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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장 1~9절/하나님의 부르심
오늘 본문의 말씀은 내용으로 보아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는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람은 순종하였습니다. 셋째.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한 땅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옛날부터 사람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해 왔습니다. 어떤 이는 “나그네” 라고 말했습니다. 또는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고 해서 풀에 맺힌 이슬 같은 인생으로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이 인생이라고 해서 인간의 무상함을 말했습니다. 어떤 풍자적인 사람은 인생이란 “없고, 없고, 없고 없다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릴 때는 철없고 청년 때는 정신없고, 장년 되면 틈 없고, 노년 되면 형편없다가 없어지는 것이 인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표현들은 인간의 소극적인 면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표현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을 원수와 싸우는 군인으로 또는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경주자로 말했습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선한 싸움을 싸우는 군인입니다. 군인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경주하는 사람도 경주에서 승리해야 메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나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모형입니다. 그의 신앙 역사의 시작은 처음으로 그가 자기의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때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생애는 아브라함의 생애와 같습니다. 그의 생애는 한 마디로 말하면 구별된 생애였습니다. 혈과 육의 영향을 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 이상의 어떤 영향으로 말미암아 사는 생애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믿고 그 안에서 행하는 생애입니다. 믿음으로 그 영혼이 지배당하고 있는 그런 세계입니다. 아브라함은 육을 부인하고 부르심을 쫒아 정처 없이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의 대표입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목적 속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아니한 어떤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한정된 이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께는 특별하신 뜻과 기대가 계셔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모르고 지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정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동생인 하란이 불에 던져진 체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자신은 결혼을 하였지만 자녀가 없이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지만 자신은 그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9;15)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에게 무슨 개인적인 공로가 있어서 은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사야서 51장 1~2절에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네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스스로를 생각하여 보라고 말하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받은 복이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겸손해야 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공적은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전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9~30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부르신 분명한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 기대하는 것은 주님을 닮아가는 모습이 내 모습을 통해서 증거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예정하시고 부르시는 것은 성도들이 즐기는 모든 축복의 원천인 것입니다.
1~2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보여줄 땅으로 가야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사명입니다. 우리는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자기 직분이 있고, 할 일이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나는 하나님의 심부름을 받고 태어난 생명입니다. 이것을 느끼는 것이 사명감이요, 그런 사람이 사명적 인간이요, 그런 생활이 사명적 생활이요, 그런 인생관이 사명적 인생관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고 사명을 발견할 때 새로운 삶, 높은 차원의 인생으로 비약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사명을 깨달은 사람의 삶에는 깊이가 있고, 넓이가 있고, 높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명감을 자각한 사람의 삶은 강해지고, 성실해지고, 충실해집니다. 사명감이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고, 진지하게 만들고, 용감하게 만듭니다.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사명을 자각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은 거의 비슷한 일의 되풀이입니다. 매일 같은 집에서 같은 일을 되풀이하면서 같은 생활을 반복합니다. 같은 일의 반복은 우리에게 단조로움과 권태와 따분한 생각을 느끼게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무사안일의 옷을 입고 의미 없이, 기력 없이, 성의 없이, 권태로운 인생을 되풀이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매너리즘이라고 합니다. 매너리즘은 정신의 권태와 생활의 무력감을 일으킵니다. 이것을 벗어나려고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를 찾고, 자극을 구하고, 향락을 쫓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시적인 해결과 피상적인 만족을 줄지는 모르나 깊은 만족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사명감입니다.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향락주의가 아니고 사명주의입니다. 사명감이 인생의 권태를 인생의 보람으로 바꾸고, 삶의 무력감을 삶의 의미로 바꿉니다. 따분한 인생을 즐거운 인생으로 변혁시키는 것은 인간의 확고부동한 사명감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사명감에 사로잡힐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활기찬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감은 인생의 활력소입니다. 사명감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학문의 연구에서 찾습니다. 어떤 이는 예술의 창조에서 찾습니다. 어떤 이는 정치의 실현에서 찾고, 어떤 이는 경제의 사업에서 구합니다. 어떤 이는 신앙의 봉사에서 사명을 찾습니다. 사명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이상의 추구요, 가치의 창조요, 의미의 실현입니다. 사명감은 인생의 보람입니다. 사명감을 가진 사람은 인생을 멀리 보는 사람입니다, 그의 눈에는 광채가 있고, 그의 입술에는 노래가 있으며. 그의 가슴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의 사명을 깨닫는 것입니다. 인생을 보람 있게 사는 비결은 확고한 사명감을 갖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는 길은 힘든 길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이 75세였습니다.(4절) 물론 그 당시에는 오늘날보다 장수하던 때였기 때문에 다소의 차이가 있겠지만 75세는 노년기입니다. 이때까지 아브람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모든 생활의 책임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교통수단의 발달과 통신시설의 발달로 인하여 지구가 좁아져서 ‘지구촌’이란 말을 쓰고 있지만 그때는 어디를 간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때입니다. 따라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거의 생각지도 못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친척이 살고 있는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위험이 따랐습니다. 모험의 길이였습니다. 여기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아브람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 말씀대로 “믿음으로 아브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직면했을 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부르심의 길을 가는 사람은 고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큰 부를 축척한 사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 온 세상이 우러러보는 명인과 선수, 자수성가한 기업인, 그것은 결코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평안히 자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허송세월하고 있을 때 혼자서 묵묵히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며 오랜 훈련을 통과한 결과가 비로소 그런 영광의 자리, 성공의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인생을 쉽게 살려고 하는 것은 근본부터 잘못입니다. 고생하지 않고 쉽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쉽게 얻은 돈은 쉽게 잃어버립니다. 노력하지 않고 얻은 자리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성공은 요행의 산물이 아닙니다. 번영은 우연의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는 치밀한 계획, 날카로운 분석, 탁월한 전망, 과감함 실천, 임기응변의 대책, 불의의 사고에 대한 준비, 일사불란한 팀워크, 합심 협력하는 단결, 이런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사업에 임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이 사회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고생하지 아니하고도 잘 살 수 있고,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허망한 사고방식부터 버려야합니다. 신앙의 부르심은 용기와 담력을 가지고 고생을 각오하고 나서야 합니다. 온실에서 곱게 자란 화초는 생명력이 약하고 향기도 적습니다. 그러나 들판에서 모진 비바람을 맞으면서 자라난 화초는 생명력이 강하고 그 향기마저도 짙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생의 벌판에서 악전분투하며 성장한 사람은 기운이 세고 의지력이 강합니다. 그는 어떤 시련도 이겨내고, 어떤 고난도 극복합니다. 고생은 백절불굴의 의지와 칠전팔기의 지구력을 길러줍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란 자녀들은 의지력이 약하고 실천력이 없기 때문에 조그만 난관이나 시련에 부딪쳐도 좌절하기 쉽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정말 사랑하는 부모는 어려서 고생을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젊어 고생은 금 주고도 못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고생이라는 용광로를 거쳐야 심신이 견고해집니다.
부르심의 가는 길은 고생스러운 길입니다. 인간은 고생의 경험이 많을수록 이해가 깊어지고 타인의 처지를 깊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고생은 우리의 인생을 깊게 하고 높게 합니다. 모든 위대한 철학, 위대한 문학, 위대한 예술, 위대한 신앙이 다 인생의 깊은 고생과 고뇌로부터 나온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뛰어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용기가 무엇입니까? 고난과 시련 앞에 섰을 때 늠름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고뇌에 지고 맙니다. 고뇌의 포로가 되어 고뇌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용감한 사람만이 고뇌의 어두움을 뚫고 기쁨의 광명에 도달합니다. 고뇌가 클수록 그것을 극복하면 환희도 큽니다. 고생한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것이 우리의 정신에 넓이와 깊이를 줍니다. 여기에 인생의 가치가 있습니다. 부르심의 가는 길엔 고생이 있지만 우리를 더욱 튼튼하고 존귀한 자로 세워갑니다.
3. 부르심은 받은 자는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힘들고 어려운 것을 알면서도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앞을 향해 힘차게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부르심으로 가는 길은 모두가 낯선 길입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 목표를 행해서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여섯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둘째, 하나님이 너에게 복을 주겠다.
셋째, 하나님이 네 이름을 칭대하게 하겠다.
넷째, 하나님이 너를 복의 근원으로 되도록 하겠다.
다섯째,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겠다.
여섯째, 하나님이 땅위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언약을 붙잡지 않고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느냐 하면 약속의 말씀을 붙잡지 못하고 세상의 풍조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세움을 받기 위해서 약속을 붙잡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산 모습을 보십시오. 빌립보 3장 12~16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신앙의 부르심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눈은 목표에 가 있고, 몸은 그 목표를 향해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야 합니다. 야구 시합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넣기 위해 ‘볼’ 하나하나에 자기의 예지와 정성과 전력을 기울입니다. 그는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공을 던지지 않습니다. 수만 명의 군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운동장에 모였습니다. TV 중계를 통해 지켜보는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수를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9회 말인데 ‘투 아웃’이 되었습니다. ‘스코어’는 3대 2입니다. 수비 측은 3점이요, 공격 측은 2점입니다. ‘볼 카운트’는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입니다. 공격 측의 타자는 1루, 2루, 3루까지 진출했습니다. 만루가 되었습니다. 투수에게는 단 하나의 ‘볼’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스트라이크’를 넣어서 상대방을 이웃시키면 3대 2로 승리의 영광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 던져서 ‘안타’를 주거나 ‘홈런’을 줄 경우에는 상대방에게 점수를 허용해서 역전패 하게 되는 경기입니다. 아슬아슬한 순간입니다. 진지한 장면입니다. 모두 손에 땀을 쥐며 지켜봅니다. 그 많은 관중의 눈동자가 투수의 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순간의 투구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볼을 던집니다. 이 ‘볼’이 꼭 ‘스트라이크’가 되게 해달라고 그는 기원하는 심정으로 공을 던집니다. 그는 한 알의 ‘볼’에 모든 예지와 정성과 힘을 집중합니다. 이것이 전력투구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볼 때 사회에서 큰일을 했거나 자수성가한 많은 사람들은 예외 없이 전력투구의 인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전력투구하는데 성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전력투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집중력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한 목표에 집중될 때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한문에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刀 何事不成)’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한 목표에 집중될 때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어로 “Do your best.”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한국 여성교육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고 김활란 선생님은 임종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전력을 다해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숨을 주셨고, 건강을 주셨고, 천분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 어른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건강과 천분과 재능을 최대한도로 활용하여 전력투구의 자세로 인생을 살았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늘은 절대로 게으른 사람을 돕지 아니합니다.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구하는 것, 찾는 것, 문을 두드리는 것, 모두가 노력을 의미합니다. 얻을 때까지, 찾을 때까지, 열릴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성공의 문을 두드릴 떄 하나님은 비로소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자는 한 마리의 토끼를 잡을 때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친다고 합니다. 과연 백수의 왕다운 행동입니다. 성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승리에 도달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집념을 갖는 일입니다.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조금 해보다가 힘들다고 체념하면 성공할 일이 없습니다. 슈바이처 박사의 말은 옳습니다.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 샘물이 날 때까지 파라.”그리고 칠전팔기의 지구력입니다. 무슨 일이나 쉽게 단념하지 맙시다. 일곱 번 넘어지면 다시 여덟 번 일어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승리하는 신앙의 부르심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