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시 당선작
허공에서 더 깊어지는 추위 / 김낙호
세 길 높이 배관 위
긴 칼 휘두르는 단단한 추위와 맞선다
방패는,
작업복 한 장의 두께
빈곤의 길이를 덮을 수 없는 주머니 속에서
길 없는 길을 찾는 추위에 쩍쩍 묻어나는 살점
더 먼 변두리의 울음소리를 막아 보려
등돌린 세상처럼 냉골인 둥근 관을 온몸으로 데운다
두려움의 크기 따라 느리게
혹은, 더 느리게
허공을 차는 발바닥의 양력으로 기는 자벌레
수평으로 떠 있는 몸이 공중을 써는 동안
바람은,
밀도 낮은 곳만 파고드는 야비한 마름
풍경이 될 수 없는 공구들 부딪치는 소리
눈앞에 튀어 올랐던 땅의 단내가 복구멍을 채우는, 숨죽였던 모골이 축축한 닭의 볏이 될 때마다
날개 없는 포유류가 새가 된 적 없다는 걸
한 발 느리게 깨닫는다
떨어져 나갔다 다시 매달린 간(肝)으로부터
소름의 갈기가 잦아드는 한숨
자꾸만 밀어내는 세상의 복판을 자주 헛짚어 복부 근육으로 변두리를 붙잡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
허공을 기는 힘이 연소될 때마다
그나마 조금 환해지는 하루
진주가 되기 위해
당신이라는 말속엔 내가 없다
내가 누군지,
당신이 내게 누군지
가끔 또는 자주 헷갈리면서
미궁의 물속에서 모색하는 공존
물의 근육에 떠도는 먼지 같아서
섬광 같은 눈빛에도 포착되지 않는 내 몸
결 따라 층으로 흐르는 물살을 훔쳐 당신의 살에 숨어든다
당신은 한 귀퉁이쯤 양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예고 없이 들어온 것처럼 문득 떠날 줄 알았던지
점액질의 살집만으로는 불안하여 빛마저 차단할 견갑을 덮어 버린다
갑옷 열릴 때,
당신은 참았던 아픔을 물의 허공에 끔벅벅 던진다
거기,
물의 바람을 등지고 바라보는 하늘에 상처가 머물렀던가
상처의 시간을 어루만져 줄 바람의 손끝이 있었던가
당신 안에 앉은 더딘 성장의 내 동공이
당신의 눈빛을 등대 삼아 숨을 키워
내어놓기 싫은 상처를 훔쳐보기라도 했다는 듯.
내가 가시였음을 흠칫 깨달은 날
나는 전이되어 슬픈 눈으로 몸을 말기 시작한다
당신의 숨소리가 뽀글뽀글 수면을 향한다
낮은 삶이 내려놓는 눈물은 떨어질 곳조차 찾지 못해 허공에 흩어진다는 것을,
아픔을 출수하는 말 없는 말을
당신의 상처로 인해 내가 영롱한 빛을 발산하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의 거미
어둠이 포란하여
습기의 온상이 된 내장의 벽
헐어 가는 그 벽을 갉아먹는 대로
끈적한 죽음의 올무를 생산해 내는,
먹이를 포집하기 위해
'몰두'라 이름 지어진 눅눅한 줄을 타며
곰팡이 번지듯 우울의 방을 건너는, 거미
죽음을 드리우는 사각은 어둡다
단단한 실로 제 몸을 친친 감고
치명의 목전까지 스스로를 함몰시켜
몰두 밖을 볼 수 없도록 옥죈다
몰두와 우울이 뒤엉켜 더 이상 조여지지 않을 때
생각의 방을 비집고 엉금거리며 나가려 한다
끝없는 줄을 생산해도 될 별과 별 사이
물리적 공간에 똬리 틀고 있는 동안
밟고 있는 줄은 여전히 견고하다
촘촘한 그물을 겨우 벗어나
고치보다 탄탄하게 숨통 조여 오던 방을 나온다
몰두 밖,
빛을 쪼인 우울한 방들이 녹아내린다
비로소, 거미의 음흉한 발톱도 오그라든다
물의 유전
겨울의 꼬리뼈가 통과하는 허공의 병목
사계절을 모두 사는 바람에게 겨울의 기억이라는 것이
두꺼운 책의 낱장 정도,
아쉬움일지 모른다
변온의 중간쯤 바람을 앞세워 비가 들어선다
오늘 같은 날이면,
겨우내 모공 좁혔던 호수의 입이 열리며
물의 복부에서 겨울 냄새가 비릿하게 올라온다
조우에 대한 기대가 또렷한 호수의 이목구비
겨울에 대한 도란거림에 빗금으로 한몫 거드는 빗방울
수직이 횡으로 멈추는 파문의 얼굴
점점 옅어지는 구조로 호수에 빨려 들어간다
살갗의 솜털이 연인의 손길에 들고 일어나듯
빗방울의 촉수에 물의 피부가 자지러지는
만남의 파장 번지는 걸 들여다보면
호수는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빗방울을 품기 위해
늘 가슴을 열고 기다렸던 것이다
더 큰 서사를 엮으려는 물의 유전
물의 골반 어림쯤
지상의 모든 물을 먹고도 허기를 드러내는 신이 살고 있다
뱀의 유혹이 기생하는 혀
먹잇감 노리는 뱀
표적을 찍기까지
슬프게 잠든 몸속 뼈들 깨워 지면을 빡세게 민다
속도를 축적하기 위해 둥글게 비트는 탄성계수
뱀은 제 몸 안에 활을 갖고 있다
긴장과 이완의 마술 지팡이에 군침 그러모아 후- 불면
토막난 언어의 골격을 가둔 우물이 환하게 깨어난다
튕겨지듯 반사되어 억압을 뚫고
혀 속에 숨어 퇴화를 거부하며 팽팽해지는 활
한껏 신장 늘린 돌기들이 혀의 표면에 빼곡히 도열한다
부라린 눈으로 촉 내세우는 음흉한 욕구 전위
유혹의 한가운데를 겨냥하는 뾰족한 어둠
창살 사이로 역광 타고 쏟아져 나오는
말의 우물이 밀어올린 완강한 속살의 가시들
쩍 벌린 이에서 독물이 흐르듯
본능에 종속된 거울의 표면이 끈적하다
빛의 막다른 곳에 휘었다 펴는 동력으로 화살을 장전하는
뱀 혀의 서늘한 유혹
빛의 후면에 흔들리는 그림자로 날름거린다
혀는,
알몸에 걸친 나뭇잎 한 장으로 빛을 잘라 먹으려 할 때부터
갈라진 뱀 혀의 양면을 갖고 있다
그늘에 잡혀 있는 발목들
배후가 무력한 젊은이들에게
절망과 희망 사이 너비는
등 돌린 방향으로 흐르는 시침 따라 점점 넓어지는 골이다
내 것이 아니라면 더 좋았을 장막의 그늘 쪽
멀어지는 시침만큼 깊어진 절망으로 벼리는 부리
간극을 뛰어넘겠다고 엿보는 바늘구멍
온 힘 부리에 모아 진입의 장도에 오르자마자
결속된 배후의 단단한 장벽에 꺾여버리는 부리
배후에 의해 빛의 사각으로 내몰린 그늘의 발목들
어둔 울음을 먹여 키워 온 구겨진 의지가
체온 잃은 얼룩들의 명상이 되고 만다
제 몸뚱이 지탱하기에도 힘겨운 허약한 발목들
상처들을 덧입고 걸어야 할 지루한 악몽
비루한 어둠 속이어도 괜찮다는 말은
질식이 도사리는 어둠에 대한 체념의 반어
거짓에라도 갇혀 스스로 배후가 되기까지
이완되지 않을 긴장의 내성 키워 내야만 하는
발목에 화인으로 박히는 어둔 기억들
장막을 뚫고 나와 생존한 뼛속의 어둠은
빛 아래서도 빛을 발산하는 사리舍利가 된다
□당선 소감 | 김낙호
"갈림길서 손잡아준 분들께 감사"
햇살의 시간을 받아 내는 갈대들이 사는 대청호에 다녀와야겠다. 스러지는 햇살에 하얀 손을 허공에 내밀고 바싹 마른 발치까지 휴지기가 차오르면 한 해의 끝에서 허전한 마무리에도 이 길을 떠나지 못하는 막막한 내 모습이 그곳에 서 있곤 했다.
부족한 나에게 이 길을 포기하지 말라고 손을 내밀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시의 길 위에서 스스로 형체를 갖추기 위해 더욱 매진할 것을 약속한다.
'이쯤에서 멈춰야 하는가?'의 갈림길에서 손잡아 준 분들이 생각난다. 존경하는 목원대 이해성 교수님, '대전문학 토론회'를 이끄시는 한남대 이규식 교수님, 진부한 설명에 매몰되기 직전 묘사의 경계를 세워 주고, 좋은 시인은 늘 주변이 깨끗해야 한다며 좋은 시의 방향성에 대한 충남대 국문학박사 오유정 시인의 가르침이 증명되어 기쁘다. 충남 부여에서 22년 만에 다시 직장을 갖게 해준 (주)선진기업의 한재명 사장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무능한 가장의 삶을 나누어 짊어진 아내 송은호, 딸 영지, 아들 병희가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다.
부산일보 시 심사평
"노동자 삶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어"
최종 심사에 올라온 작품은 헛도는 속도, 「터치터치」, 「사막에 눈이 오다」, 「텔레마케터」, 「허공에서 더 깊어지는 추위」 등 5편이다. 심사위원이논의한 결과 우선, 「헛도는 속도는 주제의식 면에서 현대 산업사회의 무의미한 반복과 헛된 욕망의 지향성을 잘 설정하였으나 관념적 성격이 많이남아 있음이 문제로 지적되었고, 터치터치」 또한 현대인의 고립성과 소외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으나 추상적이고 관념적 성격을 다 벗어 내지 못함이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사막에 눈이 오다는 표현의 묘미와 삭막한 땅위의 고독한 존재자의 쓸쓸한 심리를 잘 드러내 주고 있으나 산업사회의상징적 의미로 쓰고 있는 사막이 조금 진부하다는 지적을 받았고, 「텔레마케터」는 물질적 사회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억압된 심리를 텔레마케터와고무 인형으로 잘 살려 낸 점이 돋보였으나 아직 정제되지 않은 표현이 보여 선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비해 「허공에서 더 깊어지는 추위는 현대 사회 속의 하층 노동자의 삶을 사실적 사물들을 동원하여 참신하게 그려 내고 있으면서 그것에 따뜻한 시선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성과 진정성을획득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미덕으로 꼽혀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심사위원 : 강은교. 김경복(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