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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히브리서 제2강
고난을 통한 구원의 창시자
말씀/히2:5-18
요절/히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우리는 지난주 말씀에서 예수님이 천사보다 뛰어나신 분임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요, 만물의 주관자로서 피조물인 천사와는 비교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탁월하고 능력이 많으신데 왜 그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렇게 고난을 겪으며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저자는 “탁월하신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는가?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오늘 말씀을 통해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은혜받고자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구약시대에 천사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기도 하고, 무서운 재앙에서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의식주와 같은 현실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장차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인간은 천사들을 섬기며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 이유는 장차 올 세상을 완성하는 데 천사들이 한 역할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장차 올 세상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의 희생을 통해 완성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면 장차 올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히브리인들이 잘 알고 있는 시편 8편을 언급합니다. 6b-8a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원래 다윗 왕이 쓴 시로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노래한 것인데, 히브리서 저자는 이 시편을 인용해 예수님이 겪으실 세 가지 일에 대해 말합니다. 이 시를 메시야 예수님을 예언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잠시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되는 일입니다. 둘째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움받는 일입니다. 셋째는 만물을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 일은 하나님이 친히 예수님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잠시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습니다. 잠시 성육신하시므로 인간이 되게 하셔서 인간이 겪는 고난들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잠시동안’이요, 때가 되면 예수님을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십니다.
아니, 그렇다면 만물이 예수님께 다 복종해야 하는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영광과 존귀 가운데 있다면 예수님 믿고 따르는 성도들 또한 영광과 존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인간과 만물이 통치권자이신 예수님께 복종해야 하는데 세상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시 성도들 상황에서는 오히려 예수님께 복종하기보다는 예수님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핍박받고 고난을 겪으니 다시 옛날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천하고 열등해 보이고, 차라리 천사가 더 탁월하고 멋있어 보였습니다. 고난 앞에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죽음의 두려움에 움츠러들며 신앙심이 흐려집니다. 이런 마음이 드니 유대인 출신 성도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당장 학교나 직장에서 만나는 불신자 동료들만 보더라도 예수님께 복종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면서 교회로 인도하려 해도 외면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세상 사람 중에는 예수님이 자신들 일상에는 아무런 도움도 못 주는 신화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때로는 무지몽매한 비판을 가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신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고 만유의 통치권자이신데 왜 이런 현실이 계속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혼란에 빠질 필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은 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속히 완성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이는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장에서 예수님이 천사들보다 훨씬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창조주임을 살펴봤습니다. 이 예수님이 천사들보다 잠시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사실 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낙차 폭과도 같은 정도의 엄청난 자기 비하이고 낮아짐입니다. 창조주가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과 같이 되신 것이고, 또 영존하시고 무한하신 분이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유한한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시고, 하나님과 동등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와 어둠의 세력에 고통당하는 우리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 친히 목마르고 배고프고 피곤하고 무시와 배척을 당하고 배신당하고 혼자 되는 외로움을 겪으셨습니다. 채찍에 맞고 창에 찔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인간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고난을 감당하고 죽임당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 출신 성도들은 고난과 죽음을 실패이고, 끝이요, 망한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으로 부활시키셔서 영광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물의 통치권자로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만물의 통치권자이신데 왜 무능해 보이냐고요? 왕이라고 해서 다 같은 방식의 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듯, 우리 예수님은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오래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인간들의 최종 심판과 구원을 결정하시고 그때 만유를 온전히 회복하십니다. 이런 왕, 이런 통치권자이십니다. 이렇게 하신다고 해서 ‘통치권자가 아니다, 무능하다’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의 십자가가 아니라 영광의 십자가요, 승리의 십자가요, 인간 구원의 대속의 십자가요, 하나님의 뜻을 위한 사명의 십자가가 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죄가 없으시므로 죽음과도 무관하신 예수님이 죽음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죽음의 고통에 두려워 떨고 있는 우리 인간을 위해서였습니다. 죽음은 어떤 사상이나 가치로 미화해 보려고 해도 나약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입니다. 저보고 지금 누가 죽인다고 하면 두렵죠. 여러분은 안 그렇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나라 소망이 있기 때문에 좀 덜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맛보실 죽음은 수백 번 이상 까무러칠 정도의 극심한 고통이 따르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에서의 쓰디쓴 죽음의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요즘 뉴스에 보니까 ‘난방비 폭탄, 전기세 폭탄’ 이런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물가상승은 IMF 이후 최대치라고도 합니다. 취업이 쉽지 않습니다. 장래가 불안합니다. 결혼도, 자녀교육도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 문제로 힘들어합니다. 또 자신의 죄 문제로 고통합니다. 개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고난과 아픔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런 고난들로 인해 생명, 소망, 비전, 열정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들을 자칫 잃어버린 채로 절망, 회의, 두려움, 무력감과 같은 어둠의 세력들로 병들어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천사가 구원해줄 수 없습니다. 천사는 함께 안타까워하며 위로해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변화된 새 인생을 살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천사가 우리를 대신해 어떤 고난도, 어떤 죽음도 맛보지 않았고 맛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나 교수님, 학교 선후배, 직장동료가 구원해줄 수 없습니다. ‘청년도약계좌’나 ‘사회적 상담 프로그램’을 비롯한 여러 사회적 제도가 일시적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완전한 길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9절을 다시 보십시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힘든 현실을 이해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100% 다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네가 나의 고통과 아픔을 알아?” 우리 인간은 죄악되고 이기적이어서 타인의 아픔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맛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구유에서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일생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면서 가진 것 없이 맨땅에서 발버둥쳐야 하는 흙수저 인생들의 고난과 어려움을 맛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배신당하는 아픔도 맛보셨습니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는 고통을 맛보셨기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침 뱉음 당하는 수치를 맛보시고 조롱당하는 아픔을 맛보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로 인한 수치심과 무거운 죄의식에서 해방되는 감격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맛보셨기 때문에 우리가 영원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예수님이 위에서 말한 고난들을 맛보고 죽음까지 맛보셨기 때문에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음을 말해 줍니다. 여기,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창시자 예수님을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감당하심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전무후무하게 인간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완전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감당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고난을 통해 구원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하심이 너무도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함께 하늘 영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왕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저자가 고난을 통한 영광의 예수님을 얘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현재 고난받고 있는 유대인 출신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현재 열악한 환경에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는 왕따를 당하고 이방인들에게는 핍박을 받으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많은 이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바치고 있는데 오히려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뭐라고 말합니까? “합당하다!” 왜일까요? 하나님이 구원의 창시자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라보고 붙들어야 할 것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은 말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기독교 복음 진리의 핵심은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이 없듯,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고난 없이 영광만 얻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천사처럼 좀 고상하고, 멋있어 보이고, 우아하게 하고자 합니다. 전도하는 것, 기도하는 것도 바쁘기도 하고 힘들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자 합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 구원받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도, 예수님을 영접한 양이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제자가 되기까지 돕는 것도 사람 관계라는 게 힘들기 때문에 고난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고난 없는 영광은 멸망으로 가도록 유혹하는 사탄의 미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고난’이라는 이름의 그릇에 담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오면 “왜 하필 나인가?” 서운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영광과 복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고난을 통한 영광을 얻으심으로 우리가 누리게 된 은혜는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과 형제가 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를 회개할 때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자녀 삼아주십니다. 이는 예수님과 우리가 다 하나님을 한 근원으로 한 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가장 먼저 나신 예수님이 맏아들이자, 큰형님, 큰오빠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동생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만 생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우리 인간들의 죄악됨과 비천함을 생각할 때 이런 우리를 동생들로 둔다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1b절을 보십시오. 놀랍게도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 신자들을 ‘내 형제들’이라 부르십니다(12). 마치 친동생들에게 말하듯 우리에게 주의 이름, 곧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알려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 즉, 하나님을 예배하러 모인 우리 성도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특송’을 한곡 하겠다고 하십니다(12). 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듯 예수님도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우리와 한 형제임을 선포하십니다(13). 더 나아가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이 예수님 자신에게 주신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형님, 오빠이고 우리는 동생들인데 어찌 또 자녀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이는 마치 맏아들이 부모님의 좋은 동역자가 되어 어린 동생들의 아버지가 되어 섬기듯 우리를 진정한 동생들로 맞아준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맏아들로서 우리에게 아버지 같은 큰형님, 큰오빠이십니다. 만유의 상속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라, 자녀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않으시니 세상에 이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보장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비천한 죄인들을 십자가 복음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형제요, 자녀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지극한 겸손을 생각할 때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라, 자녀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큰형님, 큰오빠 예수님이 부끄럽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큰형님, 큰오빠’로 영접하며 의지하고 힘써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혈육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죽으심을 통해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사탄마귀를 멸하기 위함입니다. 마귀는 범죄한 천사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를 넘보다가 땅으로 쫓겨나 어둠의 권세를 잡게 되었습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듯 세상의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를 멸하기 위해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사로잡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대신 죽음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머리를 박살내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죄를 범함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망의 권세를 잡은 마귀는 사망 권세와 두려움을 우리에게 심음으로 우리를 종으로 삼아버렸습니다. 마귀는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허무, 절망, 무의미 등의 사망 권세를 심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사망의 두려움에 얽매여 한평생 마귀에게 종노릇 하다 죽고 영원한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시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귀를 멸했다고 하는데 마귀가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즉시 멸해진 것일까요? 그러면 현재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고 있다는 말씀(벧전5:8)은 무엇일까요? 마귀는 아직 멸하여지지 않았습니다. 14절의 ‘멸하시며’는 원어를 직역하면 ‘무력하게 되다,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다’입니다. 마귀는 아직 존재가 소멸된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다 무력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을 믿고, 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 한해서만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귀와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엡6:12). 마귀는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지혜롭습니다. 단지,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신, 그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을 굳게 의지할 때 마귀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합니다. 죽음의 세력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 안에서 참 자유와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이 시험받는 우리를 도우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대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라틴어로 ‘제사장’이라는 말은 ‘bridge-builder’, ‘다리 놓는 사람’입니다. 곧 거룩하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아 화목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대표로서 그들이 지은 모든 죄를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들이 죄 사함 받도록 희생 제사를 드려주는 중보자입니다. 이런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의 연약함을 인내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사하는데 필요한 합당한 희생 제물을 바쳐 충성스럽게 제사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사랑이 많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 죄인들의 연약함과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으로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가장 합당한 제물인 당신의 몸을 몸소 십자가에 바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야말로 진정으로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 수 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이 받는 시험과 겪는 모든 고난을 몸소 경험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시험 가운데 있는 우리 모든 인생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으로서 지금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완벽한 변호자입니다. 이처럼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우리는 말 못할 고민들로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남모르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이해 못해 주는 고통, 고난들입니다. 절친이나 목자들도 공감해주고 들어주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완전한 변호자는 아닙니다. 인간이나 천사는 고난과 죄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울 수도, 피할 길을 가르쳐 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가 받는 모든 고난과 시험을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 내면의 고통을 잘 이해하시고 문제 해결의 길을 제시해주십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께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나의 모든 아픔과 고난을 주님께 토로하는 것입니다. 나의 아픔과 고난들이 이해되지 않고 머리 아프고 스스로는 잘 정리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은밀한 주님과의 데이트는 우리에게 큰 힘과 능력이 되어줍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인생 문제들과 고난과 세상 유혹과 시험들 가운데 자비롭고 신실하신 대제사장 예수님께 나아가므로 주님의 도우심을 얻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합니까? 예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고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의 한 형제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와 새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분명한 확신 가운데 따르며 주님의 도우심의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신앙생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