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니키아'라는 말은 그리스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phoinós는 그리스어로 '진홍빛'이라는 뜻으로
이들의 주요수출품목이 바로 진홍빛 염료였기 때문이다.
진홍빛은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귀한 색으로
당시 페니키아해안에서만 나는 뿔고동에서 추출할 수 있었다.
페니키아는 지구라트나 피라미드처럼
건축물이나 유물을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농경을 멸시했기 때문에 땅에 대한 애착도 없었다.
그래서 해안에서 15킬로미터 이내 지역만 자신들의 영토로 삼았다.
오로지 교역을 통한 부의 축적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항구도시를 건설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레반트 지역 지중해 연안을 따라 점을 찍듯이
여러 도시들을 건설한 이들은 뛰어난 항해술로
지중해를 자신들의 호수처럼 활용했다.
이윽고 기원전 5세기에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 위성제국을 건설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곳곳에 식민지를 세운다.
공정하게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그 물건의 가치와 지불내역 등을 기록해야 한다.
그래서 페니키아인들은 쐐기문자와 상형문자의 장점을 살려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 '알파벳'을 최초로 만들어낸다.
기원전 1200년경 비블로스에서 제작된 아히람의 석관에 쓰여진 페니키아 문자
페니키아인들은 이집트에 백향목을 가져다 팔고 그 돈으로 파피루스를 사다가 그리스에 팔았는데, 그래서 이들의 근거지는 '비블로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Byblos는 그리스어로 papyrus라는 뜻이다). Byblos는 그대로 '책biblio'이라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로마의 농경민들이 세운 제국이 부흥하면서
기원전 2세기 페니키아와 로마는 지중해패권을 놓고 대혈투를 벌인다.
120년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로마제국은
카르타고를 건물 한 채 남김없이 불태워버리고
페니키아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도 노예로 팔아버린다.
로마인들에게 페니키아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을 로마인들은 '포에니전쟁'이라고 부르는데,
Poeni는 Phoenicia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Punic war라고 한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Poenicus(Phoenician)이라고 불렀다.
페니키아인들은 이베리아반도에 토끼sapan가 많다고 하여 토끼나라Sapania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오늘날 스페인Spain의 유래가 되었다.
페니키아는 기원전 1세기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인류의 의식 속에는 영원히 살아있다.
바로 죽지 않는 신화속의 새(不死鳥) Phoenix로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인류역사에서 사라진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을
케나아니/키나아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Kenaani/Kinaani는 바로 Canaan이다!
최초의 알파벳 문서인 성경을 제작한 가나안사람들이
바로 이들 페니키아인이었던 것이다.
히브리인과 페니키아인은 언어도 문화도 같다.
구약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바로 이들이다.
넓은 의미에서 페니키아는 안디옥에서부터
이집트의 경계에 이르는 지중해 동쪽 해변의 긴 지역을 가리키지만
원래의 페니키아는 주로 두로와 시돈의 영토를 말한다.
페니키아는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해안지대,
즉 지중해 동안을 일컫는 고대 지명이다.
여호수아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기 전에 이 지역에는
함의 후손인 가나안 족속이 살았으며 그들은 열한 가족으로 나뉘었는데
그 중 가장 힘센 가족은 가나안 가족이었다.
바로 그들이 시돈을 세웠고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가나안 족속이었으며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을 페니키아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여호수아와 사울과 다윗과 그 이후의 왕들의 시대에 정복되지 않고
그들만이 독립을 유지하였으나 후에
그들은 아시리아와 갈대아에 의해 정복되고
후에 다시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에 의해 정복되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부유하고 문화가 발전한 사람들로
인정을 받았다.
그들은 상업 도시들의 연합체를 구성하였는데
이 도시들은 각각의 영토와 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역을 발전시켰으며
그래서 여러 지방의 산물이 그들의 시장에서
교환되었다(겔27:1-36).
초기 로마의 경쟁국이던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의 식민지였으며
다시스도 마찬가지였다(겔38:13 킹흠정, 세바와 드단과 다시스의 상인들과
그곳의 모든 젊은 사자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노략물을 취하려고 왔느냐? 네가 탈취물을 취하려고 네 무리를 모았느냐?
은과 금을 가져가고 가축과
재물을 빼앗아 가며 큰 노략물을 취하고자 하느냐? 하리라, 하라.).
그들의 말은 유대인들의 말과 거의 비슷하며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배를 만드는 일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의 영토는 해안과 레바논 산의 정상 사이에 있었으며
비옥하여 여러 가지 농작물을 많이 내었다.
이곳의 거주민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숭배하였다.
페니키아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없으며 단지 가나안으로만 언급된다.
한편 신약성경은 가나안 여인 혹은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해 말하는데
(마15:22; 막7:26) 이는 곧 시리아의 페니키아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페니키아가 시리아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세계최초로 갤리선을 발명한 해양문명 페니키아...그리고 그 후예 레바논
페니키아는 지중해 동안(東岸)을 일컫는 고대 지명으로 페니키아인들은 주로 해상무역에 종사했습니다.
다시 말해 페니키아는 고대 가나안의 북쪽,
지금으로 보면 레바논을 비롯해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지역에 근거지를 둔 고대의 '해양' 문명입니다.
페니키아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에서 900년경까지
지중해를 가로질러 퍼져나간 진취적인 해상 무역 문화를 가졌습니다.
그런 만큼 페니키아의 배는 뛰어난 성능으로 유명했습니다.
돛을 달기는 했지만
대개의 경우 사람의 힘으로 추진력을 얻어 항해하는 갤리선을 최초로
발명한 것이 페니키아인들이었습니다.
로마자 알파벳의 시조가 된 페니키아 문자
어느 배보다 뛰어난 기동력을 갖춘 갤리선을 이용해
페니키아는 무역으로 크게 번성합니다.
하지만 페니키아 하면 뭐니해도
'페니키아 문자'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해양 무역을 통해 북아프리카와 유럽에 전해진 페니키아 문자는
오늘날 가장 많이, 또 가장 널리 쓰이는 로마자 알파벳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페니키아인은 초기에는 가나안(Canaanites)계(系)가 주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아계, 후리르계와 혼혈을 이루어졌다.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불렀는가는 확실치 않으나, 페니키아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은 그리스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포이니키스, 즉 '자(紫)색의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페니키아인들이 값 비싼 보랏빛 염료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B.C. 1200년 경 페니키아가 해상 무역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페니키아는 본래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B.C. 1500년 경까지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스 3세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B.C. 14세기에 들어 히타이트와 아모리인(Amorites)이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페니키아는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독자적인 해양 세력으로 성장했다. B.C. 1250년경에 이미 페니키아는 동지중해연안과 에게해 연안을 장악했으며, 티레, 시돈, 트리폴리, 아라두스, 비블로스 등의 도시 국가들이 크게 발전했다.
B.C. 12세기에 이르러 이집트의 영향력이 매우 약해지면서, 페니키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스스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의 사이프러스, 코카서스, 사르디니아, 이베리아 반도 등을 식민지화 한 것은 물론이며,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서안과 동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해상 교역과 문화 전파를 통한 페니키아의 전성기는 약 400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에 오늘날 알파벳의 모태가 되는 페니키아어 알파벳이 발명·보급 되었다.
그러나 B.C. 9세기에 이르러 아시리아 세력이 팽창하면서 페니키아의 독립성은 점차 축소되었으며, 기원전 538년에 이르러서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B.C. 4세기 무렵 그리스가 성장하자 페니키아는 B.C 350년에 시돈이 공격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리스의 한 속주가 되었다. 특히 티레는 B.C. 333년 ~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며, B.C. 64년 페니키아 전역이 로마의 시리아 속주로 편집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리스의 통치 하에 있었다.
페니키아의 항해술
페니키아는 중개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교역을 통해 지중해 전역을 장악했는데, 그 바탕에는 우수한 조선기술과 항해기술이 있었다. 특히 페니키아의 행해술은 연안항법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천문 관측과 조수간만의 차·조류의 흐름 등에 대한 전문 지식을 토대로 하였다. 또한 조선기술에 있어서도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길고 폭이 좁은 선박과 상선용의 라운드 선박으로 선박의 종류를 이원화 시켰으며, 상선의 경우에는 화물적재능력을 최대화 하기 위해 노(櫓)가 거의 필요 없는, 돛에 의존하는 범선을 주로 사용했다.
페니키아의 주요 생산품과 교역품
페니키아는 삼나무·소나무 등의 목재, 티레·비블로스·베리투스에서 생산되던 고운 아마포, 고둥의 분비액에서 추출하는 보랏빛 염료와 염색 옷감, 시돈에서 생산되던 자수제품, 포도주, 금속, 유리 공예품, 채색 유기, 소금, 건어물 등을 주로 수출했다. 또한 지중해연안, 아프리카, 아시아를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귀금속, 상아, 공예품 등을 사고 팔았으며, 식민지였던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은을, 사이프러스에서는 구리를 생산해 거래했다.
페니키아의 문화: 미술, 공예, 알파벳
페니키아 문화에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에게해, 시리아의 문명에서 온 소재와 관념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대부분의 페니키아 유적은 주로 평면 부조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비블로스에서 출토된 아히람(Ahiram, B.C. 11세기 말 비블로스의 왕)의 석회암 석관이다. 페니키아의 문화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페니키아 문자이다. 페니키아는 본래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를 사용했으나 B.C. 15세기 경에 22개의 자모로 이루어진 고유한 문자체계를 발명했으며, 비블로스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후에 그리스인들이 이 표기법을 채택하여 오늘날 로마자 알파벳의 원형이 되었다.
페니키아의 역사
1장 페니키아의 일반적 지식
1. 언 어
페니키아인들은 “가나안인들에게 소개된 셈족의 이주와 똑같은 움직임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페니키아인들은 다른 영향과 혼합주의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체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 언어가 고국에서 사멸해 버렸고, 헬라어와 아랍어에 양보되었다.
헬라어 철자는 페니키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다.
페니키아어는 히브리어와 비슷했으며 해독은 1750년에 스윈톤이 했다.
2. 종 교
1) 페니키아의 종교는 다른 나라의 여러 신들과 상당히 혼합되어 있었다.
신들은 이집트, 그리이스 그리고 로마(칼타고)를 포함한 다른 나라들의 신들과 동화되어 왔다.
으뜸가는 여신은 아스다롯(왕상 11:5) 이었을 것이다.
두로에서는 엘과 멜카르트를 섬겼다.
성전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성전과 몹시 같았을 것이다.
성전을 지을 때 페니키아의 일꾼들이 상당히 많이 일을 했기 때문이다.
2) 칼타고, 노라, 모티어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자녀의 희생이 몰록에게 바쳐진 신전의 형태가 있었다.
이 제의는 자녀를 불 사이로 지나서 몰록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솔로몬은 그의 시돈 여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시돈의 여신인 아스다롯을 섬겼다.
죽은 후의 사람에게 인사하도록 되어 있는 상황이 당시 사용된 장례의식으로 나타나 있다.
가장 희망을 갖고 있는 곳은 유해를 위해서 남아있는 안전한 은신처였다.
페니키아인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훌륭한 무덤을 좋아했다.
3)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석관의 비문들이다.
두로의 아히람 석관은 10세기에 아히람이 다시 사용한 13세기의 관으로 판명되어 왔다.
이 관들은 모양이 이집트식이다. 시돈의 남동쪽 약 3.2킬로미터 지점에 페니키아의 묘지가 있다.
그릇들은 이집트의 형태를 개작한 그리이스의 예술로 이루어져 있다.
그 관들 중에서 몇 개의 관에는 제조업자의 상표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어 온 페티키아의 글자가 들어 있다.
3. 정 부
1) 통치 형태가 항상 같지는 않았다.
생존을 위해서 지명된 300명으로 구성된 일종의 상원이 있었고,
공공의 아전에 책임을 진 104명으로 구성된 다른 기관이 있었다.
두로와 시돈은 적어도 때때로 다른 도시들을 지배하는 어떤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페니키아의 동맹은 없었으며 더욱이 페니키아의 국가는 없었다.
2) 헤로도투스는 어떻게 페니키아의 배들이 아프리카를 일주하기 위해서
파라오 느코의 요청으로 홍해를 항해해서 내려왔는지(주전 609-593)를 묘사하고 있다.
그 식민지들은 역시 다른 개척지들을 세웠다.
칼타고의 왕인 한노는 리비아 땅에 리비아식 페티키아 도시들을 세우기 위해서 3만명의 남녀들을 데리고 갔다.
4. 군 대
1) 페니키아 해군은 사르곤 2세가 키프로스를 공격할 때 도왔다.
다리우스는 이오니아계의 희랍인들을 대항할 때 그 해군을 사용했으며,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에서 그의 함대에 그 해군을 사용했다.
그 군대는 이들이 후에 페르시아에 가담하기까지는 페니키아 역사의 주요한 특성이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자기들보다 더 큰 두 강대국들에게 괴로움도 받고 보호도 받았다.
2) 사사기 18장 7절 이하에 라이스 사람들은 안전하게, 조용히, 의심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그리고 시돈 사람같이 부를 누리며 살고 있더라고 말하고 있다.
군사적으로 지도받은 국가와는 현저히 다른 외교적인 국가를 풍자한 것이다.
5. 독립을 위한 투쟁
1) 페니키아의 도시국가들은 부유하였고 널리 영향을 미친 반면에, 거의 항상 군사적으로 더욱 강한 국가들에 의해서 복종되었다. 주전 1477년 투트모세 3세의 다섯째 전투 기간에
페니키아의 연안지역은 폭동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집트가 북방의 메소포타미아 강대국들을 대항한 공격의 대부분이 해안 길을 취했다.
페니키아는 그들에 의해서 임으로 완충 지대로 사용되어 온 것 같으며,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아의 안전한 제휴가 불가능하였다.
2) 이집트의 시삭(주전 930년)이 수리아를 침입했으며 그 댓가로 페니키아를 쳐부셨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화강암으로 만든 상(像)이 게발의 여인 신전에 건립되었다.
주전 876년에 앗수르가 두로, 시돈, 게발 그리고 아라더스로부터 공물을 받았다.
그후 주전 701년에 메로닥 발라딘이 두로를 격파한 후 엘루엘리 왕이 키프로스로 도망하였다.
주전 648년에 앗수르인들은 앗수르의 마지막 지배자가 두로를 다스렸을 때
페니키아를 지배하는 세력을 잃었다.
3) 그러나 이것이 해안의 고통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삼메티커스 2세(주전 593-588) 통치 때 찰딘즈가 주전 590년에 팔레스틴을 침입하여
두로의 통치구너을 이토바알 3세(주전 589-574)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하박국이 질문을 했던 때가 바로 이 침입 기간 동안이었다.
564년에 두로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왕권이 폐지되고 사사들이 이전 이집트의 요구에 의해서 지명되었다. 그러나 주전 556년에 바벨론이 말바알(주전 556-552) 왕을 지원하였는데,
이 왕이 이전 이집트의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나중에 히람 3세를 대신하였다.
4) 주전 4세기 초반에 페니키아는 그리이스와 이집트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였으며
페르시아를 지나치게 섬겼다.
주전 345년에 시돈이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멸망하였다.
주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나타났을 때, 페니키아는 아직도 페르시아의 속국이었다.
알렉산더는 두로를 격파하였으며 멜카르트에게 성전에서 제물을 드렸다.
6. 건축과 예술
페니키아인들의 건축 양식은 성경에 암시되어 있다.
그들 집의 전적인 위쪽의 창문은 시스라의 어머니(삿 5:28)와 이세벨(왕하 9:30)에 관하여
구약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페니키아의 예술은 그들 생활의 다른 모습과 마찬가지로 무역을 통한 외국과의 접촉 때문에
그들의 예술은 융합된 성격을 지녔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문화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예술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융합이다.
페니키아의 은사발들은 특히 화려하며 예술적으로 도안되어 있다.
7. 통 상
1) 옴스테드는 말하기를, 페니키아에는 고도의 문명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비옥한 조그마한 지역들이 있으나,
그것이 급속히 팽창하는 인구의 필요에 응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들이 바다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조수의 간만이 없고 알맞은 조건을 갖춘 지중해는 해운업을 증진시켰다.
키프로스는 거의 언제나 페니키아인들과 그리이스인들 사이의 투쟁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쟁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들은 페니키아 상인들의 우월함을 잘 증명하고 있다.
2) 두로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에 주요한 도시였다.
왕국을 통일함으로써 다윗이 페니키아와 접촉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바다가 필요했고 두로는 농산물들이 필요했다. 페니키아의 무역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움직였다. 이집트의 느고는 그들의 무역 중심지로 멤피스를 허락하였다.
그 결과 이사야는 이집트가 두로의 멸망을 몹시 슬퍼할 것이라고 말한다.(사 23:5)
3) 이들은 가끔 노예 거래를 했으며 이것이 상인으로서 나쁜 인상을 남겼다.
주전 7세기의 오딧세이는 이를 증명한다.
요엘 3장 6절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본 지경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 그리고 아모스는 백성을 에돔에 넘겨준 두로를 비난하고 있다.(암 1:9이하)
2장 페니키아의 역사
1) 일찍이 페니키아의 지리적인 범위는 다소 잘 정해져 있다.
서쪽으로 지중해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레바논 산맥에 이르는 자연적인 경계는 위도의 범위를 정하였으며
리타니 골짜기의 카멜산 가까이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90-230킬로미터 뻗어가는 좁고 긴 땅을 이루었다.
일반적인 가나안 역사와 구별되는 페니키아 역사는 다소 희미하긴 하지만 하든(Harden)에 의하면
그들의 무역과 식민화가 지중해 세계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던 주전 2000년 후반경에 시작되었다.
2) 분명히 그들 역사의 마지막 부분은 동방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이 즉위한 주전 332년에
그리고 서방에서는 로마가 칼타고를 점령한 주전 146년에 끝이 났다고 생각된다.
페니키아 인의 황금시대는 그들의 도시가 대부분 독립했으며
무역과 해상 활동이 가장 널리 퍼졌던 주전 1150년에서 853년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주전 13-12세기 동안 가나안인들은 이 당시의 이스라엘인들과 해안 사람들의 침입으로 불안하게 되었다.
이후 곧 수리아 사막에서 온 아랍 족속들은 페니키아이니들이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가나안의 후배지(後背地)를 많이 점령했다. 그들은 바다가 그들의 자연적인 기업이 된 해안선의 좁은 땅에 국한되어 있었다.
4) 페니키아의 국경은 항상 도전을 받아오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페니키아의 역사는 주로 그 도시들의 역사였다. 그 도시들은 너무나 독립적으로 행동하였기 때문에 그 나라를 단일체로 말하는 것은 거의 잘못이다.
단일체는 자리에 지시된 일종의 공통적인 해상 무역 생활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1. 두 로
1) 두로는 주전 1200년부터 그 도시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당했던 주전 574년까지
눈에 띄는 두드러진 도시였다.
그 후 시돈이 그곳을 지배하였다. 주전 741년에 두로와 시돈이 히람왕과
그의 후계자인 룰리(Luli)왕의 통치 아래서 연합했을 가능성이 있다.
히람은 두로의 왕들 중에 가장 유명한 왕이었다.
(주전 981-947) 이토바알 즉 에드바알은(주전 879-867) 아스다롯의 제사장이었으며
오므리의 집과 두로 사이에 동맹을 맺은 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부인이 그의 딸 이세벨이었다.(왕상 16:31)
엘리야가 페니키아의 도시인 사르밧의 과부를 방문한 것이 바로 이 조약 기간 동안이었다.(왕상 17장)
2) 그 후 이세벨의 딸인 아달리아가 유다의 요람 왕과 결혼했다.
칼타고의 엘리사가 이토바알의 증손녀였기 때문에 이세벨은 그녀의 왕 고모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때 해안 지방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2. 게 발(Gebar)
1) 원래 이 도시는 쿠프나(Kupna)로 불려졌다.
페니키아인드은 그 이름을 “산”을 의미하는 게발로 바꾸었다.
필로는 게발이 페니키아 도시 중에서 가장 최초의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도시의 역사는 멀리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텔(Tell)의 밑바닥에 처녀지에서 물건들이 인간의 뼈와 함께 발견되어 나오고 있는 사실은
지중해의 인종이 신석기 시대에 게발에서 살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2) 아마 이집트와 게발 사이에는 페니키아의 어떤 도시보다도 더욱 가까운 관계이었을 것이다.
이집트가 강했을 때에는 몹시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이집트가 약했을 때는 게발이 독립을 주장하였다.
3. 시 돈
페니키아의 다른 도시들과 같이 시돈은 아모리, 하피루, 그리고 힛타이트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었다. 시돈의 시민들은 이 도시가 페니키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을 자랑하고 있다.
그 이름은 사냥꾼의 신인 시드(Sid)에서 유래하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들이 최초로 북극성을 발견했으며 최초로 밤에 항해했다고 한다.
그 영향은 좀 심하게 완전히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3장 페니키아와 성서
1) 창세기에는 시돈인들의 기원이 가나안의 후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창 10:5)
그들은 지파동맹 동안에 이스라엘에 약간 위협을 주었음에 틀림없었다.
여호수아는 시돈 건너 기브온을 공격한 백성들의 동맹을 추적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그들의 영토 밖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수 11:8)
두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서 좀 더 두드러진 도시였던 것 같다. 그것은 요새화 된 도시로 언급되었다.
2) 이들의 건축술은 이스라엘보다 굉장히 선두에 있엇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추방 이전과 이후의 성전들을 위해서 자료를 공급했거나 건축하였기 때문이다.
솔로몬관 다윗은 외관상 두로의 왕 특히 히람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히람은 납달리 족속의 과부와 두로의 놋점장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것이 암시하는 중요한 사실은
그 왕이 장인(匠人) 집 출신이었으나 성장하여 왕권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히람의 이스라엘과 혼합된 결혼을 통해서 두 나라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3) 페니키아인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성경에 참고해 볼 때
분명히 드러나는 몹시 주목할만한 일은 선지자의 경고에 반영되어 있다.
히람 왕 이후 성장해 온 것 같으며 특히 추방 이후에 양자간에 상당한 증오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감정에 빠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어떤 조약이나 음모가 시편 83편 7절에 언급되어 있다.
이사야 23자은 두로와 시돈의 멸망을 슬퍼하고 있으나 빈정거리는 가시가 몇 개 들어있는 것 같다.
4) 신약성경에 두로와 시돈을 언급한 구절들은 지리적인 위치를 참고할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도시들은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도록 허락이 되어 있는 것 같다.(가나안 여인 마 15:21이하, 수로보니게여인 막 7:24이하 ) 페니키아는 튼튼히 요새화 되어 있고 부유하고 무역에 분주한 도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안에 위치해 있었고 항상 신선한 사람들, 자연 자원, 그리고 현명한 상인들로 축복받은 나라이었기에,
그들은 사방의 이웃 나라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