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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2021년 다니엘기도회의 강사로 섭외되어 다니엘기도회 강사로 은혜를 끼쳤고 다니엘기도회 유튜브 영상 45만뷰를 기록한 김윤상 선교사의 아내되는 방민경선교사님이 쓰신 책입니다. 방선교사님은 남편인 김윤상선교사님과 결혼하여 과테말라에서 평범한 일상을 통해 조용히 선교하며 살고 있었는데 2017년 어느 날 “나와 함께 광야로 가자”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을 듣고 전혀 경험해보지 못해 앞이 막막하고 어떤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는 멕시코로 이사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멕시코에 온 지 1년 2개월이 지난 2018년 10월 남편 선교사님은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 때를 계기로 선교사님의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흔한 엑스레이기계와 내시경장비도 없고 필요한 약조차 쉽게 구하기 힘든 열악한 멕시코 시골병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남편 선교사님의 상황은 절망이라는 말밖에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이 절박한 상황에 아내 선교사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본인이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면서 SNS를 통해 전 세계 믿음의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하는 상황인데도 매일매일 삶속에서 남편 선교사님의 심장박동과 각종 수치들은 오락가락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하루에서 수십번식 변동이 너무 심했습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상황을 맡기며 전 세계기도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매일 매일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혼수상태에 빠진 지 24일째 되는 날 남편 선교사님은 혼수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깨어났고 온 가족은 그의 회복은 주님의 일하셨고 하나님께서 만져주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방민경선교사님은 아내로서, 세 자녀의 엄마로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딸로서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는지 이 책에서 담담히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훈련시키시고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간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님 부부는 이 일을 계기로 ‘예수 보혈’만이 우리의 능력임을 깊이 깨닫고 인생의 모든 순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소소한 일상은 당연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인생의 가장 큰 가치인 복음을 전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 인생의 가치를 가르쳐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께서 그 사랑으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말씀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만난 시각장애인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는 역사를 보여주시고 이 일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귀한 선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주신 선물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 우리가 경험하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며 예수님에게서 받을 선물이 무엇인지 깨닫고 정말 그 선물을 누리며 기쁨이 넘치고 은혜가 충만한 인생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받으면 정말 기쁠 예수님의 선물 첫째는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7절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 여리고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 곳에서 시각장애인이며 거지인 바디매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바디매오가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가 했던 말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정말 감사한 선물은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때 그 사람들이 나를 동정한다라는 마음이 들 때는 정말 비참하거나 나를 비관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앞에서는 도움을 요청해야하며 우리의 삶을 드리며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을 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어루만져주시며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은 큰 축복이며 정말 귀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줄 때 가지는 마음을 동정심이라고 표현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은 ‘동정심’이 아니라 ‘긍휼’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5절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찰스 스윈돌 목사님의『하나님의 뜻에 담긴 신비, 그 아름다움』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목사님께서 좋아하는 영화인 ‘부드러운 긍휼’(Tender Mercies)이라는 영화를 이 책에 소개합니다. 그 영화는 남편인 맥과 그의 아내가 결혼하면서 겪는 이야기에서 내용이 시작됩니다. 이들은 서로 너무나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맥은 술과의 싸움에서 진 남자였고 아내가 될 여인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과부였는데 전 남편이 전쟁터로 떠나기전 임신하여 배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결혼했는데 여전히 맥은 술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조용히, 상냥하게, 오래 참으며, 부드러운 긍휼로 하나님이 그녀의 남편을 다루실 것을 신뢰했습니다. 맥이 우울증이 생겨서 지내던 어느 날 발작증상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 술을 사서 자신의 소형 트럭을 몰고 갑니다. 다행히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으로 들어가는 중 그는 그의 아내가 자신을 기다리며 거실에서 성경 구절을 외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맥은 아내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술을 샀지만 쏟아 버렸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소!” 그리고 갑자기 그의 삶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이 영화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여 부드러운 긍휼로 남편을 주님께 인도한 한 여인의 아주 단순한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엄청난 학대와 구박을 받고 하루하루 함께 지내기 힘든 상황에서도 참고 인내하며 지내는 아내가 믿음으로 남편을 구원하고 남편이 변화되는 내용을 이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맥이 그의 어린 의붓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핍박과 고통의 삶의 순간속에서도 부드러운 긍휼을 통해 남편을 변화시키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긍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영화 속의 아내처럼 우리는 우리의 요구를 줄이고 우리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시선도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책망하시거나 우리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마음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과 허물로 인해 우리가 죽어야할 영혼, 우리는 영원한 심판을 받고 지옥불에 던져져야하는 인생,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긍휼을 경험하며 구원받은 영혼이 되고 천국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0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 받을 귀한 선물은 바로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일단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내가 뭐가 불쌍해” “나는 아무런 문제없어” “나 스스로 잘 해낼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자존감 높은 것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겨내지 못할 많은 문제가 있고 현실에 맞닥뜨리게될 한계상황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만하고 오만하고 내 능력을 과시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 전혀 도움이 필요없는 척 살아가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인지를 깨닫고 정말 예수님의 긍휼의 선물을 감사하며 예수님께 날마다 무릎을 꿇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할 때 예수님의 긍휼의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받으면 정말 기쁠 예수님의 선물 둘째는 안목의 회복입니다.
마가복음 10장 51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가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에 반응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셔서 바디매오를 불러주십니다.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실 수도 있는 ‘하찮은 거지’,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 바디매오이지만 예수님은 세상사람들이 하찮게 보는 사람이라고 해서 예수님께서도 보잘 것 없이 보지 않으시고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뭘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 때 바디매오는 그에게 있어 가장 절박한 현실적인 문제해결을 요구하였습니다. “선생님, 제가 눈을 떠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 사람이 요구한 것은 단지 육신의 시력의 회복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력의 회복과 아울러 정말 필요한 영적인 시력회복으로 예수님께서 영혼과 육신의 모두를 회복시켜주셨음을 성경 전체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단지 육신적으로 시력만 회복되었다면 이 사람은 복받은 사람이 아니라 저주받은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신약의 전체 맥락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예수님의 기적을 간증하며 동행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또한 육체적인 어려움만 해결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1편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안목으로 모든 인간을 살펴보시고 그들의 삶을 돌보십니다. 우리 또한 이제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가치관,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영적인 감각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안목이 제대로 회복되어져서 하나님의 백성의 가치관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영혼을 살피고 그들의 삶 내면의 안타까움을 기도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아야할 진정한 선물이 바로 이런 안목의 회복입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어느 날 아주 잘 생긴 돌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돌을 보고는 거의 미칠 지경으로 큰소리로 웃으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 다윗이 걸어나온다. 다윗이 걷고 있어.” 주변 사람들은 그를 보며 한심하게 생각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그 돌을 보면서 그 돌이 다듬어지고 깎여져 다윗상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앞에 놓인 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돌이 변화될 다윗조각상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생각과 눈앞의 이익을 안목으로 가지고 살아가니 우리의 욕망을 위해서만 살아가고 우리의 삶 앞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지금 당장 앞에 놓인 문제가 걱정하고 안절부절못하고 걱정과 염려속에서 살아갑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중동의 사막지역에서 텐트를 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베드윈족’이라는 유목민들이 있습니다. 1947년 어느 봄 날에 베드윈족 어느 목동이 이스라엘 사해 북서쪽 동굴지역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심심해서 돌 하나를 집어들어 어느 동굴로 던졌는데 동굴속에서 쨍그랑하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이 소리를 신기하게 여긴 목동이 그 동굴에 들어가보니 10개의 항아리들이 있었습니다. 항아리를 하나씩 열어보니 그 중 한 항아리에 글씨가 가득 적힌 가죽으로된 두루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뭐 돈 될만한 보석이나 먹을 수 있을 음식물이 나올 줄 알았더니 별 이상한 가죽 두루마리라며 투덜대면서 그것을 가져와 집에 걸쳐두었습니다. 나중에 그 가죽을 잘라 물병수선이나 신발끈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그 지역의 어느 방문자가 찾아와서 그것을 싼 가격에 구입하여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주전 2세기 정도부터 주후 1세기 사이의 사람들이 구약성경을 직어서 보관한 성경필사본 ‘사해사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현존하는 성경중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사본인데 보는 눈이 없었던 베드윈족 목동은 그것을 신발끈같은 하찮은 것으로 쓰려고 했던 것입니다. 수백 억, 수천억원의 가치를 가진 소중한 것을 보는 안목이 없으니 결국은 그 값어치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어쩌면 시각장애인처럼 안목이 어두워져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완전히 어두운 안목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오염된 안목으로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맹인인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보기를 원합니다라는 요청이 우리에게도 지금 필요한 간구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적 가치관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안목이 오염되어 제대로 인생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염된 세상적 가치관의 안목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진실된 영적인 안목으로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해 영적인 시력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다면 바디매오의 고백처럼 ‘이제는 주님을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시고 주님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정말 우리가 예수님의 귀한 선물인 “영적인 시력, 영적인 안목이 회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오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받으면 정말 기쁠 예수님의 선물 마지막 셋째는 구원이라는 선물입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을 만난 맹인 바디매오는 시력을 찾아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했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시력이 돌아오는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가 부탁한 시력회복에 대해 응답하시면서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가 받고 싶은 선물, 그가 받은 선물은 눈이 회복되어서 다시 보게 되는 것이었는데 결국은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본인이나 가족 구성원중에 어떤 고치지 못할 질병을 가지고 있어서 이 질병을 고쳐보고 싶은 의도로 병원을 찾아다녀보았지만 해결되지 않아 신앙적인 간절함으로 치료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교회를 찾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사업이 잘 안되어서 재산상 문제가 생겼는데 어떻게든 이 문제를 주님의 은혜로 해결해보려고 찾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 어떤 사람은 결혼의 문제, 어떤 사람은 진학과 학벌의 문제 등등 세상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시기를 바라며 교회를 찾아왔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본인이 들고 온 이런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기도하지 않거나 아예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문제는 해결받았지만 문제를 해결받은 것이 저주가 된 사람입니다. 진정 진정한 축복, 진정한 선물을 받은 사람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기도의 응답으로 이런 것이 해결받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더욱 신앙이 굳건하여지고 영적인 눈이 뜨게되어 천국을 바라보며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받아야할 가장 큰 선물은 바로 구원이라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고 확언합니다. “구원은 은혜로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인도에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 찌는 듯한 햇볕 아래서 못이 박힌 널빤지 위에 누워 있는가 하면, 일생을 벙어리로 살 것을 서약하는 사람도 있고, 수백 Km나 되는 곳을 기어서 순례 여행하기도 하며,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기도 합니다. 구원을 위한 이런 잡다한 행위를 그리스정교나 카톨릭에서조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위의 종교를 선호하며 따라갑니다. 뭔가 행동을 하고 구체적인 행동기준이 있는 것이 더 확신한 구원인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인간이 만든 종교적인 사슬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행위의 사슬은 사람을 힘들게 하고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두 사람이 해변에서부터 800킬로미터 떨어진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배에서 떨어져 어디로 갈 지 모르는 형편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국가대표 올림픽 수영선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둘 중에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수영선수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훌륭한 수영선수라도 마실 물이나 배를 채울 요기거리 없이 800킬로미터를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물에 빠진 소식을 알고 만약 구조 헬리콥터가 날아와서 이들을 발견하고 구명줄을 내려주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살아날 수 있을까요? 생명줄을 잡는 바로 그 사람이 안전하게 구조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해안에서 800킬로미터나 떨어진 장소에 있는 것처럼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다고 할지라도 완벽하게 선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좌절하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하지만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에 확신없는 삶을 살다가, 죽음에 앞서서도 자신의 내세가 어떻게 될 것인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입니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단 한 가지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에게 흠이 없기에 구원자가 필요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거부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구원자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길을 잃었으며 구세주를 필요로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인정하고 감사함으로 받은 사람만이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로마서 10장 9,10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선물보다 구원의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죽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갈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사실이며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맹인인 바디매오와 예수님의 만남속에서 우리가 받을 선물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나는 부족한 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내 스스로 뭔가를 해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해서라도 예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도록 나를 예수님께 끌고 나가야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내가 받을 수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예수님께 고백하고 도와달라고 외쳐야 합니다. 맹인인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해달라고 하는 것처럼 내가 어떤 도움을 요청해야하는 지 분명히 알고 나의 부족을 채워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해야합니다. 어떻게든 해결해주시기를 위해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응답이 나의 필요만 채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이어지고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고 주님의 위대하심을 간증하는 인생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을 만나서 인생가운데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맡겨드리면서 정말 나 자신을 낮추고 간절한 기대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것과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