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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락 김씨 상계도
方慶-훤-資 -承用-厚 -七陽-瑱 -三老 -玖 -成牧-休 -益精 -承澤-昻 -九用 -冕-九鼎-子膽-孝溫-克諧-光粹-溏-世佑-士元(의성사촌) -士亨 -士貞 - 女 柳仲郢 -雲龍 -成龍 -忻-承固 -恂-永暾 -永暉 -永煦-藏-士謙 -士廉 -士安 -士衡-陸-陞-宗淑-礩-智童-湕-彦濬 (풍산 소산 세거) -彦沖 (와룡 용두골세거) -彦淳 (남후 개곡 세거) -女 鄭憤- 䫨 - 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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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풍산 소산, 와룡 용두골, 남후 개곡에 세거하는 상락 김씨는 조선 개국공신 翼元公 金士衡의 고손자이자 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의 모반을 고발하여 공신이 되고 성종 때 좌의정에까지 오른 金礩(1422-1478)의 후손들이다. 김질의 손자 성주판관 金湕의 세 아들 중 金彦濬의 후손은 풍산 소산에, 金彦沖의 후손은 와룡면 일대에, 金彦淳의 후손은 남후면 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김방경(金方慶) 1212(강종 1, 임신) ~ 1300(충렬왕 26, 경자)
고려 시대의 명장. 본관 안동(安東). 자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 병부상서(兵部尙書) 효인(孝印)의 자로 풍산(豊山) 회곡(檜谷)에서 태어났다. 1227년(고종 14) 음보(蔭補)로 산원(散員) 및 식목녹사(式目綠事)가 되어,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1248년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을 역임했으며, 후에 상장군으로 승진되었다. 1270년(원종 11) 장군 배중손(裵仲孫) 등이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난을 일으키자 진도(珍島)까지 쳐들어가 적도를 토벌하고, 김통정(金通精)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耽羅)에 들어가서 항전하자 1273년(원종 14)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흔도․홍다구와 함께 또다시 삼별초를 쳐서 완전히 평정하였다. 1274년과 1281년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의 일본 정벌에 고려군 총사령관으로 참가해서 분전했으나 태풍으로 실패하였다. 돌아와 1283년(충렬왕 9)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해졌다. 1300년 89세로 병사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으며, 사후 충선왕 때 다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추증되었고, 예천(醴泉)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高麗史․永嘉誌
김사형(金士衡) 1333(충혜왕 복위 2, 신사) ~ 1407(태종 7, 정해)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시호는 익원(翼元). 김방경(金方慶)의 현손. 장(藏)의 자. 음보(蔭補)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후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7년(우왕 3) 집의(執義)․개성부윤(開城府尹)이 되었으며, 이어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 1390년(공양왕 2) 밀직지사(密直知使)로 대사헌(大司憲)을 겸하다가 문하부지사(門下府知事)로 특진하였고, 뒤에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1392년 여러 장상(將相)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였다.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였으며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이어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에 상락백(上洛伯)으로 봉해졌다. 1399년(정종 1) 등극사(登極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하부판사(門下府判事)가 되고, 1401년(태종 1) 좌정승(左政丞), 이듬해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 부원군(府院君)이 되어 공직에서 물러났다. 벼슬을 하면서 한 번도 탄핵받은 일이 없었다. ■참고문헌 : 太祖實錄․高麗史
김질(金礩) 1422( 세종 4) ~ 1478(성종 9)
이조 성종 때의 공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 시호는 문정(文靖). 김방경(金方慶)의 후손. 동지중추부사 宗淑의 아들 1450년(세종32년)에 문과 급제, 집현전 학사로 성삼문,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사를 부탁받았으나, 세조가 찬위하자 1456년 사육신의 모반을 고발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고 성종 즉위후에는 좌리공신에 피봉되었다. ■참고문헌 : 成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