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도 원수도 사랑하라!(마5:38-48)
갈등
1.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복음을 전하고(전도), 가르치시고, 그리고 치유하시는(인생의 문제를 직접 풀어주심) 일을 반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한 가지에 치우치기 쉽지만, 주님은 세 가지를 적절히 균형 있게 하셨어요. 오늘 본문은 주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신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팔복을 시작으로, 율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몇 가지 예를 들어 가르쳐주셨어요.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들은 어떤 것은 쉽고 보편적이지만, 때로는 난해하고 도무지 알 수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의 가르치심 가운데에서 이해하기도 어렵고, 순종하기는 더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기에 이해하기도 어렵고, 순종하기도 어려운지 봅니다. 38절,“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은 구약의 말씀은 출21:23-25,“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을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발은 발로.”그들이 너무 잘 듣고 알았던 말씀이에요. 구약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 계명은 복수를 하라는 말씀일까요? 하나님께서 복수를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2. 모세 당시에 남에게 해를 받은 사람들이 자기가 받은 상처보다 심하게 복수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 화평하고 다툼이 없이 서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세요. 어느 부모도 자식들이 서로 싸우고 불행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율법해석을 올바로 해주셨어요. 주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동해복수법)을 어떻게 해석해주셨습니까?
39절,“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주님의 재해석)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구약의 말씀, 동해복수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몇 배로 갚아주고 싶은 것이 사람들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술 더 뜨셨어요.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대적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하지만, 악인을 대적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악이 더 극성을 부립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떠나서 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갈등 심화
3. 대적하지 말라는 맞서 싸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은 악한 자와 맞서 싸우지 말라, 또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어요. 39절 하반절-42,“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주며 거절하지 말라.”
나를 괴롭히는 원수에게 보복을 하지 않고 외면하고 무관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수동적인 자세로만 있지 말고, 능동적으로 더욱 친절하게 대해주라고 말씀하셨어요.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편도 때려달라고 하고. 속옷을 달라면 겉옷도 가져가라고 허락하라고요. 그냥 바보가 되라는 말씀 같습니다. 말씀이 너무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어느 희귀한 문학작품에서나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왜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주님의 말씀대로 하면, 악은 더 성행하고 바보들의 세계가 될 것인데요.
4. 언제부터 신문과 방송에 낯선 말이 등장했습니다.‘묻지마 폭행.’전혀 알지 못하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무차별 폭행했다는 뉴스에요. 맑은 날에 날벼락을 맞는 격입니다. 참 끔찍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악하여지며 이런 범죄까지 나타나고 있어요. 대표적인 사건이 지난 5월 부산 돌려차기 남자, 또는 부산 오피스텔 여자 폭행 사건입니다.(도심에서 일어난 사건, 서면-부전동에서) 한 남자에 의해 폭행을 당한 20대 여성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어요. 재판을 통해서 이 남자가 중벌을 받겠지만, 피해자의 몸과 마음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런 범죄가 나타난 것은 현실불만형, 만성분노형, 분노조절 장애 등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병리 현상은 갈수록 심해질 수 있어요. 이런 악인들을 대항해서 싸우고, 징계하고, 악을 제거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주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44절,“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은 이 땅에서 발붙일 수 없도록 제거하고, 징계해야 하는데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어요. 주님은 왜 우리가 도무지 알 수도 없고,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을까요?
실마리
5. 예수님은 우리 생각과 마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45절,“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주님이 산상수훈에 가르쳐주신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에요. 주님은 그 이유를,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지만, 악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악인과 불의한 자에게도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며-그래도 내가 너희를 돌보고 사랑하다고 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가 악순환에 빠져 스스로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세요. 우리 인류의 형편이 더 나아지기를 원하세요. 이것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말씀하실 때 상황과 같아요. 요즘 우리 교회가 금요기도회 때 출애굽기의 율법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율법이 무엇인지 깊이 배우고 있습니다. 율법은 딱딱하고 재미없고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는 출애굽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출애굽은 세계사에서 나타난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이때만 있었던 놀라운 역사에요.
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극진한 사랑 가운데서 애굽을 떠나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왕이 엄청난 대가지불을 한 후에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보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요. 마지막에 장자재앙을 통해서 바로 왕이 하나님께 굴복했어요. 이스라엘이 스스로 출애굽을 하고 자유 민족이 된 것 아니고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신분이 변하였어요. 이제는 애굽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자유 시민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 시민답게 살아가도록 삶을 가르쳐주셨어요. 이 가르침이 율법이었습니다. 동해복수법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내 백성은 이 정도는 지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법도가 되었듯이, 산상수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나라 윤리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을 요구합니다.
7.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구분됩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이런 수준의 삶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에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하여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에게, 산상수훈과 율법은 억지로 따라야 하는 무거운 짐이 아니에요. 도리어 구원의 기쁨 속에서 즐거이-기쁨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복음 제시
8. 예수님은 모든 가르침 가운데, 모든 본을 보이셨습니다. 헬라의 철학자들과 같이-현대의 교사나 교수들과 같이 지식만 가르치지 않으셨어요. 주님은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모든 것에 본을 보이셨어요. 주님은 오늘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것처럼, 친히 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반대하고 죽이려고 했던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 종교인들을 끝까지 품으셨어요.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마23:37) 물론 유대 종교인들은 이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주님의 사랑을 외면하면, 우리의 인생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는 유대 종교인들과 로마 군병들을 향하여서 기도하셨습니다.“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주님은 제자들이 보다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셨어요. 주님은 제자들이 변화되는 기대감을 가지고 당부하셨어요. 46-47절,“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주님은 우리의 이웃만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고 친히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대
9.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시며 결론으로 48절,“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능력만 아니라 인격에서도 완전하세요. 주님은 우리를 향한 특별한 기대감을 감추지 않으셨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도록요. 옥한흠 목사님이 생전에 부모의 기대감을 말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감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 입시가 다가오는 고3 자녀가 있었습니다. 이 자녀는 서울대학교에 갈 실력이 없었어요.
부모도 그것을 알지만, 부모는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 자녀를 향한 기대감을 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변화되고 자라기를 포기하지 않으세요.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자의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이에요. 이때 제자라는 말의 새로운 대용어가 나타났어요. 그것이 온전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산상수훈을 따라 사는 자들이 온전한 사람,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10. 우리의 완전한 스승은 예수님 외에 없습니다. 그 어느 목회자나, 철학자, 교수 누구라도 우리의 스승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를 잠시 도울 수 있지만, 우리의 유일한 스승은 예수님 뿐입니다. 우리는 그의 제자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제자에 머물렀고요. 우리가 주님의 온전한 제자라면, 주님과 같이 이웃만 아니라 원수도 사랑해야 합니다. 제게 성령님이 임하시고, 교회 개척을 하기 3년 전에 저를 연단하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셨어요. 열 명의 장로님들을 사랑하고 축복한다고 입술로 선포하며 기도하라고. 쉽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무거운 마음으로 입술로 선포하기 시작했어요. 이 기도가 반복되며, 제 마음에 장로님들을 바라보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어요. 그들은 나의 라이벌이 아니고, 목자인 내가 불쌍히 여겨야 할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이 마음이 생겼을 때 하나님께서 제게 교회 개척의 기회를 주셨고, 개척 4년 만에 교회 건축과 선교를 하는 교회로 자라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 다 같이 일어나 찬양하며, 오늘 내 마음에 감동에 주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오늘 6.25 기념주일이기도 한다.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서로 다투고 싸우지 말고, 하나가 되도록.(오늘 찬양: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