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7월 창의포럼에서는 예측불허 가짜 인턴 사원에서 세계 4대 디자인상을 석권한 세계가 열광하는 산업디자이너, KAIST ‘배상민 교수’를 초청했습니다. 그는 남성머리로는 다소 긴 파마머리에 자신이 디자인한 검은색 원피스속에 검은바지를 입고, 맨발에 샌들을 신은 모습으로 우리앞에 나타났습니다. 정통적인 교수 스타일과는 거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 이야기를 시작하며... >
1시간 반 정도 자고 오늘 아침 일찍 대전에서 출발해서 KIST에 왔다. 난 보통 학교에 10시 반쯤 출근을 한다.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다. 나와 같은 사람을 부를 때는 저녁 8시에 불러달라. 난 과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KIST에 들어서는 순간 좋은 환경에 많은 에너지를 받아 마음이 푸근하다. 오늘 강의가 잘 될 것 같다.
< 파슨스디자인학교 & 카이스트 >
2005년 카이스트에 와서 10년이 되었고 뉴욕에서 14년을 살았다. 8년 동안 파슨스디자인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파슨스는 마크제이콥스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가 강의를 하는 학교다. 세계최고의 우뇌들이 모인 집단이다. 그런데 난 이곳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 파슨스의 교수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자기가 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그 일에서 대박을 내는 사람들이다. 난 대한민국에서 파슨스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다. 파슨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우뇌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어떻게 미쳐야 되는지 그 방법을 배우고 누가 제일 미쳤느냐로 1등을 가리는 곳이 파슨스다. 파슨스의 교수들은 great, 환타스틱, 엘레강스 등 단순한 말만 되풀이할 뿐이지 가르치는 것은 없다.
반면, 카이스트는 최고의 좌뇌 집단이다. 카이스트에 디자인학과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카이스트 창립때 부터 산업디자인학과가 있었다. 우리나라 대학 최초로 산업디자인학과를 개설했으며 역사가 40년이다. 나를 포함해 풀타임 교수 10명이 있다. 그러나 디자인을 해본 사람은 나 말고 없다. 페이퍼와 저널을 내는 사람들 뿐이다. 처음에는 그런 그들이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하고 무시했었다. 그런데 디자인을 기가 막히게 잘 가르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난 우뇌집단에서 14년을 보내고, 좌뇌집단에서 10년, 도합 24년을 극과 극의 집단에서 엄청 헤매며 살았다. 두 집단의 접근방법은 완전히 다르지만 창의성을 추구하는 것에서는 똑같다.
< 변하는 카이스트 >
디자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의성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카이스트는 교수로 부임하면 자신의 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 카이스트 하면 어떠한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전에는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뭐 그러한 이미지였는데 카이스트가 많이 바뀌고 있다. 뉴욕에서 27살에 교수가 되었다.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어 디자이너라고 대답하면 ‘아하~~헤어디자이너’ 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내가 하는 가게(헤어샵)가 어디에 있냐고 물어온 적도 있다. 과학이나 예술에서 이노베이션이 필요할 때 극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성실함과 우등생의 머리만으로는 안된다. 돌발적 창의성이 필요하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에서 미스코리아가 3명이 나왔다. 어디든지 돌발적인 창의적 인재가 필요한 시대다. 내가 카이스트 교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 3D 와 3H >
'ID+IM'은 나의 연구소 이름으로 ‘나는 디자인한다. 고로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꿈꾼다(Dream) 고로 존재한다. 나는 디자인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나눈다(Donate) 고로 존재한다-를 근거로 만들었다. 여기서 3D (dream, design, donate)가 나왔다. 뉴욕에서 14년을 살며 유명한 거장들을 만날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3H인데 첫째는 Heart이다. 70세가 넘은 거장들도 끊임없는 호기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80세가 넘은 거장 한분은 내게 계속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만날 때 마다 조르는 분도 있었다. 두 번째는 Head 인데 지식습득과 자기개발에 아낌없는 노력을 한다. 셋째는 Hand 이다. 그들은 손을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고 나눔에 남다르다. 나는 가슴으로 꿈을 꾸고 머리로 디자인하며, 손으로 나눔을 실천하고 싶었다. 나 배상민의 3H는 이렇게 탄생 했다.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삶을 위해 3H와 3D를 만들고 그것을 실천하길 바란다.
< 롤리폴리 화분과 세계 4대 디자인 어워드 >
내가 만든 롤리폴리 화분은 카이스트에서 맨처음 꾼 꿈으로 하나의 사건이었다. 물이 없으면 넘어지는 화분으로 일명 오뚜기 화분이다. 화분 밑에 추와 물이담길 공간을 만들어 밸런스가 깨지면 화분이 넘어진다. 이 디자인으로 세계 제4대 디자인 어워드를 석권했다. 세계 제 4대 디자인 어워드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IF 디자인 어워드, 미국의 IDA, 일본의 Good Design 어워드로 상이 시작된지 50년이 넘은 최고의 상들이다. 6,000여개의 제품이 출품되며 참가국만 해도 50개국이 넘는다. 모든 디자인이 다 있고 금상, 은상, 동상이 시상되는 디자인 부분의 올림픽, 노벨상이다.
< 저널 (일기)을 써라 >
거장(마스터)들의 공통점은 메모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23권의 디자인 저널(일기)이 있다. 20대부터 항상 '내가 만약 (what if)'을 생각해 왔다. 예를 들면 ‘내가 만약 스타벅스의 총괄 사장이라면 매장 디자인을 어떻게 할까?’ 라든가 ‘내가 월드컵 개막식 총감독이라면 어떻게 연출을 할까?’ 등등의 생각말이다. 저널에 이러한 나만의 공상(머리속 생각)을 기록한다. 디자인은 만족을 넘어서 감동을 주어야 한다. 어떠한 디자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 5분간 몰두해서 답이 생각안나면 그건 해답을 모르는 것이다. 그럴때는 23권의 저널중 한권을 펼쳐든다. 펼친 페이지에 ‘오늘 에마가 죽었다’ 이렇게 씌어있었다. 그 기록을 보는순간 5평 맨하탄의 낡은 아파트가 머릿속으로 들어오며 잊고 있었던 그곳의 모든것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외롭던 시절 방안의 화분, 컴퓨터 등 물건에 사람처럼 이름을 붙여주었다. 화분의 이름이 ‘애마’였다. 그 화분의 식물이 죽은 것이다. 꽃집아저씨에게 물어보니 물을 너무 많이 주었거나 너무 적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떡하면 화분의 물주기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골몰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답을 찾지 못하고 잊혀졌다. 이러한 기억들이 ‘나의 애마가 죽었다-의 메모에서 불현 듯 되살아나고 5분만에 오뚜기와 화분의 결합을 생각해 낸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뇌는 컴퓨터와 달리 어떠한 문제에 몰입했다가 까마득히 잊고있었다 해도 무의식중에는 그 문제를 대해 계속 풀고 있는 것이다. 롤리폴리 화분은 18년전 뉴욕에서 화분의 식물을 죽인 것이 단초가 되어 무의식의 오랜 해결시간을 거쳐 십수년후 5분만의 몰입을 통해 답을 찾은 것이다.
< 대박 아이디어 >
내 연구실에서는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브레인스토밍을 하지 않는다.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제품의 기능을 추가하거나 성능을 향상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완전 대박상품의 아이디어를 브레인스토밍으로 해결할 수 없다. 내 아이디어의 원천은 저널이다. 저널을 통해 무의식중에 계속 해결책을 찾고있었던 문제들이 현실의 문제와 결합하여 즉각적인 아이디어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가 대박을 친다. 대박아이디어는 아주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중에 누구나 공감하는 아이템이 대부분이다.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저널을 써라. 10년, 20년 계속 저널을 쓰면 여러분의 분야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둘수 있다. 카이스트의 디자인과 졸업생들은 세계 각국의 중요위치에 포진해 있다. 그들을 만나면 꼭 나에게 자랑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저널이다. 나도 뉴욕에서 백남준 선생을 우연히 만나 저널을 보여준적이 있는데 그도 나에게 자기 저널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그만큼 저널은 창의적 아디디어를 얻는데 중요한 것이다.
< 끊임없이 꿈(dream) 꿔라 >
꿈은 현실성도 없고 돈도 안되지만 삶의 원동력이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난 뉴욕에서 상업디자이너로 큰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던중 카이스트로부터 러브콜이 왔다. 내가 교수를? 카이스트에서 왜 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뉴욕은 다자이너에게는 꿈의 도시이며 일하기 가장 좋은 곳이다. 서울도 아닌 대전으로 간다는 것은 유배생활과 다르지 않다. 이성적으로는 내 자신이 카이스토로 가는 것을 거부했다. 카이스트로 가면 골드만삭스, 코닥, 샤넬 등 나의 클라이언트와의 이별이기도 했다. 그러나 뉴욕생활은 마음이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만든 물건들은 아름다운 쓰레기일 뿐이었다. 자본주의에서 상품은 구매력을 자극하는 멋진 디자인으로 6개월 사용하고 나서는 싫증나게 만들어야 한다. 코카콜라의 디자인도 항상 같은것 같지만 조금씩 바뀌어서 올드하다는 이미지가 안생기게 노력한다. 대부분의 상품은 성능보다 디자인을 보고 선택한다. 아름다운 쓰레기를 양산하는 자본주의에서 윤리의식 따위는 존대하지 않는다. 디자이너는 자본주의 앞잡이일 뿐이라는 회의가 밀려왔다. 카이스트에서는 클라이언트는 없지만 내가 하고 싶은 정말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 90 : 10 과 나눔 활동의 시작 >
2008년 유엔 통계에 따르면 하루에 1만원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은 전세계 인구중 10% 밖에 안된다. 나머지 90% 인구중에서 80%는 하루 2천원이하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전세계 90% 사람들에게는 need가 필요하고 10%사람에게는 구매를 위해 디자인이 필요하다. 1970년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세계 의사중 90% 이상이 실제 병치료와는 거리가 있는 피부과, 성형외과에 종사하고 있다고 하는데 45년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회정의와 상관없이 의미없는 일에 열정을 바쳐야 하는 현실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2005년 카이스트로 오면서 ‘월드비전’과 손잡고 '나눔+seed (나눔상품을 팔아 판매액을 기부하고 제 3세계 사람들을 위한 현물이나 시간을 기부)' 일에 집중했다. 현재 240명의 아이들에게 1인당 매년 2천만원을 기부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족한 지원을 하는것보다 인원수는 적더라고 풍족한 지원을 통해 지원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 내가 만든 나눔 상품들 >
MP3 플레이어 크로스큐브 - 2008년 8개월 동안 석사학생 2명과 공들여 만든 작품으로 접이식 MP3이다. 카이스트는 교수평가가 상당히 엄격하다. 교수평가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SCI 논문수와 수주하는 펀드금액이 좌우한다. 주변교수들이 지금은 그걸 할때가 아니라고 말렸다. 이대로라면 교수 재계약이 안되는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상품이 IDA에서 은상을 수상 했다. 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애플의 아이팟’이 동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카이스트에서 이 상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비즈니스’라는 유명잡지에 이 상품에 수상소식이 몇페이지에 걸쳐 게재된것을 본 교수가 있어 카이스트에 비로소 알려졌다. 그해 난 540명 교수평가에서 1등급을 받았다.
LOVEPOT - 2008년 12월에 출시된 이 상품은 전기가 필요없는 가습기이다. 보통 가습기는 3시간이면 물이 썩기 시작한다. 화분위에 울이 벌집구조로 설치된 이상품은 물을 빨리 흡수하고 증발시키는 친화경 제품이다. 3시간이면 물이 증발하여 물이 상할 염려가 없다. 일본과 중국에 짝퉁 상품이 생겨날 정도로 인기가 있는 제품이다.
텀블러 - 나눔 프로젝트 4차 상품으로 인터렉티브 팀블러 하티(heartea) 이다. 심장을 상징하는 돌기부분의 빛을 통해 내부음료의 온도를 알려주어 티타임을 여유롭고 즐겁게 만들어 주는 상품이다. 음료를 담고 팀블러를 손으로 잡으면 돌기부분에 빛이 들어온다. 2년 연속 4대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품이다
딜라이트- 나눔 프로젝트 5차 상품으로 움직이는 조명기구이다. 하트형태의 전등갓 끝부분을 잡고 올리면 갓의 형태가 다양하게 변하며 그에 따라 불의 밝기를 조절할 수 있다. 분위기에 따라 기분에 따라 원하는 형태로 사용가능하다.
< 기적 >
나눔프로젝트를 통해 25살 이하 석박사 학생들과 8년동안 52번의 상을 받는 기적이 일어났다. 상장에는 같이 참여한 학생들의 이름을 모두 넣는 것이 철칙이다. 이것 하나면 취업에 있어 백지수표와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클라이언트도 없는 우리가 이런 기적을 일구어 낸것에는 ‘나눔’이라는 우리만의 철학이 있어 가능했다고 본다. 그래서 항상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2014년 최고의 카이스트인 상을 받았다. 카이스트에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교수가 아니면 못받는 상이다. 우뇌적 집단속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왔는데 9년만에 최고의 교수로 인정받은 것이다. 내가 직접 디자인한 비교적 얌전한 한복 스타일 검정색 의상을 입고 시상식장에 섰는데 눈물이 울컥 났다. 시상식장 자리는 2005년도 신임교수 인사자리에 가수 전인권의 사자머리를 하고 검은 한복에 어머니의 밍크코트를 걸쳐입고 섰던 곳이다. 교수들이 ‘별 희안한 사람이 교수로 왔네’ 했을 것이다. 2014년 카이스트 최고의 상을 받으면서 비로소 ‘이제 넌 우리식구야’ 라고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이 상을 받고 놀라운 일어났다. 기술적인 부분에 애로가 생기면 그 분야 전공교수에게 협조를 구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나에게 이러이러한 기술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나눌수 있을까? ’를 물어오는 교수들이 많다. 카이스트가 개발한 좋은 기술을 이웃에게 나누는 학교가 되어간다는게 너무 고무적이다.
< 맺음말 >
우리 한국사회가 너무 힘들고 어렵다. 하지만 전 세계 인구중 단지 7%만이 컴퓨터을 다루고, 단지 1%만이 대학교육을 받는다. 대학교육을 받지않는 99%의 사람들은 자신이 못나서 인가? 우리가 그 1%에 들어가는 것은 우연히 대한민국에 태어났기 때문이지 노력해서 된일이 아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은 그냥 주어진 것이 많다. 여기있는 여러분은 대한민국에서도 축복받은 받은 몇 안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세상에 빚지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나 다움을 발견하고(DREAM), 문제를 찾아 창의적으로 해결하며(DESIGN), 세상과 함께 나누어라((DONATE)' 를 기억하고 실천했으면 한다. 여러분들의 경험, 지식, 기술 등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이웃들에게 나누면서 삶의 진정한 보람과 행복을 찾기를 바란다.
(이동주 문화경영팀장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