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가 되자 분당에서 판교테크노밸리로 접어드는 길엔 차량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여유가 있던 길이다. 그 시각 신분당선 판교역에선 수많은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이 청바지에 셔츠, 면바지에 남방차림의 캐주얼이다. 한국 ICT의 새 메카로 자리 잡은 판교테크노밸리로 출근하는 행렬이다.
20만평 규모의 판교테크노밸리는 지금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지난해 3만명 정도였던 이곳 주요기업 직원들은 지금 6만명 이상으로 늘었다. 협력업체나 금융기관 등의 서비스 인력을 포함하면 10만명이 훨씬 넘는 인원이 이곳에서 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 판교테크노밸리 운영기획팀 과장은 “올해 초 조사 때 5만8000명이 약간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엔씨소프트 한 회사에만 2000명이 넘는 인원이 근무하고 있다. 지난해 조사 때보다 1년 사이에 배 정도로 늘었다. 사업이 완료되는 내년에는 7만명이 훨씬 넘는 인원이 근무하게 될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엔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이나 협력업체 문구점 식음료업소 등 종사자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1년 새 입주업체 임직원만 2배로 늘어
판교밸리 인근의 판교역 SK허브 오피스텔의 박민선 차장은 “2015년에 완공되면 판교테크노밸리에만 상주인구 10만명, 연관 인원까지 합하면 18만명이 활동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판교밸리는 성남시 분당구 판교택지개발지구의 한 부분이지만 이미 새로운 시로 나눠도 될 만큼 규모를 갖춘 도시로 성장했다는 얘기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인원이 소비가 아닌 생산활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판교밸리 입주 기업 가운데 시가총액 수조 원대 상장사가 여럿이고 이곳 업체들의 매출을 모두 합하면 수십조 원대에 이를 것이란 추정이 나오고 있을 정도다.
이승 과장은 “올해 초 조사 때 기준으로 회원사 162사, 임차업체 708사 등 870사가 들어와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사무실 등이) 중복 계산된 업체를 빼면 852사가 입주했는데 이후에도 계속 입주가 이어져 정확한 업체 숫자는 아직 파악이 안 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가 말하는 회원사는 경기도가 이곳 토지를 공급할 때 심사를 거쳐 선정한 우량 또는 우수 업체들로 판교밸리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기업들이다.
판교밸리의 위상은 업체들 숫자가 아니라 이곳에 들어온 주요 업체들의 면면을 보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이곳엔 한국의 간판 격 IT CT 업체들과 다수의 BT 업체들이 입주했다. 특히 게임산업의 경우 한국 게임의 메카를 넘어 한국 게임산업 자체라고 해도 될 만큼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거의 들어와 있다. 예를 들어 시가총액 4조원이 넘는 넥슨이나 엔씨소프트는 물론이고 NHN엔터테인먼트와 네오위즈, 웹젠, 위메이드, 넥슨지티, 엑스엘게임즈 등 이름을 대면 알만한 회사들이다. 또 안랩이나 윈스 쏠리드 같은 보안업체와 솔브레인, 동진쎄미켐, 원익, 샘텍, 에이텍 등 반도체나 LCD 관련업체, 차병원그룹이나 한국파스퇴르연구소를 비롯해 크리스탈지노믹스, 서린바이오, 서흥캅셀, 제넥신 등 바이오 업체들도 명함을 내밀고 있다. 이외에 콘텐츠나 미디어 업체들도 다수 들어왔는데 플랫폼과 게임 사업을 하고 있는 아프리카TV를 비롯해 시공미디어와 NS홈쇼핑, 디지털조선 등이 눈길을 끌고 있다. 주요그룹 계열사로는 삼성그룹의 삼성테크윈이나 삼성중공업 등의 R&D시설이 들어왔거나 입주를 준비하고 있으며 SK그룹의 SKC&C와 SK케미칼, SK텔레시스, LIG넥스원, 포스코ICT, 한화 등의 사업부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판교테크노밸리 측은 올해 초 조사 결과 이곳 입주업체의 연간 매출액이 54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물론 이 수치엔 판교밸리 입주업체들이 다른 지역에서 생산한 것까지 포함됐지만 이곳에서 나오는 생산유발 효과만 따져도 10조원은 훨씬 넘어선다는 게 경기도의 추정이다. 게다가 개발이 완료되는 2015년 말까지는 적어도 300개 이상의 업체가 더 입주할 것으로 보여 이 규모도 계속 커질 전망이다.
이 과장은 “현재 판교테크노밸리의 개발사업은 80% 이상 진행됐다. 많은 기업들이 테헤란로에서 이주해 왔는데 대기업과 중기업 중소기업이 고르게 배치돼 있다. 중소기업이라도 IT 기반의 기술력을 갖춘 곳이 대부분이어서 성장 잠재력은 대단하다. 이곳에 들어온 거의 모든 기업이 연구중심이거나 연구소를 끼고 있어 탄탄한 기술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소개했다.
첨단 건물과 공원, 공공시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판교테크노밸리
성공신화를 쓰는 판교밸리
그 실력은 실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판교테크노밸리 인근에 사옥을 지어 입주한 에셋플러스자산운용의 강방천 회장은 “판교는 금쟁반에 옥구슬이 굴러다니는 명당”이라며 풍수로 볼 때 돈이 모이는 곳이라고 했다. 실제 지금 판교의 많은 기술기업들이 성공신화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지난 5월 26일 다음과의 합병을 발표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카카오는 판교밸리 기업 중에서 성공스토리를 쓰기 시작한 대표적인 회사다. 서울 역삼동 작은 건물에 있던 카카오가 판교밸리 중심부에 자리 잡은 H스퀘어로 이주한 것은 2012년 9월이다.
카카오는 그해 처음으로 이익을 냈고 이후 직원이 급속도로 늘어나 현재는 이주 당시의 2배가 넘는 수준이 됐다. 회사 측은 카카오의 플랫폼 사업이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카톡의 대표적 게임인 애니팡은 그해 10월 롯데백화점과 선데이토즈 등을 파트너로 잡았고, 또 다른 게임 아이템인 아이러브커피는 같은 달 카페베네와 파티스튜디오를 파트너로 선정한 바 있다. IT업계에선 카카오와 다음의 합병이 완료되면 다음의 게임사업 부문도 이곳으로 이주하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대해 카카오 커뮤니케이션팀의 정성열 씨는 “다음과의 합병 후 어떤 부서가 이곳으로 올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합병 자체가 급선무이기에 다른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합병 이후에 검토할 것이다. 다만 통합법인 ‘다음카카오’는 제주에 존속하게 된다.
외부에선 양쪽의 사업을 보고 게임 부문이 이곳으로 합쳐질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결정된 것은 없다. 다만 경기도나 성남시가 게임 산업 육성에 적극적이기 때문에 고려는 할 것이다. 아직은 합병을 스터디 하는 중이며 큰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국내 최대 게임업체인 넥슨은 정부 규제와 글로벌 경기 둔화라는 두 악재를 맞았지만 상대적으로 양호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최현우 넥슨 홍보실장은 “지금 게임산업의 성장이 둔화됐지만 넥슨은 매출의 70%를 해외에서 올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 월드컵 분위기를 반영해 내놓은 축구게임이 잘 나가는 편이다”라고 설명했다. 실제 넥슨은 지난해 9월 이곳으로 이주한 뒤 모바일 게임에서 연속으로 두 개의 대박을 터뜨렸다.
“올 1월 말 출시한 ‘영웅의 군단’ 모바일 게임은 판교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넥슨’ 이름을 단 모바일 게임 중 가장 성과가 크다. 구글플레이의 게임 매출 리스트 톱10에 17주간 올라간 대박 게임이다. 모바일 게임은 라이프가 길지 않은 게 일반적인데 아직까지 상승세가 유지돼 더욱 좋은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최현우 실장의 설명이다. 넥슨은 월드컵을 겨냥해 최근 출시한 ‘FIFA 온라인3 모바일’도 구글플레이 톱10에 이름을 올려 연속으로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이들 외에도 올해 엔씨소프트가 지난해보다 20% 정도 신장된 9000억원대 매출을 예상하고 있고 네오위즈게임즈나 동진세미켐, 솔브레인 등도 실적향상을 전망하면서 이 지역 입주업체 대부분이 지난해보다 향상된 실적을 기대하고 있다.
외국인 벤치마킹 코스로 부상
성공신화가 퍼져나가면서 판교는 지금 외국인들의 벤치마킹 코스가 됐다. 러시아와의 월드컵 첫 경기가 열린 지난 6월 18일엔 중남미 도미니카공화국의 호세 델 카스틸리오 산업부 장관 등 경제통상 사절단이 카이스트의 안내를 받아 판교밸리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카스틸리오 장관은 “판교 IT 밸리를 모델로 새로운 산학 클러스터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도미니카공화국은 카이스트의 제안을 받아 자국 자유무역지구에 모바일 게임 허브센터를 설립하고, 한국 콘텐츠 기업들은 이를 교두보로 삼아 중남미 시장에 진출하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4월 23일엔 스위스 취리히 주정부 관계자를 비롯한 경제사절단이 판교밸리 내 퓨처로봇과 에이텍 등을 방문해 기술교류 확대와 스위스 기업의 투자 가능성 등을 논의했다.
지난해 10월 말엔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 시의 시장 등 16명의 사절단이 이곳을 찾기도 했다. 어바인 시는 한국 자치단체의 벤치마킹 코스로 많이 이용되는 곳인데 이번엔 오히려 어바인 시가 판교를 벤치마킹하겠다고 왔다. 사절단엔 어바인 시 도시개발을 총괄하는 어바인 컴퍼니와 파이브 포인트 커뮤니티 대표 등 비즈니스 리더들이 다수 동행해 어바인의 미래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를 모색했다.
판교밸리의 성공 이유 있었네
판교 자체가 젊은 신도시이니 그 안에 자리 잡은 판교밸리는 더욱 젊다고 할 수 있다. 2009년 기반공사가 끝나고 그해 말 농우바이오, 이랜택, 윈스 등 35사가 참여한 판교벤처밸리의 입주가 시작됐으니 판교밸리는 이제 4년이 갓 넘은 셈이다. 그 젊은 판교밸리가 성공한 첫 번째 요인은 토지를 공급할 때 땅을 팔아먹는 차원이 아니라 산업육성 차원에서 접근했다는 점이다. 경기도는 판교밸리의 일반연구용지와 초청연구용지는 감정가로, U스페이스 등 상업시설이 들어서는 부지는 낙찰가로 공급하면서 철저하게 용도제한을 했다.
이승 판교테크노밸리 과장은 “경기도는 이곳 토지를 분양할 때 엄격한 기준을 정해 대상자를 선정했다. 연구용지 분양시 입주심의위서 타당성을 검토해서 업체를 선정했다. 또 회원사가 임대하거나 재임대는 할 수 있도록 하되 전매제한기간을 10년으로 묶었고 지정용도를 20년간 바꾸지 못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성공 요인은 다른 지역에 비해 집적도가 매우 높고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판교밸리의 면적은 20만평이나 되지만 크게 보면 네잎 클로버 모양의 네 블록으로 나눠진다. 각각의 블록에 같은 업종의 기업들이 몰려 있는 데다 다른 블록에 있더라도 십자가형으로 건설된 중심축을 따라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판교밸리 전체가 한 단지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공간적으로 집적돼 있어 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게임을 비롯한 주력업체들이 협력사나 관계사와 함께 입주해 시너지를 발휘하기 쉽고 창업기업을 육성하기에도 좋은 구조인 점도 판교밸리의 참여도를 높였다.
특히 외부 접근성이 뛰어나 강남의 연장선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판교밸리만의 매력이다. 신분당선을 이용하면 강남역까지 15분이면 오갈 수 있는 데다 경부고속도로와 분당-내곡 간 도로, 수서-분당 간 도로, 수도권외곽순환고속도로 등이 사통팔달로 통한다. 강남은 물론 구로디지털단지나 광교 대덕 등과도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다. 사원의 대부분이 20~30대인 테헤란밸리의 많은 기업들이 망설이지 않고 이곳으로 온 것도 그래서다.
다양한 신기술 교육 기회
다양한 신기술을 익힐 수 있는 산학연계가 잘돼 있는 점도 판교밸리의 매력이다.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이 판교밸리에 마련한 콘텍아카데미는 최근 신약개발 사업화를 비롯한 BT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곳에선 BT 외에도 IT와 CT, 반도체, 융합기술 등 200여 강좌를 구성해 서울대 강의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판교밸리에는 또 소프트웨어진흥협회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시스템반도체진흥센터와 한국전자부품연구원(KETI)의 SW-SoC융합R&BD센터(소프트웨어-시스템반도체 융합 R&BD센터) 등이 들어서 있어 최고 수준의 연구개발을 뒷받침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의 간판급 기업들이 몰리면서 상승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포럼네트워크에서 수시로 포럼을 열어 기업 간 네트워크 형성이나 공동연구, 공동사업 등을 지원하기도 한다.
이승 과장은 “판교테크노밸리지원본부는 지금까지 하드웨어 구축에 주력했다. 앞으로는 소프트웨어 진행에 주력할 것이다”며 기업들의 기술 수준 향상에 주력할 방침을 밝혔다. 한편 성남시에선 자체적으로 동호회 활동을 지원하는 대기업과 달리 동호회 활동이 어려운 중소기업 근로자들을 위해 동호회 지원을 하거나 문화콘서트를 여는 등 입주기업들의 창의력을 살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6호(2014년 07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