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를 거론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삼재(三齋)'와 '삼원(三園)'이다. 여기서 삼재(三齋)는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말하며, 삼원(三園)은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을 가르킨다.
그래서 단원 김홍도하면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에 뛰어난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그가 안동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정작 안동 사람들도 대부분 잘 모르고 있다.
단원이 서른 일곱살이던 1781년 조선 22대 왕인 정조의 어진(초상화)을 그리고 그 공(功)으로 1783년 12월 28일 안기역도(安奇驛道) 역참(驛站)의 찰방(察訪)으로 제수받아 1786년 5월까지 약 2년 반 정도를 안동에서 근무를 했다.
▲ 정조의 어진
안기도 역참(驛站)은 지금의 안동시 안기동에 위치했던 역도(驛道)로써 마필(馬匹)이 상등마, 중등마, 하등마를 합쳐 모두 114필이였으며 역원의 인원이 역졸과 노비를 합쳐 1,300명이 넘을 정도로 큰 역이었다.
역(驛)체제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시대를 거쳐 몇 번의 체제가 바뀌면서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41역도(驛道), 528개의 속역(屬驛)의 체제가 확립된 것으로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다.
역참(驛站)은 조선시대 육상 교통기관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이르는 중요한 도로에 마필(馬匹)과 관원을 두어 중앙과 지방간의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물자를 운송하며, 사신의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및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주로 담당하였다. 또한 왕래인이나 범죄인을 검색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안기(安奇)'라는 명칭은 고려 공민왕이 안동에 몽진(蒙塵)왔던 인연으로 '편안히 기거할 수 있는 곳이다.'는 의미로 이름을 내렸던 것이며 안기역에 놋잔 14개를 특별히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안기역도(安奇驛道)의 소속 속역(屬驛)인 역참(驛站)은 안동, 의성, 운산, 영양, 영해, 화목, 금소, 청송, 진보, 각산, 청운, 청로 등 12개의 역참을 두고 있었다.
▲ 「징각 아집도」
그가 안기 찰방을 재수받자 詩,書,畵가 뛰어나 조선 삼절(三絶)로 칭송받으며 예조판서까지 지낸 문신 서화가로 그의 스승이였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나라에서 기술자(중인)를 등용한 것이 본시 여간해서 없었던 일이며 단원은 서민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라고 그의 '단원기(檀園記)'라는 글에 소감을 남겼다.
당시 단원은 동인(東人)들과 잘 어울리고 그림 이외에 거문고, 퉁소, 생황, 당비파 등 악기 연주에도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어 안기찰방을 찾아오는 동인들과 어울린 연회에서 악기 연주 솜씨를 보이며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 단원이 임청각 주인 이의수에게 그려준 「갈대꽃과 게」라는 작품
김홍도는 안기찰방으로 재직할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號)를 따서 자신의 호를「단원(檀園)」이라 스스로 칭했다. 그가 이유방의 문사로서의 고상하고 밝으며 그림이 기묘하고 아취(雅趣)가 있는 것을 사모한데 따른 것이다. 단원이 안기찰방 재직 기간인 1784년 여름 안동의 권문세가인 임청각의 주인이였던 이의수에게 그려준 「갈대꽃과 게」라는 작품에 "갑진년(1784년) 여름에 단원이 임청각 주인을 위해 그리다"라는 화제가 있는데 이 그림은 단원이 지역 사족에 그려준 첫 사례의 작품이며 '단원'이라는 아호가 그림에 나타나는 초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당시 안동에서 그가 그린 청량산 아회(雅會) 모습을 담은 「오원아집도」에도 '단원'이라는 아호가 처음 나오는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김홍도가 '단원'이라는 호를 안기찰방 시절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찰방(察訪)은 조선시대 각 도(道)의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문관(文官) 종육품(從六品) 외관직(外官職)으로 같은 종육품이였던 현감보다는 서열상으로는 앞선 직책이였다.
단원 김홍도 이전에 14대왕인 선조 때 고산 윤선도도 안동의 안기찰방으로 임명되었지만 나라를 개혁할 큰 듯을 품고 있던 그는 사실상 조정에서 발언권이 거의없는 외직이였기 때문에 적합한 사유를 대어 안기찰방 벼슬을 사양하고 끝내 맡지는 않았다.
단원 김홍도는 안기 찰방이 되어 삼십리 마다 설치된 12개역 역참에 속해있는 구실아치 1,300명 이상을 관리해야 하는데다가 수많은 역마(驛馬)를 총괄 관리했기 때문에 늘 바쁘게 보냈다. 특히 매년 4월 8일에 역의 평안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안기역의 축제인 「오토안마제(五土安馬祭)」를 직접 주관하였으며 1784년 8월 17일에는 경상도 관찰사인 이병모가 청량사를 순찰할 때 주변지방관리인 흥해군수 성대중, 봉화현감 심공저, 영양현감 김명진, 하양현감 임희택, 등과 청량산에 모여 아회(雅會)를 열며 풍류를 즐겼고, 그 후에도 모임을 몇 차례 더 했다. 그 때의 아회(雅會) 모습을 담은 '청량취소도', '오원아집도', '징각아집도'를 안동 안기찰방 재직 중에 그렸다.
▲ 청량산의 아회(雅會) 모습을 그린 「오원아집도」
단원 김홍도가 남긴 흔적은 지금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동에 있는 '채화정((경북유형문화제200호)'에 그가 재직 당시 쓴 '담락제(湛樂齊)'라는 현판 글씨가 남아 있다. '채화정'은 조선 효종 때 만포 이민적이 학문을 닦기위해 지은 건물로 정자와 작은 연못 등이 잘 어우러져 당시 안동 지방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여서 단원이 자주들려 이민적의 아들 이한오(李漢伍)와 풍류를 즐기며 친하게 지내는 사이여서 '담락제'의 현판을 써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담락제' 현판은 도난 등을 우려하여 지금은 따로히 보관 중이라고 한다.
▲ 안동시 풍산읍 입구에 위치한 '채화정'의 모습들
▲ 단원이 쓴 '담락제' 현판(아랫쪽)
단원 김홍도는 풍채도 좋고 마음씨도 넉넉하여 조희룡이 쓴 '호산외사'에는 "(김홍도는) 풍채가 아름답고 마음 씀이 크고 넓어서 작은 일에 구속됨이 없으니 사람들은 신선같은 사람이다'라고 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단원 김홍도는 안기찰방 재임 기간 중에 선행을 한 흥미로운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가 안기찰방을 지내던 어느 춘궁기에 극심한 봄가뭄까지 겹쳐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했다. 그는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관아의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고 자신은 멀건 풀죽으로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 무렵 한 지인으로부터 연락이왔다. 노모가 곧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그 노모의 소원이 자식이 장가를 가는 것을 보아야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노모의 소원을 들어 드리려고 처자를 물색해 놓기는 했는데 장가들 밑천이 없으니 좀 변통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답답한 마음을 덜어보려고 밖으로 나선 그는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어느 절 앞에 이르게 되었다. 안기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신라시대에 세워진 '법림사(法林寺)'였다. 절 마당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전탑앞에서 기원을 드리고 있었고 또 일부는 그 옆에 있는 돌확(곡식을 곱게 갈아주는 농기구)에다 돌을 던지고 있었다.
▲ '법림사'(지금의 안동역)에 세워진 오층전탑
그런 모습들이 조금은 기이하다는 생각이 든 김홍도가 그 연유를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저 전탑을 향해 소원을 빈 다음 돌확에 돌을 던져 그것이 들어가면 부처님이 소원을 들어 주고, 그렇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김홍도는 그 말이 딱히 믿기지는 않았지만 마침 친구의 일로 고민하던터라 전탑앞에서 기원을 하고 돌을 던져 보았다. 운이 좋아서였는지 돌은 정확하게 돌확안으로 들어 갔다. 그 후 몇 일이 지나자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려 달라면서 돈 3천 냥을 보내왔다. 그는 그 돈의 일부를 친구에게 보내 친구가 혼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해 주고 남은 돈으로 술을 마련해 동인(東人)들과 정담을 나누었다고 하는데, 그 소문이 널리퍼져 당시 '법림사(法林寺)'를 찾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 났다고 한다.
▲ '법림사'절 마당(지금의 안동역)에 있던 당시의 돌확
이 일화는 조선 후기 서화가 우봉(又峯) 조희룡(趙熙龍)이 편찬한 '호산외사(壺山外史)'에 수록되어 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법림사(法林寺)' 건물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지금의 안동역이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 오층전탑과 돌확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옛 문인이나 예술가 그리고 명성이 높았던 선비들이 남긴 흔적과 기록을 바탕으로 각 지방 마다 관련 축제 등으로 관광자원화한 지역이 많지만 김홍도는 조선을 대표하는 유명 화가였지만 그와 관련한 흔적과 자료를 토대로 관광자원화한 곳은 한 곳도 없다. 그가 태어난 경기도 안산시에 단원 전시관이 있고 단원구라는 행정 구역이 있을 뿐이며 안동시 역시 '안동시 금명로 단원길'이라는 도로 주소명만 사용하고 있는 정도이다. 따라서 앞으로 안동역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를 계기로 김홍도의 일화가 남아있는 신라 때의 '법림사'(현 안동역)를 복원하고, 안기 역참 및 안기역 축제였던 '오토안마제(五土安馬祭)'의 재현과 김홍도의 선행 일화 등을 바탕으로 '스토리텔링(Storytelling)화'하여 단원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해 볼 필요도 있겠다는 소회를 이 글을 쓰기 위한 사실 확인과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잠시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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