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세계는 넓다-19
조철봉의 관점에서 남녀의 관계를 논하라면 현재와 미래, 그다음이 과거의 순서로 시간대별 정리부터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것은 현재인 것이다. 그 다음이 미래이고 과거는 지난 일이니 죽은 자식 나이 세는 것이나 같다. 따라서 과거의 행적은 믿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다. 예를 들자면 현재에서 가슴이 아리도록 좋아하며 지냈다가 천재지변같은 사연으로 헤어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과거가 된다.
조철봉이 또한 의심스러워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물론 사기성이 강한 본인의 주관이 작용했기 때문이겠으나 잃거나 헤어진 상대를 시간이 지날수록 애달프게 그린다는 사연이다. 시간이 지나면 배를 갈라 수술을 한 흔적도 엷어지는 것이 현실인데 가슴속이나 머릿속에서 만져지지도 않는 그 모호한 덩어리가 뭉쳐져서 암이라도 된단 말인가?
다 거짓말이라고 조철봉은 믿었다. 상처는 안이나 밖이나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나아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야 인간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천재지변으로 헤어졌던 상대가 5년 내지는 15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면 그 공백기간 동안의 사연은 대충 넘겨 뛰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상대가 당신만을 그리며 그 기간동안 수절을 지켰다고 해도 감동을 먹지 않을 것이었고 그동안 수없이 상대를 갈아 치웠다고 해도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었다.
진실한 사랑은 현재로만 확인해도 과분한 것이다. 사우디 공사현장에 나가 있는 몇년동안 마누라가 끓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서 밤마다 남자를 바꿔치기 했다고 손에 도끼를 들고 나댄다면 저만 비참해진다. 그것은 서경윤으로부터 익힌 생교육이 되겠으나 눈앞에서 배신을 하지 않는 이상은 덮어버리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낫다고 조철봉은 믿었다. 과거인 것이다.
사우디에서 돌아온 후에 현실에 부딪친 마누라가 착실한 행세를 해준다면 조철봉의 경우에는 넘어가 버릴 것이었다. 조철봉이 다시 클럽으로 들어섰을 때는 유경을 먼저 내보낸지 5분이 지난 후였고 정확하게 자리를 비운지 49분만이었다. 항목별 소모된 시간을 계산하면 지연과의 섹스에 12분30초에다 기타 시간이 5분정도, 그리고 유경과는 15분40초에 기타가 7분이었고 나머지는 기다리거나 왔다갔다한 시간이다. 자리에 앉았을 때 예상했던대로 문수가 눈을 치켜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야, 이 자식아. 화장실에 간다는 놈이 한시간이 되도록 어디 갔다가….”
그러자 옆쪽에 앉아 있던 유경이 조철봉에게 눈을 흘겼다.
“어디 갔다 온 거예요?”
“아, 갑자기 배가 아파서 약국에 다녀오느라고.”
의자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흘끗 지연의 눈치를 보았다. 지연은 시치미를 뗀 채 옆얼굴을 보이고 있었는데 의연했다.
“그래, 이젠 나았어요?”
옆쪽에 앉은 희영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아, 이젠 괜찮은데.”
그때 희영이 테이블 밑으로 조철봉의 다리를 구두 끝으로 툭 찼다. 놀란 조철봉이 머리를 들었으나 희영의 얼굴은 유경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술잔을 쥔 조철봉은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유경과 지연은 만나서 같이 들어왔겠지만 서로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연은 유경이 분명히 자신과 섹스를 했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유경은 지연이 꼬드겨도 안넘어 갔다고 했으니 저 혼자서 즐긴 것으로 알 것이다. 그때 문수가 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나가자. 김이 새버렸다.”
/ 글 이원호
(498)세계는 넓다-20
게재 일자 : 2003-08-14 14:39
나가자고는 문수가 했지만 술값 계산은 조철봉이 했다. 호텔 현관을 나왔을 때는 밤 11시40분이 되어 있었는데 맑은 밤공기를 들이마신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밤이 짧구나.”
그때 옆에 서있던 유경이 흐드득 웃었다. 차를 기다리던 문수는 입술을 더 내밀었으며 지연의 옆얼굴은 무표정했다.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눈앞에 지연의 희고 살찐 엉덩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후배위로 일을 치렀기 때문에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탄성과 뒤틀림은 지금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다. 그때 뒤쪽에 서있던 희영이 조철봉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섰다.
“내 차 타고 가.”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희영이 입술끝만 비틀고 웃었다. 그러나 당당하게 말했다.
“나하고 데이트 해.”
“좋지.”
어깨를 편 조철봉이 문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문수는 벌써 그 말을 듣고 이쪽에다 시선을 주는 중이다.
“야, 나, 이쪽 차 타고 간다. 그런데.”
조철봉이 지연을 보았다.
“지연씨, 저쪽 차 타고가요. 유사장이 데려다 줄거요.”
“싫어요.”
했지만 지연의 시선이 희영부터 유경까지 재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유경이 나섰다.
“얘, 데려다 준다는데 타지 그래? 그럴거 없잖아? 이쪽 차는 좁은데.”
“그래, 타고 가.”
하고 희영이 거들었고 문수도 한걸음 다가와 섰다.
“탑시다, 모셔다 드릴테니까.”
“어서 타, 얘.”
유경이 이제는 지연의 어깨까지 밀었다.
“그럼 유사장님, 지연이 잘 부탁해요.”
마무리를 하듯이 희영이 인사까지 했을때 마침 문수의 차가 앞에 와 섰다. 대리운전자가 운전하고 있었으므로 문수는 뒷좌석에 올랐고 입술을 꾹 다문 지연도 마침내 따라 탔다.
차가 호텔 정문을 나갔을 때 희영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하긴 대줘도 못먹는 병신이 있긴 해.”
“쟨 맛도 없을 거야.”
유경이 씹어뱉듯 말을 이었다.
“내가 남자라면 저런 건 안 먹어.”
“그래?”
하고 희영이 조철봉을 향해 머리를 돌리고 물었다.
“철봉씨도 그렇게 생각해?”
“글쎄, 나는.”
“청탁불문이야?”
그때 희영의 벤츠가 도착했고 역시 대리운전자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뒤에 둘이 타.”
하면서 유경이 먼저 앞쪽 문을 열었으므로 조철봉과 희영은 뒷자리에 올랐다.
“논현동으로 가주세요.”
운전사에게 말한 희영이 다시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나가서 지연이 손 안댔어?”
“그게 무슨 말이야?”
조철봉이 눈을 둥그렇게 떴을 때 이번에는 유경이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눈은 치켜뜨고 있었지만 입술끝은 웃는 것처럼 위쪽으로 올려진 모습이다.
“바른대로 말해, 15분동안 실랑이만 하다가 보냈을 리가 없어.”
그러자 희영도 거들었다.
“말해, 쥑이지 않을테니까.”
“그래, 먹었어.”
그러자 갑자기 유경이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먹었다지 않아?”
/ 글 이원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