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불치 (六不治)
사마천의 사기 <편작열전>에 보면
어떠한 명의라도 도저히 고칠 수 없는
6가지 불치병(不治病)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 환자가 교만하고 방자하여
내 병은 내가 안다고 주장하는 환자.
(驕恣不論於理, 一不治也라)
내 병은 내가 안다고 하면서 주관적인 판단만 중요시하고,
정확한 의사의 진료와 충고를 따르지 않는교만한 사람은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둘째 : 자신의 몸을 가벼이 여기고
돈과 재물(財物)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고칠 수 없다고 합니다.
(輕身重財, 二不治也라)
몸은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돈과 명예를 중시하여 몸을 가벼이 부린다면
이것 또한 불치병이라는 지적입니다.
셋째 : 음식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사람은 고칠 수 없다.
(衣食不能適, 三不治也)
옷은 추위를 견딜 정도면 적당하고,
음식은 배고픔을 채울 만 하면 적당한 것인데
지나치게 음식을 탐하고 편안한 것만 쫓는 환자는
어떤 명의라도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 : 음양(陰陽)의 평형이 깨져서
오장의 기가 안정되지 않는 사람은 고칠 수 없다.
(陰陽幷藏 氣不定, 四不治也)
음양이 장기를 장악하여
혈맥의 소통이 단절되면 기가 불안정해져서
돌이킬 수 없다는 상태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도저히 약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形羸不能服藥, 五不治也)
어떤 명약을 쓰더라도 그 약을 받아들일만한
기본 체력이 없다면
이것 또한 고치기 힘든 병이라는 겁니다.
여섯째 : 무당의 말만 믿고
의사를 믿지 못하는 환자입니다.
(信巫不信醫, 六不治也)
편작은 육불치(六不治)의 난치병을 말하면서
이 중에서 한 가지만 있더라도 병이 중하게 되고
고치기 힘들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병에 걸려 빨리 나으려면 겸손하게 자
신을 낮추고 최적의 방법을
전문가가 찾아내는 것이 상책인 것으로 압니다.
과연 이 시점에 우리의
정치병을 고칠 전문가는 있기나할가요?
지신의 비젼을 가진 사람이 공무를 맡아야 합니다.
스스로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이
명의도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고 한 것은,
병은 육체에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 병을 치유하는 데는
스스로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합니다.
희망도 없고 비젼도 없는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사회는
불치병에 걸린 중환자입니다.
작금의 국가나 지방 정부 중심의 여러가지 시책들이
국민들로 하여금 희망을 갖고
나아갈 비젼을 제시하는 데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당장 꼭 필요한 사람한테는
현금이나 현물로써 지원하는 것이 급선무겠지만,
그런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다수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어떤 계획을 세워서
목표를 이루는 삶을 사는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는
비젼을 제시하고 그것에 맞추어
뒤에서 후원하는 방법을 취해야합니다.
작금의 병폐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선거제도'의 부작용에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4-5년 주기의 선거로 인해 모든 정책이 그 주기에 맞추어
선거에서 표를 얻는데 목을 매고 있으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제시하기에 급급하게 됩니다.
적어도 10년 20년만 내다보고
계속을 세우고 비젼을 제시할 수 있다면,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10-20년만 어떤 정책이
이어질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운다면
좀 더 활력이 넘치고 희망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구호만 외쳐대는 사람들도
좀더 깊이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내건 구호가 다음 선거에서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생각하는 풍토가 조성된다면
지금의 정치병도 저절로 나아지지 않을까 합니다.
입법부는 물론 행정부와 사법부까지
모두 생계형 정치꾼들의 뒷바라지나 하는 병폐를
고칠 수 있는 명의는 지식인들의 각성에 달렸다고 봅니다.
당장 먹고 살기에 바쁜 사람들이 나라의 근간을 이루고
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지식인들이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지식은들은 전문분야에 정통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 전문지식을 제대로 쓰임이 있으려면
청렴하고 양심이 살아있어야 바른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약점으로 인해 자신의 지식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사람의 삶만큼 불행한 삶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자신의 지식으로 인해
바르지 못한 일을 하는 무리의 하수인으로 자괴감과
양심의 가책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이 한점 흠없이 살 수는 없겠지만
그 흠을 덮으려다보면 또다른 흠을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자신의 흠을 알면 그것을 당당히 드러내고 설명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파렴치한 행위로 인해
자신의 지식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지식인이 있다면
과감히 그 굴레를 벗어나서 새로운 시각으로
이 사회를 위해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카아네기가 젊은 시절에
다른 사람들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서
긁어모은 재산을 공익사업으로 기부함으로써
수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을
굳이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나 자신이 공익을 위해 사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다면
내가 아끼는 사람들 또한 공익적 삶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일신의 편안함과 안락함만 추구하면서
입으로는 공무를 잘 맡을 수 있다고 떠벌리는 정치꾼들이
발붙일 수 없는 사회를 여러 각도에서 모색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지식인이 나타나기른 손꼽아 기다립니다.
2,000여년 전 명의가 남긴 처방은
수천년 뒤에도 영험한 효력이 살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