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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9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 1사무 24,3-21
복 음 : 마르 3,13-19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학창 시절에 부러운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과연 어떤 친구를 부러워했을까요?
공부 잘하는 친구, 운동 잘하는 친구, 그림 잘 그리는 친구,
노래 잘 부르는 친구, 춤 잘 추는 친구….
사실 이런 친구에 대해서는 그렇게 부럽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부러웠던 친구는 모발이 얇은 친구입니다.
저의 머리카락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완전한 직모입니다.
별명도 머리카락에 관계되는 것뿐입니다. 돼지털, 빗자루 등입니다.
완전히 뻣뻣한 직모인 머리카락을 넘겨 가르마를 만들 수 없었고,
조금만 길어지면 사정없이 뻗치는 머리카락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스포츠머리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싫어했기에, 모발이 가늘어서 자유자재로
머리 스타일을 만드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하지만 요즘 학창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너의 머리카락이 너무 부럽다.”라며 이야기합니다.
당시의 가는 모발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들 대부분 머리카락이 거의 없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제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리곤 했는데,
이제는 반대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미장원에 가도 “머리카락 숱도 많고, 모발이 이렇게 튼튼하니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콤플렉스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이제는 자랑할 수 있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으로부터 나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훌륭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만족스럽지 않은 자기 모습도 언젠가는 만족스러워지지 않을까요?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포기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히 실망할 삶이 아닌 감사할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함께할 제자 열둘을 뽑으십니다.
그들을 뽑으신 이유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제자들의 모습이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이 어부였고, 세리도 있고, 열혈당원도 있습니다.
능력이 많은 유능함과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곧바로 뿔뿔이 흩어진 것만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부족하고 나약함이 가득한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후에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들 중에 유일하게 포기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요.
자기를 이끌어 줄 주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포기와 좌절에 가까이 가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기쁘게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분께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이토록 당신께서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성소는 당신이 원하신 것이요, 당신이 주신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나아온' 이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 두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갱신하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선포하십니다.
‘세우다’란 말의 원어의 뜻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탄생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결국 이 '열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μαθετεσ)라는 의미와
동시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도'(αποστολοσ)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제자요 사도인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 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처럼,
한 몸을 이루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서로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스승이 계시는 곳에 제자도 있어야 하고, 스승이 파견한 일을 사도가 하게 됩니다.
곧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 갑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와 함께 지내고 있는가? 나 자신인가? 예수님인가?”
<오늘의 말·샘 기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필라델피아에서 올라온 청년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청년들의 세례명은 ‘알베르토, 가브리엘, 미카엘, 루시아, 레지나’입니다.
모두들 성당에서 함께 지냈고, 청년활동을 열성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기쁘게 지내고,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기에 ‘사자성어’는 잘 몰랐습니다.
저는 올해가 용의 해이기에 ‘화룡점정, 용두사미’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청년들은 눈을 크게 뜨고 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끝으로 새해의 덕담으로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은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짧은 저의 식견이지만 청년들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말의 지평을 더욱 넓혀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독서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재판관이 되시어 저와 임금님 사이를 판가름하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송사를 살피시고 판결하시어, 저를 임금님의 손에서 건져 주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은 용맹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 용맹함으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런 다윗에게 이렇게 축복해 주었습니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부제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다.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해치려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함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복음서는 그 제자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름이,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해야 합니다.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산에 오르신 예수님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세우시고 사도라 이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
하느님을 만나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는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는 말씀대로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불렀는데, 산에 오르셔서 부르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기도하시고 선발했습니다.
그런데 뽑힌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으며
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내세운 사람인데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적인 베드로 등등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 아니면 모르셨을까요?
제가 뽑는다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 왔든지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의 관계는 적대관계입니다.
그러나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주님의 사람이 된 것을 기뻐합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하였습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과 마음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으면 유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9,28-29).고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탄을 쫓아낸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접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얇은 귀, 두꺼운 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제 사울은 “주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라고 결심하고
요나탄에게 약속했지만, 오늘 그 마음이 바뀌어 죽이려 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마음이 자꾸 바뀌는 것인데,
사실 인간의 결심이라는 것이 그리 항구하지 않고 자꾸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서약을 하는 수도자들에게 결심하지 말고 서약하라고,
서약도 인간에게 하지 말고 하느님께 서약하라고 강론에서 충고합니다.
그렇지요.
결심은 혼자 하고 약속은 둘이 하는 거지요.
그러니 혼자 한 결심은 언제고 자기 마음대로 깰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약속은 일방적으로 깰 수 없고,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깰 수 있는 건데
사람 간에는 혹 약속을 헌신짝처럼 깨어버리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의 서약은 하느님과 약속이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사울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느님께 항구한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입니다.
어제 결심한 대로 사울 안에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면 죽이지 않는데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게 되면 시기심과 증오심이 되살아납니다.
그런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느님이 살아 계시면 인간적인 악감정은 죽어버리고,
하느님이 죽어계시면 인간적인 악감정은 되살아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왜 이렇게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되고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항구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오늘 다윗의 말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다윗이 임금님을 해치려 합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곧이들으십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동굴에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임금님을 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니, 나의 주군에게 결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살려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사울과 다윗 주변에
인간적인 조언을 하는 무리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귀가 얇았고 다윗은 귀가 두꺼웠습니다.
귀가 얇다는 말이 있지요?
인간의 말을 걸러내는 기능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말씀만 받아들이고 인간의 말은 걸러내는 기능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느님의 말과 인간의 말을 걸러낼 수 있었습니다.
확고한 식별 기준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니 내가 어찌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사람도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니 내가 해선 안 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진정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하느님 뜻대로 해야지 내 감정대로 하거나 내가 감히 어찌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과 기준이 다윗에게 있었던 겁니다.
귀가 뚜꺼워야지 얇아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인간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울과 다윗의 얘기에서 가르침 받고 교훈 삼는 오늘 우리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주님께서는 제자들 열둘을 부르시어 사도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주셨다.
예수께서 이제 그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며, 당신이 하시는 일에 협조자가 되게 하신다.
공생과 파견이라고 할 수 있다(6,6-13).
예수께서 열두 사람을 가려 제자단을 만드신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함께 사귀고 또한 그분이 하신 것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분에게 흠뻑 젖어 세상에 전할 말씀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발하신 열두 제자들은 어부, 세관원, 혁명당원도 있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아도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것은 교회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모여온 것을 말하고
주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가톨릭적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은 받아들이려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것임을 제자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새로운 이름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시몬은 베드로라 불렸고, 사울은 회개하고 나서 바오로가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들이라 하였고, 레위를 마태오라고 불렀다.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은 신원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가며 그분과 함께 그분의 여정을 함께 하는
그분의 친구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사도들이 복되다는 것은 예수님의 친구로 함께 간다는 것이다.
주님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님을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닮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다.
모으기와 가르기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어제 복음으로 예수님의 제1단계 활동은 마무리됐다.(1,14-3, 12)
오늘 복음으로 예수님의 제2단계 활동이 시작된다.(3,13-6,6)
우리는 예수님의 제1단계 복음선포의 활동을 통해서 복음의 위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았다.
인격적 매력까지 지니신 예수께서는 몇 사람을 뽑아 가까이 두시면서
가르침과 병자치유 및 구마기적을 통하여, 그리고 죄 사함과 안식일법,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한 식탁공동체 등의 문제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은 특별 부류와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조금씩 밝혀 주셨다.
그러니까 제1단계 활동은 예수님의 탐색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제2단계 예수님의 활동은 비유설교와 병자치유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핵심적 의도는 설교와 치유에 있다기보다
이를 통하여 ‘모으기’와 ‘가르기’를 하는데 있다.
복음의 본질이 원래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제2단계 복음선포 활동의 시작으로서 전형적인 ‘모으기’ 작업의 한 부분이다.
예수께서는 일단 산으로 올라가셔서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불러놓고
그중에서 열두 명을 뽑아 제자로, 그리고 동시에 사도로 삼으셨다.
복음의 보도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간단하지만
눈을 감고 이 장면을 재구성하여 떠올려 보면
이는 분명 주교 서품식 내지는 사제서품과도 같은 것이다.
산은 거룩한 장소다. 산은 야훼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다.
산은 기도하는 곳이며, 하느님의 靈과 命과 계약을 받드는 장소이다.
(출애 3,1-4,17; 19,1-31,18; 1열왕 19,8)
그 옛날 시나이산이 바라보이는 광야에서
모세를 시켜 이집트를 탈출한 온 이스라엘 백성을 12지파로 갈라 주신 하느님처럼
예수께서도 이러한 산에서 12명의 제자를 선발하신 것이다.
12명의 제자를 특별히 뽑아 세운 목적 또한 아주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다.
선발의 목적은 “열둘을 당신 곁에 있게 하고,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14-15절)이다.
이 목적을 한씩 분석하여 보자.
첫째, 열둘을 예수님 당신 곁에 두게 하심은 그들을 弟子(disciple)로 삼는다는 뜻이다.
열둘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아직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배운 것이 없으면 가르칠 수도 없을 것이 아닌가.
둘째,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심은 그들을 使徒(apostle)로 삼으심을 의미한다.
사도란 실제로 세상과 사람들에게 파견되어 제자로서 배운 바를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셋째,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신다 함은 복음 선포의 목적이 하느님의 구원임을 뜻하는 것이다.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은 늘 마귀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도 그렇거니와 세상을 향한 사도들의 파견도
마찬가지로 마귀의 세력을 세상에서 몰아내고
하느님의 영이 다스리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12제자의 명단이 공개되어 있다.
마르코 복음의 12제자 명단은 마태오복음(10,1-4)과
루카복음(6,12-16)의 명단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요한복음에는 아예 없다.
마르코는 12제자들 중에서 시몬을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열거하지 않고
‘베드로’라는 이름을 따로 떼어놓았고,
베드로 다음 자리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배치하고
그들에게 ‘보아네르게스’(천둥의 아들들)라는 이름을 덧붙였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께서 특별히 아끼던 제자들이었고,
이들은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활동의 특별한 목격자이자
동시에 증인이 되기도 한다.(5,37;9,2;14,33)
예수를 팔아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는 맨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배반자였으니(14,10) 꼴찌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줄을 처음부터 아셨을 것인데
왜 제자로 뽑으신 것일까?
예수께서 차라리 그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나,
성서의 기록이 성취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14,21)고 말씀하셨지만,
유다의 선발은 여전히 신비로 남는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또 다른 유다를 수없이 보아왔다.
어쩌면 나도 그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를 경계로 삼아 우리 자신의 제자와 사도의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이승화 시몬 신부
사울은 하느님을 저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받은 기름 부음을 존중합니다.
사울에 대한 인간적인 판단보다
하느님이 세우신 사람임을 먼저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그가 하느님을 저버렸지만
그를 세우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자세,
이 자세는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필요합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인이라고 해서 천사라고 봐도 안되고
그 사람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더라도
세례받은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신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참된 왕의 자세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이스라엘 왕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고
덕분에 참된 지도자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식별할 수 있는 역량을 얻은 것이죠
오늘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들도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을 통해
더 나은 신앙생활을 향한 식별을 배우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아가는 하느님 사랑의 여정에서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도록 배우는 자세입니다.
서로가 맺은 결실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안에서 우리도 성장할 때
비로소 건강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느님께 더 깊이 나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마리문모 수녀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르 3:14-15)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열두 사도들을 뽑습니다.
열둘은 직업도 다르지만
성격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릅니다.
그런 그들이 진정한 사도로 변모 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몸소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제자들이 사도로 변모되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 시간만이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자라나고
하느님의 용서가 발휘되고
하느님의 자비가 퍼져나가게 해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