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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1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제1독서 : 요나 3,1-5.10
제2독서 : 1코린 7,29-31
복 음 : 마르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 종종 만화가게에서 만화책을 빌려 보곤 했습니다.
형제가 육 남매나 되기에 만화가게에서 책을 보는 것보다
빌려 보는 것이 훨씬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화책을 보다가 화날 때가 있습니다.
내용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긴장하며 만화책을 보게 되는데,
누군가가 어느 인물의 얼굴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범인’이라고 적어 놓은 것입니다.
소위 ‘스포일러’를 한 것입니다. 결과를 알고 나면 이 만화책이 그렇게 재미있지 않습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만화책을 긴장하며 읽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찢어져 있는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으니
만화책 보는 재미가 역시 떨어집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미래를 미리 알면 어떨까요?
사실 우리는 미래를 미리 알면 행복할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알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하고, ‘오늘의 운세’ 같은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만드는 삶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삶이라면 과연 재미가 있을까요?
또 어렵고 힘든 상황에 놓일 때, 이 시간이 훌쩍 지나갔으면 하지요.
이렇게 시간이 지나간다면, 이 역시 재미없는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를 미리 알려는 노력보다는 지금에 충실하도록 더 힘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고통과 시련 역시 나에게 중요한 시간이고
의미 있는 시간임을 기억하면서 피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시간이 나의 삶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삶도 사랑해야 할 삶이며, 지금에 충실할 때
멋진 미래가 내게 주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때가 찼고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지요.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주 ‘나중에~~’라고 말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아직도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뒤로 미루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또한 우리의 구원이라는 결정적인 순간 역시도 먼 미래에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시간이 가까이 왔기에 우리 모두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지금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기쁜 소식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보다 더 깨끗한 상태, 바로 회개해서
주님의 곁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연중 제 3 주일입니다.
한편 3월 21일인 오늘은 성녀 아녜스 축일입니다.
저희 올리베따노수도회에 있어 오늘은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1313년, 지금으로부터 710년 전에 이탈리아의 중부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도시 시에나에서
'성령의 영감으로, 심오한 열정에 사로잡혀' 늦깎이 40대 귀족 청년들 3명이
고대의 수도승들이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아 사막으로 떠났던 것처럼
약 35km 떨어진 아꼬나 계곡으로 떠나와
기도와 고독 속에서 '밤낮으로 천상 것을 열망하였습니다.'
(안토니오 다 바르가의 연대기)
그로부터 6년 후에는 감명을 받은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고,
교황으로부터 파견된 조사관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레쪼 교구장의 인가를 받아
1313년 3월 26일에 <몬떼 올리베또의 성 마리아 수도원>이 창설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급속도로 성장하여 31년 후에는 15개의 공동체가 창설되었고,
그리하여 1344년에 1월 21일 교종 클레멘스 6세에 의해
<베네딕도회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연합회(congregatio)>로 인준받게 되었습니다.
그날이 703년 전, 바로 오늘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그래서 미사 후에는 마침성가 대신 '사은찬미가'(떼데움)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복음 선포입니다.
오늘 제2독서 말씀도 바로 이 하늘나라의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둘째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회개와 믿음에 대한 요청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은 바로 이 '회개'에 대한 말씀입니다.
셋째는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시작하신 일이
그저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시고
줄곧 준비해 온 '때'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 지를 제시해 주는
방향이요, 목표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이요, 선물입니다.
이 '나라'는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곁에 와 있다’는 말씀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현재에 와 있는 나라요,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합니다(루가 11,20 참조).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회개'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곧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삶의 방향을 바꾸되, 나아가야 할 목적지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곧 ‘~ 어디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와 함께 ‘~ 어디에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결국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회개'라는 말입니다.
'복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기쁜 소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 역시 '하늘나라'라는 '복음'을 ‘믿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임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여 믿고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회개하여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듯이,
이제 믿음으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는 당신께로 부르신 이들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당신께 '오너라.'는 것입니다.
곧 자신에게서 '떠나' 당신께 '오너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가는 길을 '따라 오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당신께서 '함께 데리고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데리고 함께 '하늘나라'로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부름을 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을 준비하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지고 있던 것, 의지하고 있던 것, 배도, 그물도, 삯꾼도,
아버지도, 모두 버려두고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바로 이 ‘따라나서는 것’이 회개의 실천적인 모습이요,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 '버림'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보다 더 큰 가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위한 배나 그물보다도, 또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아버지보다도,
더 값지고 중요한 '그분'을 향하여 믿고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니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이 아닙니다.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버려야 하는 이유,
곧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버리는가?’ 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를 향하여 있고,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분을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따라나선 ‘자신을 따르고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지’,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와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를 부르신 분을 따라나서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따라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욕에서 한국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습니다. 자막은 영어로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영화를 한국어 자막으로 보았는데
미국에서 한국 영화를 영어 자막으로 보니 조금은 생소했습니다.
한국 영화 ‘노량’도 곧 개봉한다고 합니다.
서울의 봄도, 노량도 역사적인 사건에 재미를 더한 영화입니다.
서울의 봄은 45년 전의 사건이고, 노량은 426년 전의 사건입니다.
서울의 봄에 저는 서울에 있었지만
노량해전은 제가 태어나지 않았던 먼 옛날의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봄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과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역사는 권력을 얻으려고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이 승리했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얻어 호사를 누린 사람들은
이렇게 영화를 통해서 그들의 부당함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군인의 길을 걸었던 이들의 애국심은 이렇게 영화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생 갈 것 같았던 권력도 10년이 못 되어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백담사로 유배를 가야 했고, 내란 음모죄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힘으로 서울의 봄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몰입감이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2000년 전에 ‘예루살렘의 봄’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칼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권위에 놀랐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해졌고, 중풍병자는 일어나 걸었고, 눈먼 소경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치유되었고, 죄인들은 용서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되었습니다.
참된 행복은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자비를 베풀면서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의 봄은 쉽게 올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루살렘의 봄은 오지 않았음을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사이와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없앨 음모를 꾸몄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인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는 끝났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삼일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는 놀라운 소문이 돌았습니다.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군인들을 매수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다고 소문을 내게 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은 들풀처럼 퍼져나갔습니다.
두려움에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이제 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의 봄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에페소, 고린토, 갈라디아로 봄은 퍼져나갔습니다.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도 봄이 시작되었고, 240년 전에 조선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우리들 마음에도 봄이 오면 좋겠습니다.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봄이 시작됩니다.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때 내 마음의 봄에는 꽃이 핍니다.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는다면
내 마음은 언제나 화사한 봄이 될 것입니다.
이천 년 전 그날처럼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주님께서 부르시면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르심은 일상 안에서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응답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 시간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시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님께서 부르시면 ‘나’ 달려가지요.
하던 것 멈추고, 있는 것 버리고……
님께서 부르셨으니 ‘나’ 응답하지요.
두려움 버리고, 망설임 없이,
임이 원하시는 그 모습으로‘예’하며… -홍요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마르1,18-19).
소중한 생계 수단인 배와 그물을 선뜻 버리고
심지어 아버지를 남겨둔 채 따라나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 애지중지하던 것마저 아낌없이 버리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가진 바를 서로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친교를 나누었던
초대교회 공동체 역시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었습니다(사도2,47).
아마도 그들의 발목을 잡는 복잡한 계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은 따라보자!
그들은 따름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기쁨,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버렸기 때문에, 낚인 것이 아니라 낚였기 때문에 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웃 사람에게 '성당 가자' 할 때 어떤 매력을 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 것이 바로‘기쁜소식’, 복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일까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임금이 되시어 당신의 주권을 펼치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주권은 권력을 마구 휘두르거나 군사적, 물리적 강력한 힘과는 다릅니다.
그분의 강력한 힘은 자비에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나라란 하느님의 자비가 충만한 상태,
곧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고통을 없애주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시는 그 자체가 기쁨이요,
그 사실을 알리는 것 또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병고와 악령과 같은 악한 세력의 속박에서 해방해 주심으로써
강력한 하느님의 자비가 이미 당신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데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생각을 바꿔라.
불의한 기존 질서를 따르지 말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태의연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 통독을 통해 가르침을 듣고, 성체 조배를 하며
그분 안에 머무르고, 신앙의 기쁨을 선포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은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온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실천 없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2,17).
따라서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늘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를 남겨두는 것은 편안함과 안전, 기득권을 포기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앞을 보고 가는 것입니다.
사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루카9,62).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19,26).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일상 안에서 서로를 대하는 태도,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과연 주님의 마음에 드실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이 있다면 그물을 버리듯, 아버지와 삯꾼과 관계를 끊어버리듯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4,23-24).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를 모르는 것은 좁은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여름벌레가 얼음을 모르는 건 더운 여름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래요.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여러 가지를 모르는 것은
그 한 가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내 안에 갇히면 다른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예수님의 잣대로 나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내려놓는 만큼 주님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삶의 현장에 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믿음을 지닌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당신의 뜻을 실천하길 원하시며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순간마다 그분 마음에 드는 답을 해야 하겠습니다.
“일단은 따라보자!”
매 순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께서 네 명의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계속되지만,
오늘의 주제는 부르심보다 구원을 위해 회개하라는 초대에 있다.
그 기회는 놓쳐버리면 사랑과 생명으로 개방될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즉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동정의 가치를
주님께 대한 갈라지지 않는 마음으로 일치하게 하는 것임을 제시한다.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시간이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가치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벽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동정자라는 것은 하느님께만 의지하기 위해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유희에서 눈을 돌려 피안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이것은 이제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 풍요성은 그것을 알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때가 차다."(15절).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시간 속에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함으로써
그때를 완성해 주심을 의미한다.
이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때이다.
연대기적 시간(Chrόnos)이라 하지 않고 구원의 때(Kairόs)라고 한다.
즉, 의미로 가득 찬 시간이며 우리의 구원과 멸망을 가늠하는 시간이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바로 이 순간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구원으로 가득 찬 때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15절).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것은 강생의 신비를 통해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써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을 사람들에게 이미 전해주고 있고
그 결과 이 세상 모든 것이 죽음까지도 그에게 복종하게 될 때(1코린 15,27-28 참조),
하느님 나라의 통치권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이미 들어와 있으며,
그 때문에 인간은 그곳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밖에 머물러 있든지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하느님의 나라가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조건으로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즉,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그 하느님 나라에 동화할 수 있도록 하고,
필요한 모든 요구에 응답할 수 있어야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하신다.
회개하고 믿는다는 두 개념은 내용상으로 다 같이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이 새로움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영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회개라는 것은 정신세계의 변화, 즉, 우리 자신의 가치 기준의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이성의 범주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상설교의 내용을 보면 그렇다(마태 5,3.10 참조).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논리이다. 이 논리를 받아들일 때만이 가능하다.
"복음을 믿어라"(15절).
그리스도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겨 그분의 구원과 생명과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복음을 통해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체험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이란 그분의 가르침뿐 아니라, 당신의 현존을 통해 실현하는
구원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처음부터 항상 살고 기록해야 할 영원한 복음이시다.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며 그분을 닮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18절).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 절박하게 요청되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신속한 응답의 표본이
바로 첫 번째로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절).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부르심이나 응답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은 즉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나선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아무런 미련도 남겨놓지 않은 그러한 모습이다.
그들은 과거를 떠날 줄을 안다. 가족까지도 이차적인 문제가 된다.
그들은 이미 그들 가운데 와있는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따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다.
이 제자들의 부르심의 사화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변화하고 진정으로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선택의 순간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려 나를 위해 다시 호숫가를 지나가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즉시 응답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때 우리 자신의 변화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서공석 요한 신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에 대해 回想하면서 그분의 삶 안에
그분이 가르친 하느님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그것이 現世이든 來世이든,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죄인으로 낙인 찍힌 이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그런 활동들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일들을 이야기로 남기면서,
그것을 ‘기쁜 소식’, 곧 福音이라 불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가르치듯이, 하느님은 사람들을 벌주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불행은 우리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알고 당신의 일을 실천할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에 얽매여서 우리를 기준으로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일이 순조로울 때는 하느님이 축복하신 것이라 믿고,
그것이 순조롭지 못하거나 우리가 불행한 일이 발생할 때는 하느님이 벌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를 기준으로 하느님에 대해 상상합니다.
오늘 복음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중심으로 한 생각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용서하며 살리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같은 실천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全能하시다는 말은,
그분이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전능은 인간이 상상하는 전능입니다.
인간은 능력과 권력을 가지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할 수 있습니다.
조직폭력배의 두목은 그 부하들 앞에 전능합니다.
부하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할 수 있습니다.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등용하여,
그를 행복하게도 해 줄 수도 있고,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권력구조의 上位에 있는 사람은, 下位에 있는 사람에 대해 그렇게 전능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은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하느님은 선하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창조하고 섭리하신다는 말은 당신의 善과 慈悲를 실천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외면하고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외면하였다고 하느님은 상처받거나 복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선과 자비’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외면하면,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로워야 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强者 앞에 약하고, 弱者 앞에 강하면서,
자기 한 사람의 利得만 추구하는 볼품없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共産主義는 無神論을 주장하면서 사람들의 뇌리에 하느님에 대한 언어를 지워버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선과 자비도 인간의 삶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공산주의는 살벌한 사회와 무자비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남성 호칭만 사용된 것은
남성 위주의 父權사회였던 그 시대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인간 생명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졌고,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인간 본연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 생명의 기원에 선과 자비가 있었고,
인간은 그 선과 자비를 받들어 배워 실천해야 하는 생명체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子女는 父母를 이용하여 자기가 잘 되는 길을 찾지 않습니다.
자녀는 부모와 함께 있으며 부모의 뜻을 받들어 삽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녀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어떤 인간도 하느님의 일을 그렇게 철저하게 실천한 일이 없었다는 의미에서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유일한 아드님’이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은 선하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면, 우리도 선하고 자비로운 일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이 실천한 ‘병 고침’과 ‘죄의 용서’라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악과 고통이 있습니다.
病苦도 있고, 背信도 있으며, 실패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겪어야 하는 실망도 있고, 아픔도 있습니다.
인간 생명은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웃고 울면서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그런 현실을 벗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고통과 불행은 사라지고, 좋은 혜택만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현실을 바로 봅니다.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주변을 봅니다.
그것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오시게 하는 일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 부르는 것은,
그 말씀과 실천이 인간을 참으로 자유롭게 또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라 나선 네 명의 어부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결단을 요구하는지를 말합니다.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또 아버지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자기가 과거에 소중히 생각하던 인간관계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선하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런 제자의 실천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느님을 우리 삶 안에 모셔 들일 수밖에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애착하는 인간관계와 사물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화려했던 우리의 꿈들도 그 실상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면, 아무도 거역하지 못하는 인간 생명체의 順理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욕과 욕심과 꿈이 아직 살아있을 때,
그것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게 살자고 가르친 분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녀가 되자는 운동을 일으킨 분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은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시게 결단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있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루카 17,21)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승화 시몬 신부
성경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말씀이 담겨 있기에 성경은 따로 축복을 받지 않습니다.
동시에 성경은 하나의 책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있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자체로는 신성시하지 않습니다.
책을 보고 연구하고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는 이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쓰고 생각하고 머무는 행위는
인간의 손길로 적힌 문자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그분의 뜻과 섭리를 따라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만약 성경을 신성시만 한다면
성경 안에 있는 모순적인 내용을 풀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한 번 가기도 했고
세 번 가기도 했으며
나타나엘은 제자가 되었지만, 바르톨로메오는 갑자기 등장합니다.
거기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한 번에 점령하기도 하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점령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순점을 풀어내지 못할수록
성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을 부정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만약 성경을 믿음 없이 바라본다면
사실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책일 뿐입니다.
역사책이라고 하기에는 잘못된 부분이 너무 많고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믿음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저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말씀을 믿고 죽음을 받아들인 이들도 많습니다.
문장은 길어서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고
역사적 배경을 모르면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먼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 없이 바라보는 성경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성경을 제대로 대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면서도
독자로서 성경 말씀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없이는 나와 관계없는 문자일 뿐이고
독자로서의 자세 없이는 광신이 되거나 잘못된 믿음을 가질 뿐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갖추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회개하는 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은 삶으로 적용돼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십니다.
하느님 말씀 주일을 지내며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를 다지고
주님 안에서 사랑을 체험하고 전하며
주님의 제자가 되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