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YRE Massachusetts
맨발의 ‘제인 에어’
Barefoot Jane in Ayre
2
“주인아저씨가 나를 꼼짝 못 하게 가두고 일만 시켜요. 도와주세요. 아저씨!”
내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자 그녀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 팔에 난 상처를 보여주었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흉터 자국이 분명했다. 레깅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거기에는 검게 멍든 반점이 두 군데나 있었다. 계속해서 그녀는 옆구리 쪽을 만지며 조그맣게 말했다.
“여기는 칼에 베인 적도 있어요!”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인아저씨가 이 마을에서 이거예요.”
그녀가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짱이라는 말인가? 얼짱? 몸짱? 아니면 대장? 두목? 깡패? 조폭?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인신 매매단에 붙잡혀 온 걸까?
“경찰에 연락하지 그래요?” 내가 간신히 대답하였다.
“제 신분이 그래서 그렇게는 못해요.”
신분이 그렇다는 것은 불법체류의 의미로 해석했다. 그녀는 수시로 커피숍 쪽을 살펴보았다. 마치 감시당하는 것 같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린카드나 영주권이 없는 유학생이나 동포를 값싼 임금을 주며 노동착취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어도 폭력을 휘두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동네 한국 사람들은 모두 주인아저씨 편이에요. 제가 도망가면 모두 주인아저씨에게 일러바쳐요. 도망갔다가 잡히면 죽도록 얻어맞아요.”
몸에 난 멍든 상처를 보았으니 그녀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게가 밤 12시에 문 닫으니까 밤중에 몰래 나와서 공장으로 갈게요. 트럭에 태워만 주세요. 어디든 아무도 모르게 도망가게 꼭 좀 도와주세요! 네? 제발 부탁해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녀는 얼른 트럭에서 내려 커피숍으로 황망히 걸어갔다. 그녀는 내가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가버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 같은 사건이지? 세인트 마리아님이 도와주실 때까지는 운이 좋았는데 이제 엉뚱한 사건에 괜히 휘말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겁이 덜컥 났다.
나는 사고를 일으키고 뺑소니치는 심정으로 트럭을 운전했다. 타운을 벗어나자마자 겹으로 된 철망이 나타나고 길은 남쪽 방향으로 구부러졌다. 포트 데븐스라는 이름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개리슨 미군 기지의 정문을 지나자 군부대 남쪽으로 큰 건물의 공장들이 보였다.
화물을 싣는 동안에도 여전히 머릿속은 온통 그 여자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자유와 기회의 나라라는 미국에서 정말로 인신매매단이 존재하는가? 사람을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아 놓고 일을 시킬 수 있는 일이 가능한가? 영화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아니면 내가 너무 순진한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절박하고 진지했다. 상처와 멍자국, 또 배에 난 칼자국을 생각하면 섬뜩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오늘 밤에 트럭으로 찾아올까? 만약에 그녀가 찾아온다면 진짜 태워줘야 하나? 그동안 아메리카 대륙에서 만난 그 어떤 사고나 사건보다 더 황당하고 난감한 상황에 맞닥뜨렸다.
처음엔 커피숍이 외삼촌 가게라고 했는데 부를 때는 ‘주인 아저씨’라고 했다. 또 ‘이 동네에서 이거예요!’하며 엄지를 보여 주었다. 이 마을 한국사람 중 가장 힘이 세거나 엄청난 권력이 있음을 의미한다면 과연 그게 뭘 뜻하는 걸까?
화물 상차를 마치고 공장 주차장 한쪽에 트럭을 세웠다. 잘 준비를 하였지만 잠들 수가 없었다. 그 아가씨가 과연 올까? 커피숍에서 여기 공장까지 차로 5분도 안 걸리지만 걸어서 온다면 30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 못 자며 뒤척거리다가 12시가 훌쩍 넘었다. 새벽 1시가 넘어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문득 에어AYRE라는 타운 이름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샬럿 브론테가 170년 전에 쓴 세계명작이자 고전인‘제인 에어’(Jane Eyre)때문이다. 줄거리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제인 에어는 고아가 되고 숙모에게 맡겨지고 학대를 당하다가 어느 날은 잘못한 벌로 '붉은 방'에 감금되기도 했던 대목이 불현듯 떠올랐다.
마치 커피숍 아가씨가 외삼촌에게 붙잡혀 학대를 당하고 있으니 제인 에어와 비슷한 처지가 된다. 이거 정말 우연처럼 기가 막힌 운명이지 않은가? 결말은 아직 모르지만 비운의 주인공을 매사추셋츠주의 조그만 타운 에어에서 만나다니?
똑똑똑,
번쩍 눈을 떴을 때는 어두운 밤이었고 트럭 안이었다. 제인 에어의 줄거리를 따라 운명과 사랑을 생각하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깜박 잠들었나 보다.
똑똑, 다시 트럭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 제인 에어가 서 있었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로체스터를 다시 찾아온 제인 에어의 실루엣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니 빨간 티셔츠에 검은색의 레깅스 바지를 입은 커피숍의 그 아가씨가 정말로 찾아왔다. 깜깜한 밤길을 혼자 걸어서 왔다. 간신히 트럭에 올라서는 그녀는 놀랍게도 맨발이었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나에게 기대며 고꾸라졌다. 그녀의 목덜미에서 나는 살 냄새보다 먼저 강하게 풍겨 온 것은 지독한 술 냄새였다. 그녀는 만취해 있었다. 이 밤중에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더구나 맨발이었다. 신발은 어디에 내동댕이쳤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의 어깨에 매달린 큰 숄더백을 한 손으로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아저씨가 이걸 꼭꼭 숨겨 놓고 있어서 찾느라고 시간이 오래…….” 혀가 꼬부라지는 순간에도 가방을 놓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은 그녀의 여권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인신매매하는 범죄단들이 하는 일이 바로 여권부터 뺏어서 감춘다고 들었다.
주절거리는 그녀의 말과 행동은 오늘 밤 여기에 오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 완전히 술에 취한 그녀, 아마 주인아저씨와 거창하게 술판을 벌였겠지. 외삼촌 아니 에어에서 캡틴이라는 주인아저씨를 재우기 위해 술을 잔뜩 먹이고 본인도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방을 뒤져 여권을 찾아서 비틀거리며 여기까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달려왔을 것이다. 신발조차 챙길 시간 없었든지 아니면 정신없이 달려오다 신데렐라처럼 잃어버렸든지...
불쌍한 여자, 위험에 빠진 여자. 이 여인이 바로 비운의 제인 에어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녀는 횡설수설 되는대로 말을 쏟아 냈다.
“아저씨이, 이 동네는 말이에요. 웃기는 동네에요. 나 웃겨서. 계급이 있어요. 한국 사람들 사이에도 대장이 있고 부하가 있어요. 주인아저씨가 퇴역한 장군이래요, 군에 있을 때 사령관이래나 대령이었대나, 뭐 그래요. 그래서 모두 주인아저씨한테 꼼짝 못해요. 웃기지요?”
침대에 앉히자마자 옆으로 픽 쓰러졌다. 흐드러진 가슴골이 슬쩍 보이고 하얀 맨발까지 그대로 내놓은 종아리와 검은색 레깅스 바지 위로 허벅지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곡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트럭 안에 낯선 여자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어처구니없고 난처한 상황이면서도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침대 위에 쓰러진 그녀를 보며 만 가지 생각이 상상되었다.
매사추세츠주의 군부대 옆 한국식품이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한 여자가 도움을 요청했다.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외삼촌이라는 주인아저씨, 대령이라 출신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여권을 뺏고 일을 시켰을까? 진짜 주먹을 휘두르는 폭력배란 말인가? 정말 일만 시켰을까? 다른 일은 없었을까?
맨발의 제인은 침대에서 엎드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엉덩이의 곡선에 시선이 닿았다가 얼른 거두어들였다. 괜한 오해라도 있을까 두려웠다.
에어의 밤은 깊어만 가고 나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뜬눈으로 지새우다시피 했다. 별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는 어스름한 새벽,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트럭을 출발했다. 누군가 쫓아 올 것 같은 불안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동네 사람 모두 그녀를 감시한다고 했고 잡히면 죽도록 맞는다고 했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혹시라도 따라오는 차량이 있는지 살폈다. 트럭 뒤를 따라오는 듯한 차량이 있으면 일부러 속도를 낮추어 추월을 유도하고 지나가는 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확인했다. 두 시간 가량 매사추세츠주의 턴파이크를 달려 블랜포드 서비스 플라자에 도착했다. 200킬로미터를 달려 왔으니 어느 정도 안심했다. 그때까지도 침대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달리는 트럭 안에서 잠을 자는 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주 편한 꿀잠을 잔다. 묘하게 흔들림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아침 해는 이미 완전히 솟아올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트럭이 정차하자 뒤에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일부러 돌아보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할 말도 찾지 못했다.
“아저씨, 지금 어디에요?”머리를 매만지며 그녀가 물었다.
“블랜포드 휴게소인데, 이제 안심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녀가 고개를 내밀어 힐끔 밖을 쳐다보았다.
“이제 세수도 하고 아침도 먹어야지요.”
“어디서 세수해요?”
“네, 휴게소 화장실에서 합니다. 세수하고 이 닦고 볼일도 보고…….”
그녀는 별로 놀랍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눈동자는 재빠르게 이쪽저쪽을 살폈다.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자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매만졌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픈 표정이었다. 휴게소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아침을 사 먹을 생각이었지만 그녀를 보고 라면을 끓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내가 신는 슬리퍼를 꺼내 주고 우리는 나란히 휴게실 화장실로 향했다.
먼저 트럭으로 돌아온 나는 전기밥솥에 물을 올렸다. 평소에는 밥솥에 라면을 끓이지 않는다. 설거지가 아주 귀찮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에 물을 끓이지만 좀 더 진한 국물 맛을 내기 위해서는 전기밥솥이 더 좋다. 작은 밥솥이므로 라면 2개는 무리고 하나 반이 적당하다. 물이 끓고 라면을 넣자 그녀가 돌아왔다. 촉촉해진 얼굴에 산뜻함이 배어 나왔다. 나이가 어린 줄 알았는데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고마워요. 이렇게 태워주셔서.”
“아니 괜찮아요.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나는 뉴욕 알바니에 가면 북쪽 캐나다로 가거든요.”
설마 국경까지 함께 넘을 일은 없을 것이다. 여권만 가지고 불법체류 신분으로 캐나다 입국에는 문제가 있을 테니까.
“가다가 아무 데나 내려 주시면, 저는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갈게요.”
라면이 끓기 시작했다. 라면 한 개 반을 나누어 먹었다. 국물까지 깨끗이 비웠다.
“아, 정말 맛있어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매사추세츠 턴파이크에서 스프링 필드로 빠져나왔다. 그녀가 가까운 쇼핑센터에 들를 수 있는지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월마트가 있는 플라자 안으로 사라졌다.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불길한 마음에 조바심이 나 자꾸만 입구 쪽으로 시선이 갔다. 혹시 다시 붙잡혀 가기라도 한 걸까?
한 시간이 지나자 비로소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 만에 돌아온 그녀는 완전히 다른 여자가 되었다. 방금 쇼핑한 듯한 깨끗한 하얀 티셔츠, 하늘색 운동화, 검은 선글라스까지 끼고 나타나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손에 여행용 손가방과 파우치를 들었고 어젯밤에 들고 왔던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했던가! 짙은 화장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여겨졌다. 머리를 올리고 헤어핀 리본으로 고정시킨 그녀는 따사로운 햇볕처럼 화사했다. 맨발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달려 온 제인 에어가 아니었다. 여전한 것이 있다면 풍만한 히프와 다리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스포츠 레깅스를 입고 있다는 것, 물론 새로 산 것이지만.
운전하는 내내 나는 어색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묻고 싶은 말을 많지만, 함부로 물어보기가 어려웠다. 그녀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 해 하는 것 같으면서도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 형언할 수 없는 괴리감을 느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 무엇으로부터 도망가는 여자니까......,
‘나는 지금 위험에 빠진 여자를 구했어. 제인 에어처럼 자신의 길을 찾아 갈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거야!’
스스로 대견하고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 어디로 갈 거예요?”
그냥 물어본 말이지만 바로 후회했다. 도망쳐 나온 여자가 자기가 가는 곳을 알려 줄 리가 없다. 그래도 갈 곳이나 있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알바니에 저를 내려주시면 제가 알아서 갈게요 .”
“갈 데는 있는 거요? 샌프란시스코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네, 친구가 거기에 있어요. 하지만 일단은 남쪽으로 가려구요. 아무 데나 가서 생각해봐야 할 거 같아요.”
운전 내내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알바니 트럭 휴게소에서 내린 그녀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운 사람처럼 나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고 할 말도 찾지 못했다. 그녀가 가방에서 무엇을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종이에 급하게 싼 둥그런 모양의 통이었다. 그리고 사람들 틈에 끼어 주차된 차량 사이로 길을 건너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짧은 만남이지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그렇게 가버렸다. 아직도 검은 레깅스의 아찔함은 망막에 선명하게 남았다. 행여나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 어디에선가 만날 수도 있겠지. 그녀는 나에게 조그만 선물로 빨간색 커피 머그잔만 주고 사라졌다. 이름도 성도 모른다. 그냥 내 기억 속에 맨발의 제인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어느 하늘 아래에 가서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했다.
그 후로 2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리고 우연히, 정말 우연히 개리슨 미군기지가 있는 포트 데븐스를 가게 되었다. 에어Ayre 바로 옆 동네다.
미니슈퍼마켓 그리고 다방이라고 써 놓은 커피숍, 그 가게가 궁금해졌다. 물론 기억 속에는 강하게 남아 있는 맨발의 제인은 그곳에 없다. 아직도 술에 취해 내 침대에 쓰러졌던 그 몸매, 그리고 쇼핑센터에서 화려하게 변신했던 산뜻한 그녀의 모습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혹시라도 지난 2년 동안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태워준 범인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는 않았을까? 그 외삼촌 아니 대령 출신이라던 주인아저씨는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설마 나를 알아보지는 않을 것이다. 궁금증은 정말 참기 어려운 법. 도저히 그곳에 가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2년 만에 다시 상가 앞 길가에 트럭을 세웠다. 슈퍼마켓은 여전히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다방이라고 쓰인 커피숍은 불이 꺼져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았는데 들어가거나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트럭을 나와 한국 식품점으로 들어갔다. 아줌마가 카운터에 앉아서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다방이 오늘 쉬는 날이에요?”
내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쉬기는......, 문 닫았지.”
“어? 왜 문 닫았어요? 장사가 잘 안 되었나요?”
“대령님이 자기 건물인데 장사 안 된다고 닫을 리가 있나? 그놈의 망할 년 때문이지.”
“네에!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아, 글쎄. 한 이태 전에 일하던 젊은 여자가 싹 발라가지고 도망갔어. 대령님이 오갈 데 없는 처지라고 해서 커피숍에서 일하면서 먹고 살게 해 주었는데 그 여우같은 년이 하룻밤 새에 귀신처럼 사라졌지 뭐야? 글쎄. 하, 나 참 세상에 별일이 다 있었어. 임신중절로 애까지 낳은 여자를 불쌍하게 여기고 봐 주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그년 짐승만도 못해. 세상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니까. 요즘은 한국 사람이 더 무서워.”
“그런 일이 있었군요. 조카라고 안 했나요?”
“조카는 무슨 얼어 죽을? 금고를 열고 금반지 패물은 물론 퇴직금까지 몽땅 훔쳐 달아났다고. 그래서 지금 이 대령은 집에 없어, 화병이 나서 그년을 잡겠다고 미국 땅을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고 있어. 당연히 커피숍도 닫았지.”
하늘이 하얗게 변했다. 세인트 마리아님,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다니? 젠장,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나는 순진한 것이 아니라 바보천치다. 트럭으로 돌아온 나는 빨간 커피 머그잔을 꺼내 돌바닥에 세게 내동댕이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며 깨졌다.
멍청한 트럭 드라이버! 천하에 바보!
아무리 해도 소용없는 것이 바로 후회다. 끓어오르는 분노는 달랠 수가 없었다.
이제 나는 아메리카의 한국인으로 한국인이 아닌 눈으로 다른 한국인을 보게 된다.
그 날 이후, 나는 운전하다가 레깅스를 입은 여자만 보면 반드시 돌아보고 확인한다. 나는 북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는 트럭 드라이버다. 젊은 여자의 다리를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음흉한 트럭 운전사라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굳이 레깅스 입은 여자만 돌아보는 이유는 바로 맨발의 제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맨발의 제인 에어 Barefoot Jane in Ayre
끝
|
첫댓글 울프강! 잘 지내셔? 자네의 재미난 단편소설, 잘 읽었어.
늘 그렇지만, 긴장미가 넘쳐. 플롯(구성)도 기발하고.
언제나 자네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할게. 잘 지내.
어부인께도 안부 전해 주시고. 우천 배
힘을 실어 주니 고맙고.
워낙 조용하게 사니 별일 없는데,
자네의 고향에서 사는 이야기 잘 보고 있네.
아이고~ 세상에나 망상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