어쩌다 찾아오는 어둠을 살아내며
가끔은 몸 떨리더니 뿌리 깊은 미움의 흔적으로 남았다
견고한 자존이 휘감겨 녹아나는 생각들 놓아둘 가슴
가야 할 길을 비켜 서 있는 발 끝에
기개만 서렸다
세상 한 모퉁이 서 있는 내 모습 찾아보려 했는지
이 엄동에 나를 엿본다
침묵해야 할 욕망의 가지들에
저만큼 여린 햇살이 서성인다
-「겨울에 들어서다」전문
우리가 길 위에 서는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길 위에서의 이야기들을 가슴에 담고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시인은 추운 겨울 어느 날 길 위에 서 있다. 세상 어느 한 모퉁이에 서 있는 자신을 만나보기 위해 ‘칼바람이’ 다가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가야만 하는 길이다.
시인의 감각은 매우 날카롭다. ‘아픔 눈부시다’나 ‘욕망의 가지들에/저만큼 여린 햇살이 서성인다’와 같은 구절을 보면 얼마나 예민한 촉수로 사물을 관찰하면서 조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칼바람이’ 부는 인생의 길목에서 깊은 상념에 잠겨 삶을 뒤돌아보는 시인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가까이 가고 싶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바람 소리에
공허가 채워지고
먼 산 발치에서 이렇게
베인 가슴 버티며
하염없이 침묵만 지켰다
속살 깊이 바늘 꽂히는
위험인 줄 알면서도
기침 소리마저 낼 수 없다
상처뿐인 세상
산골짜기에 숨어
막막함을 찢는
처절한
울음의 종이 되었다
-「새1」전문
길 위에 선 시인은 새가 되고 싶었을까. 어디로든 마음대로 날아갈 수 있는. 그러나 ‘상처뿐인 세상’에서는 ‘울음의 종’으로 울릴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 이렇게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는 ‘멈추지 않는 바람’의 장애와 막막한 ‘공허’와 ‘베인 가슴’의 아픔, 그리고 ‘하염없’는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모두 나를 파괴하는 위험요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의 고비를 넘겨온 이력과 경륜이 승화되어 하나의 종소리가 되고, 시인의 성숙한 내면의 풍경은 견고한 이미지로 떠오르고 있다.
인연의 봄을 따라 걷는 길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음의 틈새로 스미는
미소에 감전되었나
소용돌이치는 이제야
가던 발걸음을
바람 부는 쪽으로 돌린다
궂은 바람의 시작에도
푸른 꿈을 꾼다
빈 가슴 채워주는
빛으로 올까
아직은 여름의 조각들이 숨어있다
소리 없이 몰려온 바람에
붉게 타오르는 생각들
흩날리는 속삭임이 보인다
생각의 가지에 상처 날까
시름 돋는 오늘
햇살이 내 발등을 지켜본다
-「불혹의 바람」전문
‘인연’의 ‘목소리’는 소중하다.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마음의 틈새’가 조금만 있어도 스며들어 ‘감전되’고 만다. 마음은 ‘소용돌이치’고 목소리를 실어오는 ‘바람 부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푸른 꿈을 꾼다.
‘속삭임들이 흩날리고 생각의 가지에 상처가 나’면 시인의 마음은 또 얼마나 어지럽고 아플까 걱정이 많다. 그러나 ‘햇살이 내 발등을 지켜본다’는 희망에 ‘흩날리는 속삭임’을 다잡고 ‘생각의 가지에 난 상처’를 보듬는 시인의 모습이 엿보인다.
시인의 가슴에는 수시로 수많은 시적 풍경들이 그려지고 지나가고, 또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풍경들을 받아 쓴 것이 바로 그녀의 시다.
날마다 새로이 환하게
세상을 지키시는 임이시여
천둥 번개 치던 여름을 피해
지켜보는 내가 처연해도
눈물의 끝은 이리 평온하옵니다
내 생의 한 자락에 상처만 남아도
온종일 눈 맞추고 있습니다
신비로 오신 오늘은 세상이 더 빛납니다
잊은 듯해도 돌고 돌아
내 앞에 침묵으로 서 계신 임
속이 타는 꽃입니다
먼 길을 휘돌아온 푸른 욕망
빈 가슴 한편 포말이 일었다 해도
오랜 시간 밀리고 밀려서
확신하게 된 임 안에서 불혹을 넘어서는 준엄함
따라온 희망의 팔도 놓았습니다
빛나고 또 빛나는 청정한 가슴에
온 힘으로 솟구쳐도 옮겨 다닐 수 없는 나는
세상의 곳곳에 쌓이는 눈을 봅니다
다소곳이 꽃을 안고
걸어가는 내 옆얼굴을 보셨습니까?
-「대웅전에서」전문
대웅전은 가람의 중심이 되는 전당으로, 큰 힘이 있어서 도력道力과 법력法力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이다. 그 전각의 주인공인 부처님의 무릎 아래 머리 숙이며 의지하는 심사가 평온하다. 그래서 ‘내 생의 한 자락에 상처만 남아도/온종일 눈 맞추고 있’는 것이다. 짧은 삶,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지만, 찰나와 같은 인생 그 속에 크고 작은 번뇌는 많기도 하지 않은가. 시인은 쌓여가기만 하는 삶의 숙제를 ‘내 앞에 침묵으로 서 계신 임’에게 의탁하고 해결하고자 한다. 또 그곳에서 속마음을 내려놓고 있다. 어쩌면 다른 누구에겐가 전하고픈 간절한 마음을 대웅전을 바라보며 하소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바람의 손 잡고 하고픈 말/지금을 때가 아님을’(「겨울에 들어서다」)알기에 묵묵하게 길을 걷는다. 그 길에서 ‘꿈속에 있던 내 이마 할퀴고 가는/바람의 손톱을 살펴보는 나만 움찔했다’(「산행」)는 인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온 땅이 만상을 잡고 있듯
내가 너를 피할 수 없지
너를 만나고 마음에 금이 간다
불혹의 나이에 시선의 기억 잘 익어
안으로만 키우는 하얀 그리움
기막힌 상처이지
꽃샘바람이 낸 상처마다
파랗게 피는 아픔마다 봄이 될까
이제 막 피어날 꽃봉오리 여백이 많다
부딪쳐야 할 온 마음 드러나는 이 봄에
줄 것 없는 나는
비애 속을 바라보았지
내 뜨락 비 내려 꽃잎 하나 파르르 흔들린다
거대한 바람 소리에 지고 말 꽃은 아니지
눈물이 먼저 온 세상
지금 막 지려 하는 꽃은
열매를 위해 내어 주는 자리일까
-「꽃샘바람에게」전문
길 위에서 화자는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났을까? ‘너를 만나고 마음에 금이 간다’고 속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래도 ‘거대한 바람 소리에 지고 말 꽃은 아니’라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어느 광고의 한 장면처럼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떠오르게도 한다.
‘온 땅이 만상을 잡고 있듯’ 만날 수밖에 없는 끈질긴 인연은 무엇일까. 상처일까, 그리움일까, 그리움이 크면 상처가 되고, 상처도 깊은 인연의 것이라면 그리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의 고비마다 만나는 ‘꽃샘바람’ 같은 인연의 대상은 어쩌면 피어날 꽃에게는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피할 수 없’는 일, 그것이 사실은 나를 있게 하는 중요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매우 성숙한 사유를 통해 그것을 터득하고 있다.
미루나무 사이로 낮달이 눈 맞추고
고르지 못한 세상에 매달려
살아 숨 쉬는 슬픔 하나 있다
얼마나 더 기다리면
이 안타까움들 꽃으로 피워낼 수 있을까
문득
누군가 상기된 얼굴로 나를 부른다
바람의 길 보며
그 길 풀 섶에서 놓친 보물을 찾듯
집중하는 내 슬픈 눈
살아온 날들 눈물이 거듭되면
혹여 차가울까
바람의 귀엣말에 가끔 귀 기울여도
발효되지 않은 기억만 만발하는
슬프고 깊은 그리움
-「바람의 집」전문
그리움과 기다림의 심사가 지극하고 간절하다. 어쩌면 이것은 사랑이나 존경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간곡함이다. 현실 너머의 저쪽 세계에 새로운 가치로 피어나는 꽃이다. 눈에 보이는 듯하다가 이내 지워지는 ‘바람의 길’ 위에서 ‘놓친 보물을 찾듯’ 하는 절절함은 정녕 이 세상의 일이 아닌 저 너머 세상의 일이다. 그만큼 차원 높은 그리움이다. ‘미루나무 사이로 낮달이 눈 맞추’는 것을 감지하고 ‘바람의 귀엣말’을 들을 수 있는 감각과 사물인식도 매우 참신하다. 이러한 참신성이 곧 사물의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는 시인의 능력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결박에서 풀려나고 있다
막막한 하늘을 겨냥하던 시선
억겁의 인연일까
이 길 가면 푸르게 살아갈 꿈이 있다
어둠일지라도 활활 불길 되어
번뇌의 줄 풀고
꼬리마다 꿈을 꿰는 시간 속에
시름을 물고 달아나는 그 어디쯤
바람의 전설에 불을 켜라
때론 바람에 휘말리는
거대한 날개
질주하는 신경의 분자
우주를 안고 있다
맑은 혼으로 하늘을 닦으며
하늘과 땅이 내 의식의 끝을 부여잡고
줄다리기하고 있다
-「연」전문
‘오랜 결박에서 풀려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필자는 이것을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인습적 사고, 고정된 관념으로부터의 탈피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한층 고양된 정서의 세계, 또는 몇 단계 상승한 관념의 세계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길에서 시인은 ‘푸르게 살아갈 꿈’을 꾸고 ‘번뇌의 줄을 풀고’ 새로운 세계인 ‘우주를 안고’ ‘맑은 영혼으로 하늘을 닦으며’살게 된다.
이제 시인은 길 위에서 만난 세속에의 일들을 내려놓으며 ‘얼마나 기다렸을까/밤을 끌고 온 그대/안개꽃 한 다발 안고/ 거실 한 끝에 서 있다’(「새벽달에게」)고 고백한다. 온힘을 다해 걸어온 길, 내공을 모아 진력해온 그 길 위헤서 만났던 풍경들로 만들어낸 시인의 노래들은 그래서 절대 슬프지만은 않다.
깊숙이 자리 잡은 남은 어둠 속을
내가 한 점 바람으로
닿는 곳마저 이리 빛나는구나
마음 한구석 잠깐씩 돌아서서 키 재던 생각
겨우내 입은 상처는
떠나지 않는 그리움의 시간을 가둔다
맴도는 기억 달아나는 산그늘에 앉았다가
이 긴장의 도가니 속 메아리만 남겨둔
산등성이의 힘에 발목 잡혔나
그리움만큼 깊어진
푸른 강을 꿈꾸고 있다
거슬러 오르는 바람도 만나고 햇살도 만나
우우우 일어서는 봄
꽃샘바람을 막막하게 바라보며
숨겨두고픈 마음 꼭꼭 여며도
그 눈부심에 구름을 걷어 안고
우주를 흔들어 깨운다
-「생각의 누드1」전문
류순자 시인의 시편들 속에 많이 등장하는 ‘바람’은 유동성, 유랑성을 표상하는 것이 많다. 어딘가로 떠나는 일, 다른 곳을 지향하는 일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몸짓이다. 새로운 세계는 나를 새롭게 해준다. ‘누드’는 새롭게 태어날 나를 위한 모드인 것이다.
생각이 옷을 벗으면 어떤 모습일까? 시인은 눈과 마음에 담았던 풍경들을 우리에게 슬라이드처럼 보여주며 노래한다. ‘내가 한 점 바람으로/닿는 곳마저 이리 빛나는구나’, ‘그 눈부심이 우주를 흔들어 깨운다’고……
어쩌면 시인은 새로운 길 위에 다시 서기 위해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 가방을 풀면서 다시 여행 가방을 싸고 있는 여행자처럼……
길 위에서 담아왔던 이야기들을 모두 풀어낸 후 ‘이제야 가진 것 없어도 평화롭다’(「길 위에서 1」)며 초연해진 시인의 모습을 보여 준다.
니체는 “등산의 기쁨은 정상에 올랐을 때 가장 크다. 그러나 최상의 기쁨은 험악한 산을 기어 올라가는 순간에 있다.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가슴이 뛴다. 인생에서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추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 그 이상 삭막한 것이 없을 것이다”고 말했듯 시인은 길 위에서의 고난과 아픔들을 온전히 품을 다음 상상의 시어들로 승화시켜 따뜻하게 풀어 놓았다.
또 ‘언어야말로 의지의 표현이므로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인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다’(『초역논어』요왈편堯曰便, 미사키 류이치로, 이소담 옮김)고 한 것처럼, 류순자 시인의 시어들은 시인의 마음과 의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기도하듯 보여주는 은유의 세계는 우리도 모르게 두 손 모으게 하는 힘이 있다.
물질이 우선시되는 시대, 눈뜨면 달라지는 세상 속에서 따뜻하고 섬세한 정서를 추구하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류순자 시인의 시가 오래전 찍어 두었던 추억 속의 사진을 보여주듯 우리에게 따뜻한 정서를 회복시켜 주고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데려다 주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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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시에게
소리 없이 살아온 내가 너 만나며
오늘도 흥겨운 세상 속 걷는다.
날마다 벽 부딪치며
간절히 잡고자 했던 너
파도였느냐
어리게 지나온 시간
기침 소리마저 낼 수 없다.
버리지 못한 꿈 때문에
속살 깊이 바늘 꽂히는 이제
가슴만 멍든다
그 바람 속에 서서
끝 모를 침묵에 이마 닦는다.
너 잊고 지내면 늘 그리울까
너 찾지만 지그시 눈 감은 채
끝끝내 말하지 못하고
가슴 아린 숙명이어야 하나
단 하나의 너 찾고 싶어
가슴 차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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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순자 시인∥
∙ 1995년 계간『문예한국』여름호 시 부문 등단
∙ 충북여성문인협회(1995년~2013년)
∙ 청주문인협회(1996년~2013년)
∙ 소월시 기념사업회 이사
∙「문학신문」문인회 부회장
∙ 한국시 대사전 등재
∙ 22012년 한국대표 명시선집 등재
∙ 한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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