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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파31회 원문보기 글쓴이: 마여사(지숙)
'반년 시계', 간송미술관
서울 성북동 골목에 위치한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이다.
1971년 이래 해마다 5월과 10월 둘째 주말, 그러니까 1년에 딱 두 번 2주일 동안만 전시회를 여는데,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에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기대감에 부푼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몹시 북적거린다.
전시회에 나오는 작품들이 하나같이 국보 · 보물급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귀한 것들이다.
그리고 도심에서는 매우 드물게 한적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지닌 전시 공간에서 진지하게 감상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간송미술관 전시에 대한 기대와 평가가 매우 높다.
상황이 이러하니,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간송미술관의 전시회는 '반년 시계' 로 통할 정도이다.
간송미술관이 세워진 것은 1938년, 평생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하는 데 헌신하여, 일제강점기와한국전쟁이라는 사회
혼란기에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훼손되는 것을 온몸으로 막아낸 간송 전형필 (澗松 全鎣弼 :
1906~1962) 에 의해서이다.
대학 재학 시절 간송 (1928년)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를 바라보는 간송
10만 석을 상속받은 갑부의 고민
간송 전형필은 1906년 중추원 의원이자종로 거상인 전영기의 2남 4년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당시 서울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잡다시피 한 소문난 갑부였다.
간송은 휘문고보(현 휘문 중고등학교) 를 거쳐 1929년에 일본 도쿄의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휘문고보를 다닐 때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이 미술 선생님이었는데, 이들은 스승과 제자라기 보다는 친구
처럼 매우 각별하게 지냈다.
간송이 그림에 남다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이때이다.
여느 부잣집 자제들과는 달리 늘 검소하며 근면한 모습을 보였던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자마자 선대로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고양군, 양주군, 광주군 일대의 토지 약 10만 석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는다.
만석지기만 해도 하늘이 낸다 하였는데, 그의 10배나 되느 10만 석을 젊은 나이에 상속받았으니, 그만큼 고민도 컸을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막대한 재산을 가치 있게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막대한 재산을 우리 민족을 위해 쓸 수 있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에 대한 답을 구하기에 골몰해 있을 무렵 그는 일생일대의 잊을 수 없는 스승을 만난다.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 1864~1953)
바로 3.1 운동 때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 1864~1953) 이다.
오세창은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자 서계의 대가였다.
간송은 오세창에게 직접 글씨와 서화를 배우면서 문화재에 대한 안목과 올바른 관점을 갖게 된다.
"인간과 짐승을 가장 두드러지게 구분해 주는 것이 바로 문화라는 것이야.
그런 의미에서 한 나라의 문화재란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주체성과 정신적 가치가 깃든 일종의 유산이지.
즉 우리 문화재는 우리 민족의 정신이 함축된 유산이란 말일세.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일은 그 일에 생애를 바치겠다는 굳건한 뜻이 있어야 가능하네.
아니, 그 뜻만큼 중요한 것이 능력이야. 우리 문화재를 닥치는대로 사들이는 일본인 수집가들과 맞설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일세.. "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간송은 오세창의 권유를 받아들여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다.
골동품 수집에 막대한 자금이 드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전문적인 감식안과 지극한 정성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10만 석의 재산을 상속받은 간송에게는 각지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들을 구매할 수 있는 재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전문적인 감식안을 키워 줄 수 있는 오세창을 비롯하여 문인 화가이자 교양 있는 수집가였던 영운
김용진, 휘문고보 시절 은사인 고희동 등이 있었다.
맨 처음 서화와 고서로부터 시작된 간송의 문화재 수지은 차차 고려 및 조선 시대 도자기, 기타 불교 조각품으로 대상이
확대되어 갔다.
이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민족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사명감이 아니었다면 문화재를 수집하면서 겪은 그 숱한 난관을 이겨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단오풍정(端午風情: 단오날 풍경)
야금모행 (夜禁冒行: 심야에 금지된 나들이)
월하정인(月下情人 : 달 아래 두 연인)
연소답청(年少踏靑 : 젊은이들의 봄나들이)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견본채색
1930년대 전후 서울의 고미술계에는 금력과 권력을 가진 일본인 수집가와 유수한 한국인 수집가 들이 꽤 있었다.
주로 경성미술구락부에서 서화, 도자기 등을 경매했는데, 간송도 거기에 자주 나갔다.
당시 한국인 수집가로는 장택상, 손재형, 김찬영, 김용진, 민규식, 함석태, 이병직, 박병래 등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문화를 만들고 누리는 일에 무지하다시피 한 사람들이 많아서 김홍도나 장승업 같은 화가들의 명화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으로 도배를 하는가 하면, 청화백자 같은 보물들을 종종 개나 고양이의 밥그릇으로 삼기도 하였다.
안타깝게도 이렇게파손되어 사라져 간 문화재 수도 적지 않을 것이다.
설상가상 고관대작들은 문화재를 골동품이라 하여 뇌물로 바치는 데 급급했고, 이를 무더기로 밀반출하면서 제주머니만
불리는 수집가들이 판치는 때였다.
간송은 우리 문화재가 나라 밖으로 술술 빠져나가는 이런 상황을 그저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한남서림' 이라는 인사동의 고서점을 인수하였다.
본래는 고서적을 팔고 사는 가게지만, 서화와 골동품을 사들이는 일이 더 큰 목적이었다.
거간들이 이곳으로 물건을 가지고 나오면 간송이 달려와 감정하고 흥정하였는데, 산송이 어찌나 많은 물건을 보았던지
감식안이 매우 각별하여 누구도 그를 섣불리 속이지 못했다고 한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제68호 높이 42.1cm 밑지름 24.5cm)
천 마리 학이 날다
"2만 원에사겠소!"
1935년, 일본인 골동품상 마에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조선 청년의 말 한 마디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당시는 서울의 웬만한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쌀 한 가마니가 16원 하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돈이 있는 조선 청년이라지만, 그 값에는 설마 살 수 없겠지 하는 마음으로 제시한 금액이었다.
제대로 허를 찔린 마에다는 낭패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골동품상 마에다의 간담을 서늘케 한 그 조선 청년은 짐작하다시피, 간송이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거금으로 그가 사들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얀 꽃구름이 흐르는 옥빛 가득한 하늘을 수십 마리의 학이 날개를 활짝 피며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고려 상감청자
한 점이었다.
고려청자 가운데 최고의 명품으로 손꼽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제68호)' 은 이렇게 하여 간송의 수집품이 되었다.
한 '조선 애송이' 에게 자존심을 다친 것은 마에다만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도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탐냈으나 엄청난 가격 때문에 포기한 바 있고, 일본 굴지의 수집가 중
한 사람인 무라카미는 흥정이 끝난 뒤에 간송을 찾아와 자신이 4만 원에 사겠으니 되팔라 하기도 하였다.
간송은 찾아온 무라카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청자매병보다 더 좋은 물건을 가져오면 언제든 원금에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없다는 것쯤은 무라카미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하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국보 제294호 높이 42.3.cm 밑지름 13.3cm)
조선백자로 하나의 작품에 붉은색 안료인 진사, 검은색 안료인 철사, 푸른색 안료인 청화를
함께 곁들여 장식한 매우 이례적인 작품
이처럼 좋은 미술품이나 문화재를 에누리 없이 거금으로 주저 없이 사들인 예는 얼마든지 더 있다.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국보 제294호)', '훈민정음 (국보 제70호)' 등이 그렇다.
예술품을 보는 안목이 높아진 그는 문화재 수집 실력에서 당시 탐욕스러운 일본인 수집가와 골동품상을 앞지르곤 했다.
또 일본인에게 놓친 물건이 있으면 힘을 다해 다시 사오고야 말았으니, 한마디로 당시 상황은 문화재를 통한 힘겨루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서울의 일본인 수집가로는 식산은행 은행장, 경정전기 주식회사 사장 등 강적이 많았는데, 간송은 그런 일본인
강적에 대항하여 국내의 유수한 수집가들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며, 우리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견제하였다.
세종 28년 (1446년) 9월에 출판된, 훈민정음의 한문 해설서이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화재는 제값을 받아야 한다
간송은 파는 사람이 부른 가격의 몇 배에 해당하는 돈을 자진해서 지불하기도 했다.
좋은 물건, 진귀한 물건을 만났을 때는 고미술상이나 파는 사람에게 가격을 묻지도 않고 알아서 그 가치에 합당한 충분한
가격을 지불했다.
간송이 '훈민정음' 을 소장하게 될 때의 일이다.
1942년 늦여름, 한남서림에서 창밖을 보던 그의 눈에 옛 서적을 거간하는 이름난 골동품 상인이 들어왔다.
어딘가 바쁘게 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그를 붙잡고 인사를 나누며 알아보니, 사연인즉 '경상북도 안동에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 는 것이었다.
'책 주인이 1,000원을 부르기에 돈을 구하러 가는 길' 이라고 했다.
조선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후에 출판한 이'훈민정음' 은 당시까지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일제는 1930년대부터 우리의 정신과 문화가 담긴 한글을 말살하려 했기에, 만약 그 책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조선
총독부의 귀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눈에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뻔했다.
간송은 거간꾼에게 즉시 1만 1,000원을 건네며 책 주인에게 1만 원을 전하고 1,000원을 수고비로 받으라고 했다.
귀한 물건은 제값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신조에 따른 것이다.
이후 광복이 될 때까지 간송은 '훈민정음' 이 있다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지 않게 무척 조심했다.
한글로 발간되는 신문과 잡지를 모두 폐간하고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잡아 가둔 일제였다.
만일 조선총독부가 알게 된다면 '훈민정음' 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서둘러 피난을 가야 할 상황에서도 그는 '훈민정음' 만은 가방에 넣고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낮에는 품고 다니고 밤에는 베개 사이에 끼워 놓고 자는 등 잠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청자압형수적 (국보 제74호)
준비 없는 기회는 없다
존 개스비 (John Gadsby) 는 1914년을 전후해 일본 도쿄에 정착한 영국인 변호사이다.
개스비는 영국의 귀족 출신으로, 당시 나이 스물다섯의 청년이었다.
서양인이면서도 도자기 보는 안목이 뛰어난 그는 이후 25년 동안 도자기만을 수집하였는데 서양인으로서 동양의 도자기에
대해 당대 최고의 심미안이요, 감식가였다.
특히 그의 고려자기 컬렉션은 그 명성만큼 질과 양적인 측면에서 모두 우수했다.
때문에 간송은 그의 존재와 행방에 대해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왔다.
언제가는 개스비가 컬렉션을 처분하고자신의 모국인 영국으로 돌아갈 것이라 예상하고, 그것이 일본인이나 다른 외국인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단골 업자에게 미리 의뢰해 놓고 있었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1937년 2월, 개스비가 고려자기를 처분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간송은 지체 없이 비행기를 타고 바로 도쿄로 출발했다.
그날은 2.26 사건이 있은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2.26 사건이란 일본 육군의 일부 청년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러 명의 대신과 정부 고위층을 기습한 사건으로 이후
일본에서는 군부의 정치 지배력이 더욱 무섭게 강화되었다.
2.26 사건이 있은 뒤 중일전쟁이 터졌고 급기야 영국, 미국과도 싸움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상황이 불안해지자 개스비는 소장하던 중요 물건을 모두처분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간송은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공주에 있는 5,000석지기 농장을 팔았다.
급히 파는 바람에 제값을 받지 못했는데, 그동안 간송의 문화재 수집에 대해 이렇다 말씀이 없으셨던 그의 어머니조차도
이때만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백자박산향로 (보물 제238호)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 (국보 제66호)
일본에 도착한 간송은 도쿄 고지마치에 있는 호화 저택으로 존 개스비를 찾아갔다.
개스비의 소장품에는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 (국보 제66호)' 과 '백자박산향로 (보물 제238호)' 외에도 '청자기린
유개향로 (국보 제65호)', '청자압형수적 (국보 제74호)' 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기와집 50채 값에 해당하는 현금 50만 엔, 지금 돈으로 수십억 원쯤 될 고액을 아낌없이 지불한 간송.
그의 용기 있는 결단은 우리 문화재 수집에 대한 사명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단언한다.
개스비도 조선의 명품이 조선인에게 돌아가는 것을 몹시 기뻐했다.
그는 한일병합 이후 조선 문화재가 일본으로 무질서하게 반출되는 것을 보고 평소부터 유감스럽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문화 광복' 의 집, 보화각을 세우다
간송이 일생 동안 수집한 문화재의 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책은 2만여 권에 달하고, 서화, 도자기, 불교 조각과
불구(佛具), 와당(瓦當) 등은 그 종류와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그렇지만 그가 모은 수집품 하나 하나에는 간송의 애정이 담기지 않은 것이 없다.
1938년 여름, 간송은 서울 성북동의 아담한 2층 건물에 '보화각' 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이 탄생한 것이다.
바로 지금의 간송미술관이다.
보화(葆華) 란 '빛나는 물건을 모아 둔다' 는 뜻이다.
"보화각은 단순히 제가 수집한 미술품이나 문화유산을 전시하기 위한 곳이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연구하는 연구소로 운영하고자 합니다.. "
간송은 보화각을 통해 민족문화의 보존은 물론 민족적 긍지를 되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보화각은 이후, '문화 광복' 이라는 간송의 의지와 결의를 더욱 넓혀 주는 장소가 되었다.
당시 75세의 고령이던 오세창을 비롯한 많은 문화예술인이 보화각 건립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는데
특히, 오세창의 기쁨은 남달랐다.
보화각이라는 현판 글씨도 바로 그가 써줬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터지고 전쟁이 확대되자 일본은 우리나라를 병참기지로 이용하며 우리 젊은이들에게
입대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우리말과 글은 물론 한문도 가르치지 못하게 했다.
일본의 탄압이 점점 심해질수록 간송은 우리 문화유산과 민족정신을 수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건히 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급한 과제라는 생각을 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뜻밖에 보성학교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보성학교는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찍었던 곳이다.
그런 학교가 문을 닫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1940년 간송은 막대한 자금을 치르고 재정 위기에 몰렸던 보성학교를 인순했다.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보성학교 재단을 인수했지만 믿는 사람에게 학교를 맡긴 후로는 학교 일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광복되던 해 10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교장이 되었지만 1년도 못가서 그만두고 다른 사람을 추천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의 일이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바람에 간송은 애써 모아 둔 문화재들을 그대로 두고
피란을 가야 했다.
우리 문화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품만을 꾸려 급히 부산으로 떠났다.
휴전 직후,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이미 보화각이 아수라장이 된 뒤였다.
후에 잃어버린 자신의 물건들을 되찾기 위해 돈을 주고 되사야 했다.
괴산외사리석조부도 (보물 제579호)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 부은 간송은 1962년 1월 26일, 신장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불과 57세, 안타까운 나이였다.
이후 보화각은 1965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고 이듬해에는 고인의 유지를 잇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 전영우,
간송의 둘째아들) 가 설립되면서, 간송 소장품의 본격적인 목록 정리와 순차적인 공개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71년 간송미술관의 첫 전시가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해마다 많은 이의 기대감을 부풀리면서 봄가을
정기전시를 이어오고 있다.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를 살펴보는 만년의 간송
원대한 이상, 묵묵히 매진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 손으로 한없이 흘러 들어가거나 시대의 혼란 속에 방치되어 훼손될 처지에 놓이게 된 귀중한 우리
문화재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아끼지 않고 문화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언제든지 달려 나갔던 간송 전형필.
그가 세상을 뜰 때, 그가 물려받았던 억만금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문화재만 남았다.
조선 최고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호사와 안락한 생활이 약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독립투사의 애국심 못지않게 민족문화와 문화재 수지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외곬으로 묵묵히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개인의 행복보다는 역사와 문화재를 지키려 했던 간송의 원대한 이상과 강한 집념의 발자취는 우리 후손들에게 깊은 생각
거리를 안겨 주며,
진정 이 시대의 제2의 간송은 더 이상은 없는지, 지금 이순간에도 부패하고 타락한 선택받은 자들의 행로에 씁쓸한 눈길을
보내본다.
첫댓글 일하는 틈틈히 올리는 바람에 교정을 보지 않아 오타가 몇군데 났네요.. ^^ 양해 바랍니당~~
잘 정리되어 있군요. 고맙습니다. 이 글을 스크랩하고 싶은데 가능하실런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