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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광송 신경
• 『로마 미사 경본』: 신심 미사, 19-1.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 『미사 독서』 Ⅳ: 신심 미사, 19-1.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디 양반 가문이었으나,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1836년 열여섯 살에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다음,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진쟈상(金家巷)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49년 11월 25일 비오 12세 교황은 그를 한국에서 전교하는 모든 성직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 교회의 대표 성인으로 세웠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과거 대축일이었던 7월 5일에 성대하게 신심 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입당송
이 성인은 하느님의 법을 위해 죽기까지 싸웠으며, 악인들의 말도 두려워하지 않았네. 그는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지었네.
본기도
하느님,
올바른 신앙을 전파하다가 순교한
복된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도 뜨거운 사랑으로 복음을 실천하여
교회 발전에 이바지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너희는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즈카르야를 살해하였다(마태 23,35 참조).>
▥ 역대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4,18-22
그 무렵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18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시편 31(30),3ㄷㄹ-4.6과 7ㄴ과 8ㄱ.17과 21ㄱㄴ(◎ 6ㄱ 참조)
◎ 주님,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
○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오로지 주님만 믿나이다. 당신 자애로 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
○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당신 앞 피신처에 그들을 감추시어, 사람들의 음모에서 구해 내소서. ◎
제2독서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1-5
형제 여러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마태 5,10
◎ 알렐루야.
○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복된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에게 육신의 온갖 고통을 이겨 내게 하셨듯이
주님의 은총으로 저희 마음에도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한국 고유 감사송 1 : 선조들의 신앙>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 선조들을 복음의 빛 안으로 불러 주시어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로 교회를 세우시고 자라게 하셨으며
그들이 갖가지 빛나는 덕행을 갖추고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
마침내 아드님의 승리를 함께 누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한국 순교자들과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또는>
<순교자 감사송 1 : 순교자들의 증거와 모범>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복된 순교자 {아무}는 주님을 현양하려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피를 흘려 주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었나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에게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을 증언할 강한 힘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며 끝없이 외치나이다.
영성체송 마태 16,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일찍이 복된 순교자 김대건 안드레아가 지녔던 믿음과 용기를 주시어
저희가 온갖 시련을 이겨 내고 충실히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신부 (金大建 Andrew), 1821-1846년
축일 : 7월 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솔뫼마을(송산리, 현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증조부 김진후(비오) 이후 집안 대대로 천주교를 믿었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증조부 김진후는 본래 하급관리였다가 천주교 신자인 며느리의 모범적인 행실을 보고 자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하여 유배되었다가 1805년 해미읍성으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배교한 잘못을 뉘우친 김진후는 해미읍성에서는 형리들을 감화시켰다고 전해질 정도로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형은 집행되지 않았으며, 충청도 해미읍성에서 10년 동안 옥살이 끝에 1814년에 옥사하였다.
김대건의 작은 할아버지이자 김진후의 셋째 아들인 김한현도 1816년 대구감영에서 배교를 하지 않고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감옥에서 형님 김택현(김대건의 조부)에게 보낼 글을 쓸 기회를 얻자 "사람이 천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이 영광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작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김대건의 부친인 김제준(이냐시오)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이렇듯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는 조선정부의 극심한 박해를 피해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김대건은 7살 때까지 고향인 충청도 면천에서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경기도 용인의 산골인 골배마실로 피신하였다. 당시 용인 골배마실(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810)에는 박해를 피해 온 천주교회 신자들이 옹기 판매로 생계를 유지하며 복음을 전하는 천주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골배마실을 성지로 삼고 있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인)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김대건은 1836년 청소년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은이성지를 방문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한양에서 라틴어 등의 기초적인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모방 신부는 김대건의 집안 내력을 듣고는, 김대건을 천주교 신부로 키울 생각을 했다고 전해진다. 모방 신부 뿐만 아니라 정하상도 천주교 사제가 될 것을 권했다는 주장도 있다. 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실린 김재준의 공초(진술서)에 따르면, 평신도신학자인 정하상(바오로)는 김재준에게 "재복이(김대건의 아명,어린시절 이름)를 신학교에 보내시면, 훌륭한 성직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정하상의 도움)
한양에서 라틴어와 성직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우는 기초 신학공부를 마친 후에 김대건은 평신도 신학자인 정하상(바오로)과 함께 조선교회에서 활동한 이광렬(요한), 조선에서 중국 청나라로 귀국하는 유방제(파치피코)신부의 도움으로 1836년 12월에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등과 함께 조선을 떠났으며, 만주와 요동을 거쳐서 1837년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피에르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비교적 가까운 북경신학교나 중국인 신학교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까지 가서 유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
(마카오 신학교)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동양경리부의 불란서 가톨릭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온 신학생들에게 직접 신학, 철학, 지리, 역사,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라틴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쳤다. 조선 신학생들의 스승이었던 르그레즈와 신부는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대견해했다. 마카오 신학교에서의 신학생들의 공부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학문을 성실히 해야 함을 말하는 교회사 사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신학생 시절 어려움)
영국의 아편수출에 따른 민중항쟁, 김대건 신학생의 약한 체질, 서양과 동양의 전통이 다른 문화충격,최방제 신학생의 병사(위열병, 1837년 11월 26일에서 27일), 조차지인 마카오를 통치하던 포르투갈 정부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불이익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천주교 세종로성당에서 연재하는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정치가 불안해지면 피신하라는 파리 외방전교회 지침에 따라1839년 4월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했으며, 1839년 5월 이동한 필리핀 롤롬보이의 성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원에서 공부할 때에 안정된 환경과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들과 수사들의 친절덕분에 몸과 마음의 건강이 좋아졌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상해로부터 20리가량 떨어진 김가항(金家港)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고, 그곳의 만당(萬堂)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드림으로써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헌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가톨릭 신앙이 전파된 것을 보면 대개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성령의 힘은
성실한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생활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
극동 아시아의 조그마한 반도인 조선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것은
성실한 유학자들이 서적을 통해 학문을 연구한 끝에 스스로 입교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에 당신 성령의 힘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의 섭리일 것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한문으로 쓴 성서와 교리서
또는 윤리와 신학 서적들이 그 당시의 외교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다른 많은 종교 서적들과 함께 읽히던 천주 교회 서적들은
진리를 찾던 조선의 선량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권철신과 이벽을 중심으로 한 젊은 양반 학자들의 학문적인 모임이었던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가 1779년경에는 천주교 신앙을 알고 실천하려는 모임이 되었다.
1783년, 이승훈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북경 선교사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게 했으며,
그 이듬해 이승훈이 귀국하여 이벽,권일신,정약용,약종 형제들과 함께
첫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
성직자나 선교사가 없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조선의 신앙 공동체는
급속도로 성장했으나 정치적 불안과 당파 싸움 및
교리와 마찰을 일으킨 조선의 풍속 때문에 심한 박해를 당했다.
1785년, 형조의 우연한 검거에 의해 야기된 최초의 박해에 이어
크고 작은 박해들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수천 수만 명이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신자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1793년에 조선에 들어온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1801년에 대부분의 교회 창설자들과 함께 순교했다.
목자 없는 조선의 신앙 공동체는 1825년, 로마 교황청에까지 그 어려움을 호소하여
1831년에는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파리 외방 선교회가 이 지방의 선교를 담당하게 되어
1835년부터 몇 명의 프랑스 선교사 들어와서 활동했으나
1839년에는 주교 한 사람과 신부 두 사람이 모두 순교했다.
1845년에는 이 땅에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잠깐 활동했으나 그 다음해에 순교했다.
서구 열강들이 극동 지방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던 19세기 말에는
국내외의 불안이 고조되고 어리석은 정치가들의 쇄국 정책으로 1866년,
외국 성직자들이 선교 활동을 하던 천주 교회에 다시 끔찍한 박해가 일어나
1만여 명의 신자들이 학살되고 십여 명의 성직자들이 모두 살해되거나 추방 되었다.
이렇게 100여 년에 걸친 박해로 적지 않은 신자들이 배교하기도 했으나
학자와 남자들 뿐 아니라 부녀자와 아이들 및 평민과 상인들까지도
신앙을 위하여 용감하게 목숨을 바쳤다.
이 중에서 초기의 순교자들은 증거자료의 미비로 누락되고
1839년부터 1849년까지의 순교자들 중에서 79명이 선택되어
1925년 7월 5일에 복자품에 오르게 되었고,
다시 1866년의 박해를 중심으로 순교한 24명이 1968년 10월 6일에 시복되어
모두 103명의 순교자가 시복되기에 이르렀다.
이 103명의 순교 복자들은 한국 선교 200주년이 되는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에서 시성되어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신자들이 강요받은 것은 주로 세 가지였다.
첫째는 배교할 것,둘째는 신자들이 성명과 주소를 댈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교회 서적과 성물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이에 불복하면 참혹한 형벌을 가했는데 손과 팔,다리에 주리를 틀며
끈으로 살을 톱질하여 베어 내고 치도곤이나 곤장으로 때리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몇 차례의 매를 맞으면 살이터지고 뼈가 부러지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기절하면 감옥에 처넣어 두는데
그 감옥이란 통나무로 된 움집 같은 것이라서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둡고 음산하며
바닥은 습기로 가득 차 신자들의 매맞은 상처는 곪고 썩어 구더기가 생길 지경이었고,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아 굶주림에 지쳐
어떤 사람들은 거적때기를 뜯어서 씹고 있을 정도였다.
많은 신자가 이렇게 비참하게 옥사했는데,
차라리 교수형이나 참수형을 받는 것이 오히려 고통을 덜 받는 편이다.
많은 신자들은 이 같은 혹독한 심문과 매질 그리고 감옥 생활에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며 때로는 심문중에
창조주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유교의 부모 공경과
임금에 대한 충성심에 비교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설파하다가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설명 ; 우리는 신앙 생활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만을 빌며 무사안일한 생활을 꿈꾸기 쉽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과 투쟁하며 복음의 메시지에 따라 살아가려면
비록 박해 시대가 아니더라도 갖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고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을 생각하며
구원의 길을 용감하게 걸어간 순교자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이 무사 안일하기만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은 우리를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불행에서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을 당함으로써 이 세상의 죄악과 불행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순교성인들의 진리에 대한 갈망과 순교 정신은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무사 안일주의에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인용 ; 1877년에 서울의 감옥에 갇혔던 리델 주교는
옥중 생활의 비참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기아로 희생이 된 그들을 보고 너무나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해골이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괴로움과 굶주림과 가려움과 곪아 썩어가는 상처는
그들을 볼 수 없을 만큼 흉악한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류홍렬, '한국 천주 교회사' 상권 p.318)
1845년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신부는 기해년의 옥중 생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교우들은 이러한 감옥 속에 빽빽이 처넣어져 있었으므로 발을 뻗고 누울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그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 지굿지굿한 옥중의 괴로움에 비하면 고문은 문제도 안된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고름 때문에 멍석은 푹푹 썩어 가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되니,
이로 말미암아 고약한 병이 돌기 시작하여 2,3일내에 죽은 교우도 몇이나 있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형벌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
고문하는 곳에서는 용감히 그 신앙을 공표하면서도
이 기갈을 참지 못하여 굴복한 이도 적지 않았다.'
(류홍렬, '한국 천주 교회사' 상권 pp.318-319)
# 9월 20일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성 바울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
한국에는 18세기 말경에 처음으로 몇몇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그리스도 신앙이 들어왔다.
1784년 북경에서 영세한 첫 한국인 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공동체를 형성하고
신앙을 실천하였으니 이는 교회사에 전무 후무한 일이다.
초기부터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겪어야 했고 박해는 100년 이상 계속되어
만 명 이상의 순교자를 냈다.
초기 50년간에는 중국인 사제 두 분의 짧은 사목 활동이 있었을 뿐
1836년에 프랑스에서 선교사들이 몰래 입국할 때까지는
사목자 없이 평신도들만이 용감하고 열심한 신자 공동체를 지도하고 길러 냈었다.
이 공동체 속에서 1839년, 1846년,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103명이 성인 반열에 들게 되었다.
그들 중 열심한 사목자였던 최초의 사제 안드레아 김대건과
훌륭한 평신도 바울로 정하상이 대표적 인물이다.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의 편지에서
(제25신의 발췌, 김대건의 서한, 이원순, 허인 편저, 1975년, 정음사)
이런 군난 때에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무시지시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아니라, 도리어 배주 배은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
씨를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에 이르러 곡식이 잘되고 염글면,
마음에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염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염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염근자 되었으면 주의 의지로 천국을 누릴 것이오.
만일 염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지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온 형제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에 성교 들어온 지5,60년에 여러 번 군난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중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이 없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아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명 아니면 주상 주벌 아니랴.
주의 성의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한 시적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다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또 무슨 일이 있을 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 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은 자 20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 사람들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를 말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은을 빌어,
삼구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관영하고 여등의 영혼 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하노라.
성 바울로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 김남수 주교 편역)
종교도 어디서 왔거나 진정 거룩한 종교라면 어찌 이 나라 저 나라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천주께서 천지 만물을 만드신 목적은 우리에게 당신의 복을 내려 주시고,
당신의 착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을 만드시어 우리를 덮어 주시고 땅을 만드시어 그 위에 우리를 살게 하시고,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시어 우리를 비추시고 초목과 금수와 금은동철을
우리가 향유하고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모태에서 태어나 장성할 때까지 가지가지 은혜가 이와 같이 한이 없으니.
인간의 마땅한 본분은 과연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밟고 살면서 먹고 입기만 한다면
인류를 내신 분의 은덕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버지가 집을 짓고 살림을 차려 아들에게 주어 쓰게 하였는데도
아들이 그 집에 살며 그 살림을 사용하면서도 제가 잘난 체하고,
부모를 섬기며 그 은덕에 보답할 도리와 근본을 모른다면 어찌 효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불효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주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를 내시고 기르시고 돌보시며 인도하십니다.
굳이 죽은 후에 받을 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당장 지금 받고 있는 은혜가 극진하여
그분을 받들어 섬긴들 어찌 만 분의 일이나 보답한다 하겠습니까?
천주를 섬기는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려니와 은밀한 말을 들추어내거나
괴상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잘못을 고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천주의 계명을 지키려는 것뿐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길다 해도 백 년을 넘기지 못하는데
자기 이익만을 탐하여 얻지 못할 것을 얻으려 애쓰고
이미 얻은 것을 잃지 않으려 걱정하는 사이에 어느덧 늙고 만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부귀 공명도 반드시 허무로 돌아가고 맙미다.
부귀 공명마저 일평생 애써도 얻지 못하는 것인데
이 헛된 꿈을 깨기가 그다지 어렵단 말입니까?
세상에 있을 때에 정신이 흐려져 깨닫지 못하다가
육신이 죽은 뒤에 뉘우친다 해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기에 목을 벨 도끼가 눈앞에 있고 몸을 삶을 가마솥이 제 뒤에 있어도
꿋꿋이 굽히지 않은 사람이 대대에 적지 않습니다.
이것도 참된 종교의 증거입니다.
교리의 참되고 거짓됨이나 사리의 바르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얼토당토 아니한 말로써 공격하고 배척하고 있으니,
그저 외국의 종교라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금은 산지를 가리지 않고 순금이면 보배가 아니겠습니까?
종교도 어디서 왔거나 진정 거룩한 종교라면 어찌 이 나라 저 나라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수명을 감하고 바쳐서 천주교의 참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몸도 장차는 죽을 목숨이오니,
감히 말해야 할 이 시각을 만나 한 번 머리를 들고 길게 외치지 못하고
슬프게도 입을 다물고 죽어 버린다면 산같이 쌓인 회한을
장차 백 대 후세에 이르기까지 폭로할 길 없기에, 엎드려 청하오니,
지금 한 번 밝은 빛으로 굽어보시고, 도리가 참된지 거짓인지, 올바른지
그릇된지 자세히 판단한 다음, 위로는 정부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일변하여 바른길로 돌아와, 금명을 풀고 체포하는 법을 거두며,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제 고향에 돌아가
제 직업을 즐기면서 함께 평화를 누리게 해주시기를 천번 만번 바라고 또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