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실골
토실골은 완만한 골짜기가 깊은 데다 땅이 기름지다. 세 고을이 합쳐지는 삼거리에 배가 들락거리는 나루터가 있어 물산이 풍부하고 장사꾼들이 터를 잡은 객주까지 있다. 토실골에는 장날이 따로 없다. 하루하루가 장사꾼과 사람으로 법석이는 장날이다. 먹거리가 다양하고 풍성해 맛을 찾는 미식가들이 이십리 밖에서도 일부러 찾아온다. 자라에 인삼·대추를 넣고 푹 곤 용봉탕과 황구를 잡아 삶은 보신탕은 말할 것도 없고 개구리 허벅지 구이, 뱀탕, 참새구이를 파는 식당이 서더니 토끼탕집까지 생겼다.
토끼를 잡아 탕을 끓인다고? 동길이는 그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토끼탕집 주인인 오 첨지는 뒤편 세마지기 밭에 그물망을 치고 토끼를 길렀다. 수백마리 토끼가 오글거렸다. 오 첨지는 젊은 머슴 팔목이를 들여놓았다. 그는 풀을 한짐씩 베어와 토끼에게 먹이를 주고 가을이면 땅굴을 파서 토끼집을 만들어줬다. 토끼탕집을 찾는 손님들은 즉석에서 잡아주는 탕이 신선하다며 점심 나절마다 줄을 섰다. 원래 토실골이라는 마을 이름도 토끼가 많아서 붙은 지명이다. 이제는 토끼 씨가 마를 판이다. 열두살 동길이는 이를 갈았다. 동짓달부터 눈이 쌓이면 동네 남정네들은 저마다 개를 몰며 토끼사냥을 하고 토끼가 다니는 길목에 올가미를 놓았다. 오 첨지는 토끼 한마리에 한냥씩을 주고 토끼를 사들인다. 온 동네 사람들이 토끼를 잡느라 눈이 빨갛게 뒤집어졌다.
서당 훈장님도 뿔이 났다. 학동들마저 토끼를 잡겠다고 책을 던져놓고 서당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토끼의 천적으로는 여우·담비·족제비 등이 있지만 가장 겁내는 것은 매다. 매가 하늘에 떴다 하면 토끼는 번개처럼 땅굴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날 매가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자 토끼가 번개처럼 땅굴로 들어 가려는데, 이럴 수가! 땅굴이 전부 돌멩이로 막혀 있는 데다 그물망이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토끼들은 망을 빠져나가 산속으로 도망가버렸다. “당장 나가, 이 자식아!” 전날 밤 작부와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고 아직도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나자빠져 있는 팔목이가 오 첨지의 벽력같은 고함에 벌떡 일어나 토끼밭 토벽집에서 쫓겨났다. “이 모두가 동길이 짓이야.” 팔목이는 쫓겨난 연유를 짐작했지만 확증이 없었다.
오 첨지가 토끼 한마리에 한냥오십전을 쳐주자 닷새가 지나지 않아 토끼탕집은 다시 문을 열었다. 토끼탕집의 장사 방식이 묘해졌다. 한두 방에 작부를 들여놓고 젓가락 장단이 나오더니 이제는 으레 방마다 작부들이 진을 쳤다. 주막집 객방값이 뛰기 시작했는데도 방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토끼탕집에서 쫓겨난 팔목이가 과부인 토실골 부녀회장 청송댁 머슴으로 들어갔다. 이 녀석이 쓸개도 없는지 저녁이면 토끼탕집으로 들락날락하며 청송댁 심기를 건드렸다. 어느 날 팔목이가 동길이를 만나 멱살을 잡아 올리며 “동길이 네놈 때문에 내가 토끼탕집에서 쫓겨났어, 인마” 하며 뺨을 갈기자 요 맹랑한 녀석이 “청송댁에서도 쫓겨나게 해줄게” 하면서 팔목이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덩치 큰 팔목이가 엉덩방아를 찧었고 동길이는 풀려났다. 사타구니가 퉁퉁 부어오른 팔목이는 진짜로 청송댁에서 쫓겨났다. 힘이 장사인 팔목이와 꾀주머니 동길이는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오히려 떨어져서는 못 사는 아삼륙이 돼 저잣거리에 나타났다. 어느 날 저잣거리 왈패 두목과 팔목이가 시비가 붙었다. 단옷날 황소를 탔던 천하장사 왈패 두목이 팔목이를 번쩍 들어 올려 패대기를 치려는데 갑자기 비명과 함께 왈패 두목이 사타구니를 움켜잡고 고꾸라졌다. 왈패 두목이 사라지자 자릿세·보호세를 뜯기던 장사꾼들이 만세를 불렀다. 동길이와 팔목이가 토끼 한마리씩 안고 쓰다듬으며 토끼탕집 문 앞을 막고 서자 손님들이 발길을 돌렸다.
토실골 부녀회는 사또를 찾아가 진정했다. 토끼탕집의 음란장사로 화목하던 가정이 부부싸움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는 것이다. 결정타는 우물가에서 일어났다. “토끼탕을 하도 먹은 바깥양반이 오랜만에 올라오면 토끼처럼 금방 나가떨어져.” “우리 신랑도 그래. 그전에는 한 식경은 갔는데.” “우리 애들 아빠는 눈까지 빨개졌어.” 토끼탕집은 결국 문을 닫았다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