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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8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일치 주간)
제1독서 : 1사무 18,6-9; 19,1-7
복 음 : 마르 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보면,
20세기 초 황금기를 달리고 있던 미국으로 아메리칸드림을 가슴에 품고
성공을 바라는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미국행 배 승선권을 구입하려고 열심히 노동했습니다.
드디어 승선권을 사고서 배에 오른 그는 돈을 아껴야 했습니다. 더는 쓸 돈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돈을 아끼려고 식사 때마다 식당에서 사람들이 남긴 우유와 빵
그리고 치즈 조각을 모아서 끼니를 때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본 식당 지배인이
그가 식사비를 아끼기 위해 그렇게 식사한다는 이야기를 알고는 직접 말해주었습니다.
“손님, 승선권에 식당 이용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어요?”
이 청년은 배에서 굶주림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기만 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요.
사서 고생한다는 말도 있지만, 굳이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알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함께함 그 자체로 주님의 축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면서 주님과 온전하게 함께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주님의 축복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의 자녀가 됨은 큰 은총과 주님의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과 함께하는 길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또 보여주셨던 사랑은 ‘악’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사랑에 집중하면서,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의 축복 안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로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특히 병자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이 몰려왔지요.
그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죄의 결과로 병에 걸린 것이고,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 역시
공동체에서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 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도록 이런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다가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더 알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주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 모두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 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들이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사실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일까요?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왜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실까요?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 말씀하실까요?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라고도 하셨습니다.
대체 왜 이처럼 알리지 못하게 할까요?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곧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제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휘장’이 찢어지듯 찢어진 그분의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주님!
저의 무지를 깨우쳐 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 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며,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이 잘 되는 것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의 심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런 심성을 ‘시기’라고 말합니다.
시어머니가 맏며느리를 예뻐했는데 둘째 며느리가 들어오자, 둘째 며느리를 더 예뻐할 때
시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맏며느리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질투’라고 말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비슷한 면이 있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시기와 질투를 이렇게 구분하였습니다.
“시기는 갖지 못한 사람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고
질투는 가진 사람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에 대한 명언들이 있습니다.
“시기는 증오보다 더욱 비타협적이다.
시기심은 살아 있는 자에게서 자라다 죽을 때 멈춘다.
우리들의 불행을 마음속 깊이 애통 해주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지만,
우리들의 성공을 마음속 깊이 시기하는 사람은 몇천 명이나 있다.
녹이 쇠를 좀먹듯이, 질투는 그것에 사로잡힌 영혼을 병들게 한다.
인간에게 보편적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사람에 대한
악의와 증오, 그리고 어떻게든 그를 정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하는 열망이다.
질투는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도 올바로 보지 못한다.
질투는 휴일이 없다.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
아담이 ‘교만’ 함으로 하느님을 거스른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카인이 ‘시기와 질투’로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범한 최초의 죄입니다.
그만큼 시기와 질투는 공동체를 갈라놓고, 분열시키는 힘이 강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다윗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다윗이 이민족의 침입을 잘 막았는데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의 친구이자 사울의 아들인 요나탄은
아버지에게 다윗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울은 아들의 말을 듣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지만
시기와 질투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울의 시기와 질투는 사울의 비참한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본당을 옮겨 다녔는데 한 번도 강남으로 간 적이 없었습니다.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에서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 모두 강북에 있습니다.
처음으로 본당 신부가 되어서 간 곳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적성성당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은 대부분 강남과 강북을 오가면서 사제생활을 했는데
저는 강남스타일이 아닌 것처럼 강북에만 있었습니다.
강남에서는 지내지 못했지만, 미국 뉴욕에서 5년째 지내고 있으니
저는 뉴욕스타일이 맞나 봅니다.
시기와 질투보다 약한 것이 ‘부러움’인데
그 정도는 하느님께서도 애교로 봐주실 것 같습니다.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원망은 오해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큰 갈증이 생깁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면 악의 세력이 자리를 잡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충실한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따르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가르침과 표징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과 계명의 그물로 예수님을 가두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성서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시기와 질투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걸 봅니다.
신앙인들도 쉽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쥔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기와 질투, 명예와 권력, 자존심과 욕심’
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염불할 때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스스로 당신을 소문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알렸습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심지어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야말로 ‘꿀과 향이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법’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일반 사람들은 자신들의 병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의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인기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믿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기에 편승하면 그것은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사실 인기가 결코 성공은 아닙니다. 따라서 한발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깨어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악령은 자신이 보호받기 위해서 아부하고,
사람들은 자기 안에 갇혀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의 열매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 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할 때입니다.
군중을 모으는 것, 신자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채워져서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거기에 향기가 있고 향기가 있으면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시기·질투심을 내려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사울과 다윗의 특별한 관계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큰 것 같습니다.
가질 것 다 소유한 사울 왕에게 다윗은 가장 충직한 신하였습니다.
항상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고, 전쟁에서는 승승장구했습니다.
왕으로서 박수를 쳐 주고 상을 줘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큰 사람으로서의 넉넉함이 부족했습니다.
대신 그의 내면에는 뭐든 잘하는 다윗에 대한 시기 질투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도 반성할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가 자신을 넘어 더 큰 바다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배로서, 책임자로서 형제들의 일취월장과 장점에 대해
내 일처럼 기뻐해 주고, 박수를 쳐 주고 있는가?
더 큰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지지해 주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사무엘기는 사울과 다윗 사이가 갈라지는데 단초가 된 사건을 소개합니다.
아직 볼이 빨갛던 양치기 소년 다윗이 어느 날
보기만 봐도 겁에 질리는 어마 무시한 골리앗 장군과의 일대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게임도 길지도 않았습니다. 단 한방의 돌팔매로 속전속결로 게임을 끝내버렸습니다.
그 싸움으로 인해 풍전등화 신세였던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개선 길에 올랐습니다.
필리스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울왕이 다윗과 함께 돌아오자,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흥겹게 부르는 노래 가사 한 구절이 사울왕의 폐부 깊은 곳을 찔러버렸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 사무엘 18,7)
사울은 그 노랫 가사 한 구절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했습니다.
순식간에 기분이 잡쳤으며 시기·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렸습니다.
갑자기 제대로 한번 빡 친 것입니다.
태평양 바다보다 더 넓고 인자하던 사울의 마음은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좁아지고 말았습니다.
수시로 솟아오르는 시기·질투심을 그때그때, 틈나는 대로 강물에 흘려보내야겠습니다.
누가 잘되면 시기·질투하지 말고, 마치 내 일처럼 크게 기뻐해 줘야겠습니다.
특별히 후배들, 젊은 세대가 떠오르면,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큰마음으로 넘겨주고 내려서야겠습니다.
어떻게든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습니다.
부단히 마음 정화(淨化)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음속에 가득 찬 미워하는 감정,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시기·질투심을 내려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 같은 경우 수도 공동체 내
동료 자매들로부터 엄청난 시기·질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레사는 시기·질투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상냥히 대했습니다.
더 기쁘게 냉대를 열심히 참아냈습니다.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보이는 동료 자매를 더 깊이 사랑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오락 시간이면 일부러 가장 자신을 싫어하고 괴롭히는 자매 곁으로 다가가 앉았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지내려 하시지만 그러실 수가 없는 모습이다.
예수님의 명성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8절).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10절)
많은 군중이 그분을 만지려 했고 또 만졌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이다.
그러나 그분을 주님이시라고 여기면 그분이 아버지께 올라가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11절)
악마도, 하느님의 자녀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압니다.”(참조: 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했다.
같은 고백이지만, 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본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니다.
이것이 악마와는 다른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다(참조: 갈라 5,6).
그들이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루카 4,34)라거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마르 5,7; 루카 8,28)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을 고백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사랑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조용히 쉬실 시간이 없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휴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항상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면
그분을 언제나 잘 알아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둔한 영적 감각과 교만에 싸여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거리"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거리"가 보입니다.
"큰 무리가 따라왔다 ...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마르 3,7-8).
예수님 주변으로 각지의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몰려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각자 나름의 청원과 바람을 품게 되었을 겁니다.
단순히 호기심이 생겨서 온 사람부터 절박한 필요를 안고 온 이들까지,
지금 그들 모두의 관심사는 예수님입니다.
군중과 예수님은 지금 매우 가까이 밀착되어 있습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마르 3,9)
군중은 예수님 곁에 더 가까이 오려고 서로 밀쳐 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까지 밀칠 지경이 되자 예수님께서 배를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배는 물에 띄워질 것이고, 군중은 호숫가에 남아 그분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많은 경우 다정한 접촉이 동반되기도 했지만, 실은 말씀이 중심이지요.
물리적 거리가 군중에 대한 외면이나 회피가 아니라
보편적 사랑이 필요한 순간에 걸맞는 해법임을 알겠습니다.
"그들(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밀려드는 군중으로 가뜩이나 복잡한데 더러운 영들까지 소리소리 지르며 한몫을 보탭니다.
주님을 아는 체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외침이 진정한 증언은 되지 못합니다.
믿음과 사랑에서 흘러나온 앎이 아니기에 듣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이럴 땐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치유와 기적 효과를 넘어, 수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의 영광에 이르러야 메시아의 신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준비 안 된 이들의 경솔하고 섣부른 폭로는
거룩한 이름의 진정성을 왜곡하고 훼손하고 손상시킬 수 있기에 침묵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울과 다윗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네"(1사무 18,7).
승리에 도취 된 여인들의 경박한 노래가 사달의 원인이 됩니다.
둘을 대놓고 비교하니 화나고 속이 상한 사울이 다윗에게 시기심을 품게 된 것이지요.
이렇듯 인간의 정화되지 않은 시각, 진실의 채로 거르지 않은 말은
걷잡을 수 없는 역효과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하느님까지도 죽음까지 몰아붙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1사무 19,5).
요나탄이 승리의 주인공은 사울도, 다윗도 아니고,
주님이심을 일깨우며 지혜로이 부친 사울을 설득합니다.
문제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각자 하느님과 두고 있는 "거리"입니다.
사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 사이에서 시기하고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도구로 쓰시느냐가 관건이지, 누가 잘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고 먹이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하느님의 일로 보지 않았기에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것 아닐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일이라면 그들에게도 "우리" 일이니 함께 기뻐하며 응원했어야 옳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이 말씀들 안에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 욕망과 바람으로 무질서하고 난폭하게 예수님을 밀쳐 대고 있지는 않은지,
분별 있게 거르지 않은 섣부른 말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보며 시기와 질투를 내려놓는지,
예수님을 태운 거룻배가 되어 그분과 밀착하는지...
어느 모습 안에 있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침묵'입니다.
앎이 무르익고 봉인이 해제될 때까지, 주님이 원하시는 때까지,
우리 자신이 주님의 말씀이 될 때까지 겸손히 침묵하며 그분께서 말씀하시도록 말입니다.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이승화 시몬 신부
사제들 사이에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서로 불편해도
식사는 함께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미 서로 성인이고 각자의 역할이 다르지만
가능한 식사 시간에 만나야 한다고 합니다.
서로 불편해서 할 말이 없더라도
그 자리를 피하거나 가치 없게 여기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만남이 없으면 소통이 단절되고
단절된 소통은 서로에 대한 오해가 깊어집니다.
그래서 일치는 사라지게 됩니다.
이는 여러 단체에도 적용됩니다.
아무리 관계가 좋다고 해도 회합을 안 하면
서로 소통은 끊기게 됩니다.
업무적인 관계로 변해버리면
결국 단체가 가진 힘을 잃어버립니다.
아무리 관계가 나쁘다고 해도 회합을 피하면
서로에 대한 오해만 커집니다.
이해하지 못하기에 서로 편이 갈라지고
결국 하느님을 바라보는 신앙생활이 아닌
사람에 매여 버리게 됩니다.
서로의 만남을 이어가면서
결실로서 증명하고 소통하는 일
그럴 때 비로소 하느님 안에서 일치할 수 있습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고
생각이 아닌 결실을 맺어갈 때
서로 대화의 기본자세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왔지만
오히려 주님은 거룻배에 타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남은 이어가되 서로 적절한 관계를 두고
본질적인 일에 집중하는 일
우리도 그러한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