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81호. 지정면적 3만 5,283㎡. 무덤의 지름은 29.3m, 높이는 7.6m이다.
신문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정명(政明) 또는 명지(明之)로 문무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 부인은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다.
681년에 왕이 되어 692년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국학(國學)을 창설, 학문을 장려해 설총(薛聰), 강수(强首) 등의 대학자가 배출되었다. 승하한 뒤 경주 낭산(狼山)의 동쪽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이 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둥근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벽돌모양의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해 담장을 쌓아올리듯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려 무덤 보호석으로 하였다.
가로·세로 90㎝, 두께 50㎝ 되는 다듬은 돌을 대각선으로 곱게 잘라내어 만든 삼각형 받침돌 44개를 호석에 등간격으로 받쳐 무덤 외부를 매우 튼튼하게 하였다. 남쪽의 받침돌 중에는 ‘門’자를 음각한 것도 있는데, 그 의미는 확실치 않다. 봉토분 동쪽에 석상이 있으나 석재가 고르지 않아 원래의 것인지 확실치 않다. 이 왕릉에는 아직 십이지상·무인석·문인석·석수와 같은 표지가 없어 묘제가 완전히 갖추어지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능에 대해서는 신라 망덕사(望德寺)의 바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제32대 효소왕릉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그 근거로 1943년 황복사3층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사리(舍利)를 넣었던 금동함 뚜껑에 새긴 글을 들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 탑은 신문왕이 692년 7월에 죽자 왕후와 왕위를 계승할 효소왕이 건립하였고, 뒤에 효소왕이 승하하자 706년(성덕왕 5)에 불사리(佛舍利)·아미타상(阿彌陀像)·다라니경(陀羅尼經)을 넣어 죽은 신문왕·신목왕후·효소왕의 명복을 빌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황복사는 원래 신문왕을 위해 건립된 것이라 하여 경주 낭산 황복사지(皇福寺址)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파괴된 채로 흩어져 있는 곳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적으로 지정된 지금의 신문왕릉을 효소왕릉으로 본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신문왕릉 [慶州神文王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