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예배하다는 단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여호와 하나님에게 번제로 바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여기서 예배하고( שָׁחָה נִֽשְׁתַּחֲוֶ֖ה샤하 의 히트파엘형 to bow down, prostrate oneself, worship )라는 말은 완전히 바닥에 엎드리다 절하다는 의미이다.
사복음중에서 예배하다는 단어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데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인에게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배하다( προσκυνέω 프로스쿠네오 to kiss, like a dog licking his master’s hand, prostrate oneself in homage, worship)는 역시 경의함으로 납짝 엎드리다, 개가 그 주인의 손을 핥듯이 입맞추다는 뜻이다.
구약과 신약의 예배하다는 의미는 존경과 경의 그리고 항복과 순종의 의미로 완전히 엎드리다 는 뜻이 있다.
의미는 같지만 형식은 구약의 예배와 신약의 예배가 차이가 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여호와의 번제단앞에 나와서 제물을 바치고 엎드려 절하거나 혹은 각지에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예루살렘성전에 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엎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아무리 먼 지역에 살아도 여호와를 예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호와의 성막이나 성전이 있는 곳에 와서 제물을 드리고 엎드려 순종을 표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인에게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셨다.
사마리아여인이 유대인에게 예배할 장소는 예루살렘이지만 사마리아사람들이 예배할 장소는 따로 있다고 말했는데 그 곳은 그리심산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예배하는 장소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취급했기 때문에 그들이 예루살렘의 헤롯성전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은 자체적으로 예배장소를 마련했는데 그 장소는 모세가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에 정해준 축복의 산 그리심산이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과거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전이라는 장소로 찾아왔는데 이제는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이 찾아가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찾으시느니라( ζητέω seek after, endeavour )는 의미는 열망하다 간절히 원하다는 뜻도 있지만 목적을 두고 집요하게 찾다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기를 열망하시고 실제로 그들을 찾아가셔서 만나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신령과 진정으로(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 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개정개역판에는 영과 진리로 라고 변역했는데 정확한 번역이다.
영은 성령을 의미하고 진리는 예수그리스도과 그의 말씀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앞으로 구약에서처럼 예루살렘성전으로 다 모여 짐승을 잡고 피를 뿌리고 업드려 절하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성령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하셨고 성령과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찬송과 기도와 말씀을 나누는 자들을 하나님이 직접 찾아가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핵심은 "진리와 성령안에서" 이다.
진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과 하나님되심 그리고 십자가에 피흘리심과 부활 승천과 구속과 죄사함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기간에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모든 말씀이 곧 진리이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이후에 진리는 모두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중심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과 거룩한 사역을 외면하고 행위로 구약해석을 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유대교 종교교리가 될 것이다.
또한 성령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데 성령은 거룩하신 영이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모든 삶과 3년의 공생애와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구원과 교회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다 거룩함의 여정이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를 때 거룩함이 없다면 그는 인간예수 영웅예수를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세상죄를 지신 어린양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므로 천국에 이를 수 없다.
진리와 성령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받고 성령의 거룩함을 입고 거룩하신 진리를 따라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영광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예배는 장소나 특정한 예배형식이나 외적인 모습을 떠나서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리든지 예수그리스도의 진리와 성령의 거룩하심으로 날마다 새로와지는 예배를 드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든지 주어진 환경과 장소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분들은 자기가 익숙한 교회에 가야 경건해지고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말하고 어떤 분들은 웅장한 스케일의 교회건물과 거룩한 형상으로 장식된 강대상과 성가대의 웅장한 찬양과 엄숙한 목회자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은혜가 저절도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도 주일학교 고등부시절에는 목사님의 은혜스럽고 엄숙한 낭낭한 목소리와 성가대의 천사같은 찬양에 저절로 눈물이 나고 마치 하나님이 내 머리를 어루만지는 듯한 감동으로 가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감정적이고 분위기타는 신앙이었는가 생각이 든다.
특히 환란기에 혹은 재난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과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매우 필요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이 예배이고 생활이 기도이며 생업의 터전이 전도이어야 한다.
물론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불신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가운데서 진실하고 흠이없게 성령의 기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산다는 것은 마치 로마경기장에서 맹수들과 싸우는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험과 유혹 그리고 마귀의 마수가 덫처럼 삶의 길목에 여기 저기 숨기워져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과 진리안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임재하시는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걸어다니는 예배자가 바로 이 시대 고난의 시대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기 때문이다.
요즈음에 4차방역으로 교회들이 예배를 중지하고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언제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립고 사모하는 예배당에 가서 마음껏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을까하고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교인들은 오히려 4차방역이라는 방역당국의 조치에 합법적으로 교회가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를 얻었을 수도 있다.
예배당을 사모하든지 혹은 가끔 예배당에 가는 부담감을 합법적으로 면제받든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대면 비대면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예수님이 2천여년 전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너무나 놀라운 것은 2천여년 전의 주님의 말씀이 이렇게 길고 긴 세월을 지나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말씀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는 이곳도 저곳도 아닌 신령과 진정으로 성령과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이며 누구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성령의 거룩하심과 예수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장소에 "그"에게 하나님은 언제든지 찾아가셔서 "그"의 예배를 받아주신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여기에 "그" 가 바로 "나" 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만일 나의 삶의 길목에 나의 일터에 나의 가정에 나의 은밀한 장소에 하나님이 나의 예배를 보시기 위해 찾아오신다면 바로 그곳이 성전이며 하나님의 집이며 천국이며 기적의 장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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