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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당성홍)인주도령중랑장공파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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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씨 자료방2 스크랩 열부홍씨에대한전기(국학진흥원)
홍왕식 추천 0 조회 50 14.05.20 13: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양홍씨중랑장파24세열녀홍씨에대한전기..

열녀홍씨는.남양홍씨중랑장파23세대종손이신.어모장군.용양위부호군.洪爾遠公의막내따님에

대한실제사실을바탕으로기록된실화소설이며...우리나라최초의근대공안소설이란평가도받고있는,

밀암이재선생의문집.밀암집에있는홍열부전과동일하나..더욱자세하다..

홍씨(洪氏)는,유학자(儒學者)이원(爾遠~~字.子致)의막내딸이다.

유학자군실(君實)은남양(南陽)명망(名望)이있는가문(家門)으로,조부(祖父)이상에서

고관을지낸자들이많았으며, 대대로  서울과경기(장단)에서살았다.

***주조선개국공신이신,집현전대제학.남양군.길민의직계손으로임진용사의난에전라도관찰사와평안도조도사로나라에많은업적을남기시고,순직하신당성부원군,홍세공의장손자이시다**

그런데.그선친(先親)형제가난리를(병자호란)인하여 영남의봉화현(奉化縣)에우거하면서

종족간에화목하고 인척간에 친밀하였으며 손님이찾아오는것을좋아하였다.

그러다가  옛날에살던곳으로돌아갔는데(**장단의고릉동일대를말한다**)

자치(子致)가집안에서생긴걱정을피하여 다시남쪽으로이사하였다.

이때.홍씨(洪氏)는나이가 아직어렸음에도  이미효성으로소문이났는데

엄숙(嚴肅)하고 장중(莊重)하였으며 영특(英特)하고 호걸(豪傑)스러웠으며

학덕이높고  조행(操行)이훌륭한여자의기풍이넘처흘렸다.

임자년(1672년)에,진천(鎭川)의이명인에게출가를하였는데,

얼마안되어  명인(命寅)이병이나서  아내를따라봉화(奉化)에와서병을치료하였다.

그러다가 병이낫지를않아서 결국 수례에실려서 본가로돌아갔다.

그런데 홍씨가출가한지가 겨우 몇달이안되어서 아직 시아버지를뵙지도못하고있었다.

그리고.진천이멀어서 나흘의일정이라 ~근심과걱정으로  나날을보내면서도길떠날 

채비를하였으나  아직츨발하기도전에 남편 명인(命寅)의 부음(訃音)이먼저도착하였다.

홍씨는 죽고싶은마음에다    시부모를빨리뵈어야한다는압박감으로받아 진천으로

달려가면서도 길에서죽고싶기도하였으나, 다시생각을하니  관(棺)이라도한번

끌어안아봐야하겠는지라, 죽음을참고  도착하여서는 여러차례 스스로목을메어 

자살을시도하기도하였다.

어느날이던가?집안사람이들으니 그목소리가 이상한지라급히달려가목줄을풀고는 약을먹여서살려내었다.

이로부터  그수위(守衛>지키면서호위하는것)가매우치밀하게 감시하여

다시는 그런짖을할틈이없었다.

그리고 시아버지 세중(世重)이몸소죽 그릇을들고는 울면서 알아듣도록 타이르기를,

"전에돌아기신어머니를 위하여 죽을 이와같이 입에다 떠서 넣어드렸던일이있다"

고하였다.

그런데홍씨가 그성품이이미 효성스러운지라 그래서 공경하여 시아버지의命을받들어서

드디어 죽지는않기로 마음을먹었다.

비록심히슬프고  비통(悲痛)한가운데서도 반드시 남편의제사를풍성(豊盛)하고

정결(淨潔)?게하였으며 또사사로이 음식을마련해서 시아버지를 봉양하기를

맛좋은것과고운옷으로받들어서모시었다.

그리고 그행동거지(行動擧止)가바르고 결백하여 세상사람들보다높이뒤어났는데,

세중(世重)이 이를고마워  하면서 감동된표정을지으며, 이웃들이 이를칭송하기를입에서

떼지를않았다.

탈상을하고나서 7년동안이나 고기를먹지않다가 병이나서 거의죽을지경에이르렀으므로

시아버지가 억지로권유하여  이를먹였다.

세중(世重)의집안이비록부유하기는하였으나 명망(名望)을떨치지는못했었다.

그러다가 홍씨가 매우 검소하게 생활을하면서부터 그효과가 나타나서  초라한모습을

비뀌어서 점차 대가(大家)의모습을갖추어나갔다.

집안의 다른 며느리들은 구슬과돌처럼 서로 심하게 차이가나서 서로 합심을이룰수가

없었는데,오직 시아버지 세중(世重)만이 그를 중(重)하게여겨서

그에게 가산을맡아서 다스리도록하였다.

 

 

 

 

 

 

 

 

 

 

 

 

 

 

 

 

 

 

남양홍씨중랑장파24세열부홍씨에대한전기

열녀홍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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