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2-07-22
암살하고 ‘천주’ 주장… 日의 왜곡된 정치테러 [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암살당하자 그의 지인 중 한 사람이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다다미가 아닌 정치 연설 현장에서 최후를 맞은 게 ‘뼛속까지 정치인’인 아베다운 죽음이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를 봤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게 사살되었을 때, 그의 라이벌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얼마나 멋진 죽음이냐며 자신은 다다미 위에서 죽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한다. 일본에서는 총 쏘는 사람도, 총 맞은 사람도 ‘가오(かお·체면)’를 챙긴다. 》
#교토, 한때 ‘테러리스트의 천국’ : 1930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절정기에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총리가 도쿄 역에서 총격을 받았다(10개월 후 사망). 범인은 우익 청년. 하마구치 내각이 런던의 해군군축회담에서 미영의 우위를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한 직후였다. 군부와 우파는 이를 통수권간범(統帥權干犯)이라고 공격했다. 대일본제국 헌법에 따르면 국군통수권은 천황에게 있는데, 정부가 천황의 의사와 상관없이 멋대로 병력에 관한 문제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당시 히로히토 천황도 이 조약을 지지했고, 외국과의 조약은 군부가 아니라 정부가 담당하는 것이므로 말이 안 되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다이쇼 데모크라시하에서 정착된 정당내각을 폭력으로 타도하려는 움직임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일본의 테러 역사를 살펴보자. 1853년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가 개국을 요구하자 일본사회에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특히 그간 정치 참여의 기회를 얻지 못하던 하급 사무라이들이 위기를 과장·선동하며 정치개혁을 부르짖었다. 그것이 막히자 테러가 빈발하기 시작했다. 일본사에서 막말유신기(幕末維新期·1850∼70년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막부다이로(大老·총리)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저명한 양학자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사쓰마-조슈맹약을 이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암살되었다. 당시 정쟁의 중심이었던 교토는 테러리스트들의 천국이었다. 메이지 정부 수립 후에도 개화정책을 주장하던 요코이 쇼난(橫井小楠), 징병제를 도입한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가 비명횡사했고, 급기야 1878년 당시 최고 권력자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마차로 출근하던 중 암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1880년대 들어 정치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테러의 기세도 수그러들었지만,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다. 첫머리에 언급한 오쿠마 시게노부(당시 외무대신)가 서양과 조약개정 교섭을 벌이던 중 습격을 받아 한쪽 다리를 잃었다. ‘멋지게 죽을 기회’였지만 그는 살아남아 수상을 두 번 역임하고, 와세다대를 세우고 84세까지 살다 ‘다다미 위에서’ 죽었다. 외국 요인도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1891년 일본을 친선 방문 중이던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는 칼을 맞았고(오쓰 사건),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으러 일본에 왔던 청나라 이홍장도 테러를 당했다. 둘 다 목숨은 부지했으나 중상을 입었고, 일본 정부는 그 뒷수습에 쩔쩔맸다. #관저서 살해당한 이누카이 총리 : 면면히 이어지던 ‘테러의 전통’은 1930년대 들어 ‘꽃을 피웠다’. 경제대공황과 만주사변으로 정치·외교·경제가 동시에 불안에 빠지자, 다이쇼 데모크라시 체제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떨어졌고, 군부와 우익세력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1931년 10월 육군 장교들의 쿠데타모의가 발각되더니(10월 사건), 우익단체 혈맹단은 1932년 2월에 재무상·일본은행 총재를 역임한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를, 3월에는 미쓰이 재벌 총수 단 다쿠마(團琢磨)를 총으로 쏴 죽였다. 이윽고 5월 일본 해군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의 관저에 난입했다. 당시 미국의 유명 배우 찰리 채플린이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다. 이누카이 총리와 이날 면담하기로 했으나 일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총리는 관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77세의 노총리는 난입한 젊은 장교들에게 총은 언제라도 쏠 수 있으니 일단 내 말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군인 중 한 명이 “문답무용(問答無用)! 쏴라!”고 소리치자 총탄이 쏟아졌다. 의식이 남아 있던 총리는 주변에 “젊은이들을 불러오게. 할 말이 있네”, “9발이나 쐈는데 3발밖에 맞지 않았으니 병사들 훈련이 엉망이군”이라고 했다 한다. 이누카이 암살을 계기로 정당 내각시대는 막을 내렸고, 이후 1945년 패전까지 다수당의 총재를 대신해 군인·귀족 등이 총리에 임명되었다. #암살된 아베를 향한 동정과지지 : 일본 정치테러의 특징은 테러범들을 흉악범이라기보다는 ‘지사(志士)’로 대접하는 분위기가 강하다는 것이다. 테러범 스스로도 자신들의 행위를 ‘참간(斬奸·간신을 베어 죽이다)’, ‘천주(天誅·하늘의 벌)’라고 주장했다. 기성세력은 테러에 단호히 대응하기보다는 꼬리를 내리고 전전긍긍했다. 주동자에 대한 처벌도 비교적 가벼웠다. 이렇게 되다 보니 젊은이들의 영웅 심리는 더욱 고조되고, 테러는 정당하며 심지어 ‘아름다운 것’이라는 인식조차 넓게 퍼졌다. 몇 년 전 작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로 화제가 되었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소설 ‘우국(憂國)’은 바로 그 테러·쿠데타·할복의 ‘미학’을 다뤘다. 테러에 대한 타협과 미화는 결국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 1936년 2월 26일 도쿄에 주둔하던 청년 장교 1000여 명이 총리관저·경시청·주요 신문사 등을 습격했다. 테러를 겸한 쿠데타였다. 총리와 조선총독을 역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재무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등이 살해되었다.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기성 정치세력에 염증을 느낀 많은 국민들은 청년 장교들에게 동정과 지지를 보냈고, 결국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한층 진행되었다. 아베 전 총리의 암살에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가 큰 충격을 받았다. 범인이 해상자위대원 출신이라 순간 전형적인 우익 테러라고 생각했으나, 정치적인 동기는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사람을 ‘지사’로 미화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아베 전 총리에 대한 동정과 지지가 일본을 뒤덮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배경을 깊숙이 파고들어 가다 보면 일본사회 저변에 광범하게 깔려 있는 정치적 좌절감, 사회적 불만과 만날지도 모른다. 일본 시민들의 경계를 당부한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지? (아침공감편지 230909)
병아리 10마리로 시작한 김홍국은 닭고기 생산 판매 1위 업체인 (주)하림의 창업자가 되었습니다. 실직자였던 김양평은 세계 최대, 최고의 코팅기 제조회사 GMF의 창업자가 되었습니다. 한강 둔치에서 3년 가까이 노숙자 생활을 했던 신충식은 칫솔 살균기 분야 세계 1위인 에인 시아를 세웠습니다.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상황과 환경 속에서 기적 같은 일을 해낸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계신가요?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시시한 현실따위는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의 삶에 감사하며 여러분의 꿈을 위해 걸어가세요.
이제 당신의 차례입니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