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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바꾸자 (민 13:30)
우리의 모든 생각과 상황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음과 생각, 즉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며 무엇을 보는가를 결정하는 관점(觀點)은 대단히 중요하며 다분히 주관적입니다.
어린 아이가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 어른들이 그 단어를 찾는 TV프로가 있습니다. 꼬마는 자신의 관점으로 단어를 설명합니다. “그 사람이 왔다 가면 마구 혼나요.” 어떤 사람이 왔다 가면 아이가 혼날까요? ‘손님’입니다. 아이들은 손님이 오면 흥분을 해서 일을 저지르곤 하지요. “엄마랑 목욕할 때 꼭 하는 거예요.” 정답은 ‘만세’입니다. “손가락 크기만 해요.” 손가락 크기만 한 것은 많지요. 그런데 정답은 ‘콧구멍’입니다. 이것이 그 아이의 관점입니다. 관점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경험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외 없이 내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 세상을 봅니다.
관점은 주관적일 뿐 아니라 상대적이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비행기, KTX, 헬리콥터…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런데 정답은 무엇을 타든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면 가장 빨리 갑니다. 관점의 상대성입니다. 관점이란 이처럼 주관적이고 상대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조차 우리의 관점에 집어넣으려는 무지를 보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관점을 성경적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바꾸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오리-토끼’라는 그림을 놓고 하는 실험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보기에 따라 오리의 주둥이로 보이기도 하고 토끼의 귀로 보이기도 합니다. 죠셉 세스트라는 미국 심리학자가 시도한 실험으로서,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 오리입이라고 하거나 토끼귀라고만 했지 “이렇게 보면 토끼귀고, 저렇게 보면 오리입이네요”라고 말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은 사물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점입니다. 똑같은 것을 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동일한 경험을 했지만 사람에 따라 설명이 달라집니다. 같은 경험에 대해서 각자의 해석과 그 해석의 편집을 서로 나누고 있을 뿐입니다. 같은 사건에 대해 한겨레신문과 조선일보의 기사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관점의 차이 때문입니다.
관점의 차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오늘 본문 민수기 13장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기둥, 불기둥을 경험하고 맛나와 메추라기를 다 먹어 본 후에 드디어 가데스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지혜를 냅니다. “우리가 정탐꾼을 보내어 어느 길로 가며 어느 성읍으로 가야할 지를 알아 오게 합시다.” 모세는 좋은 생각이라며 12지파의 지휘관 12명을 뽑아 40일 동안 정탐을 하도록 보냅니다.
그들은 돌아오면서 큰 포도송이와 무화과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와, 그곳은 대단한 곳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정탐꾼 12명은 동일한 것을 보고 왔지만 열 명과 나머지 두 명의 평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열 명은 “그들의 성은 하늘을 찌르는 듯하고 거기 사는 아낙 자손은 거인들이어서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완전히 메뚜기와 같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나머지 두 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먹이다”라고 말합니다.
관점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본받아야 할까요? 어느 쪽을 본받을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인생은 결국 선택입니다. 사르트르는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B’ Birth(탄생)와 ‘D’ Death(죽음) 사이의 ‘C’ Choice(선택)로 만들어진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은 외적으로 보았을 때 굉장히 합리적인 평가를 했습니다. 상대의 성은 높고 견고했습니다. 거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싸움도 잘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 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였던 사람들입니다. 오합지졸입니다. 당연히 메뚜기들입니다. 굉장히 합리적인 판단이지요.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것을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이라는 조건을 답니다. 이들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믿는 사람들 사이에는 천군천사들을 보낸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결국 영적인 관점이냐 아니냐가 이 두 그룹을 나누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중요한 트렌드 중 하나입니다. 제가 쓴 ‘성공을 이루는 7가지 완전 소중한 비밀’이라는 책에서도 다루고 있는데, 지금 세상의 트렌드를 보면 특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인간을 동물의 연장선상에서 봤습니다. 침팬지의 DNA 배열은 인간과 98.6%가 같습니다. 침팬지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최근의 트렌드는 인간이 침팬지와 다른 1.4%의 독특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러분의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맞닿게 해보시겠습니까? 안 닿는 분이 계십니까? 만약 안 닿는다면 아직 인간이 덜 된 것입니다. 인간만이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물건을 들 때도 이 두 손가락을 이용합니다. 동물들은 손바닥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절대 집을 수가 없습니다. 엄지손가락은 얼마나 기가 막히게 만들어졌는지, 우리나라 10대 젊은이들이 세계에 나가 핸드폰문자 보내기 1등을 하게 만든 엄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교하게 만드신 작품입니다. 뼈가 자라서 된 다른 동물들과 구조가 다릅니다.
인간만이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게 집니다. 만화영화를 제외하고는 동물은 절대 얼굴이 빨게 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슬플 때 눈물을 흘리지요. 동물도 눈물을 흘리지만 슬픈 감정 때문이 아니라 위생 때문입니다. 마치 자동차 앞 유리가 더러워지면 워셔액을 뿌리고 와이퍼를 작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만이 태어날 때부터 미적 감각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검증해 보고 싶은 분은 태어난 지 4-5개월 된 아기에게 “까꿍~”을 해보십시오. 만약 아기가 웃으면 부담스럽지 않은 얼굴이요, 운다면 좀 부담스럽게 생겼다는 말입니다. 웃는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각진 것보다는 둥그스름한 것을 더 좋아합니다. 아기들은 주로 달덩이같이 생긴 얼굴을 보고 웃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달덩이 같은 얼굴이라도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리고 “까꿍”을 하면 아기들은 모두 웁니다. 왜 그럴까요? 대칭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은 태어날 때부터 둥그런 것, 대칭이 되는 것, 조화가 잘 되는 음을 좋아하고 빗소리, 바다소리, 물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좋아합니다. 최근의 트렌드는, 인간은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내적이고 영적인 것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이고 정체성입니다. 영적인 영역이 중요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중요하며 그분과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영적인 눈으로 매사를 봐야 합니다. 겉의 것을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에 멈추지 말고 영적인 영역에서 해답을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와 갈렙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영적 관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관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열 명은 매사를 현재의 관점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과 싸운다면 질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해 왔는가 하는 과거의 역사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데려갈 것이라는 약속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야, 이스라엘 백성들 진짜 한심하다! 홍해가 갈라지는 엄청난 일을 잊을 수가 있나? 우리는 탄천이 아니라 탄천 지류라도 내 눈 앞에서 갈라지면 의심 없이 믿고 살 것 같은데!”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인의 망각의 속도보다 빠른 것이 없다.” 우리가 은혜를 얼마나 빨리 잊어버리는 존재인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맛나, 메추라기, 불기둥, 구름기둥을 다 경험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잊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적을 이기도록 도와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에만 집착해서 보지 말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큰 틀에서 현재를 보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상황이나 경제를 예측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상황이 조금만 어려워져도 우리의 지형적 특성이나 정치적, 군사적인 문제를 들먹이며 불안해하고 걱정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5천 년 역사를 돌아보십시오. 지금처럼 잘 풀린 때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외국의 침입을 931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런 침입에도 살아남은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민족을 끊어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DNA를 독특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독특합니다. 여러 차례의 외침을 받으면서 음식을 오랫동안 숨겨 뒀다가 먹어서 그런지 발효음식이 발달했습니다. 우리 교인 한 분이 영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하루는 된장찌개를 끓였답니다. 그런데 문소리가 꽝꽝 나서 나가보니 바로 윗집에 사는 영국 할머니가 “이게 무슨 냄새요? 다음부터는 먹지 않았으면 좋겠소!”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청국장을 구해서 끓였답니다. 그랬더니 또 위층 할머니가 내려오셔서 “이건 또 무슨 냄새요? 그냥 어제 것 먹어요!”라고 하셨답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처럼 많은 잡초를 먹는 나라도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김이나 미역을 먹으면 미국사람들이 뭐냐고 물어 봅니다. 그런데 영어로는 김이나 미역, 우뭇가사리, 다시마 등등을 다 합쳐서 seaweed(바다잡초)라고 하지요. 우리처럼 다양하게 먹는 경우가 없습니다. 봄만 되면 냉이, 쑥, 씀바귀 등등 육지 잡초도 남김없이 먹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음식을 눈으로 먹습니다. 차려놓은 것을 보면 작품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코로 먹습니다. 음식 냄새부터 맡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맛을 먼저 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배로 먹습니다. 양으로 승부를 보는 민족입니다.
우리는 많이 먹고 다양한 것을 먹을 뿐만 아니라 언어 속에도 ‘먹는다’는 표현이 많습니다. “고생했지!”를 “애먹었지!”라고 합니다. “망했다”를 “물 먹었네”, “쫄딱 말아먹었네”라고 합니다. 홍수완 씨는 챔피언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뇌물도 먹고, 욕도 먹고, 감동도 먹고, 나이도 몇 살 먹었냐고 물어 봅니다. 사람이 “싱겁다” “짜다” “밥맛이다” “맛이 갔다” 등등 먹는 표현이 많습니다. 심지어 이메일 주소에 붙이는 @(at)표시를 ‘골뱅이’라고 읽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우리 민족은 뭐든지 먹을 수 있다,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있다, 즉 무엇이든지 이겨낼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931번의 외세의 침입으로 독특한 문화와 언어가 형성되었고 그 안에서 독특한 DNA가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21세기에 우리 민족을 쓰시고자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이 어렵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공들인 5천 년, 우리를 쓰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을 기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질은 또 얼마나 독특합니까? 이렇게 조급한 민족도 없습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컵을 붙들고서 기다리는 민족은 우리 밖에 없습니다. 편의점에 가서 3분 컵라면에 물을 붓고 3분을 기다리고 있는 젊은이가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다 먹는 데까지 3분 걸립니다. 티백은 뜨거운 물에 담가 두면 저절로 차가 우려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만 두질 않지요. 마구 흔든 다음에 스푼으로 꾹 눌러 반 죽여 놓습니다. 차를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알차게 우려먹는 민족입니다. ‘빨리빨리’ 정신을 우리의 약점이라고 하지만 앨빈 토플러는 21세기에 대한민국이 뜰 수 있는 최고의 기질은 바로 ‘빨리빨리정신’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쏠림현상’이라는 기질이 더해집니다. 뭔가가 좋다고 하면 모두들 우르르 몰려갔다가 아니라고 하면 쑥 빠집니다. ‘신드롬 공화국’, ‘바람의 왕국’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어쩌다 일을 저지를 때 보면, 진짜 ‘저지른다’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심사숙고하지 않고 무모하게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올인(All in)’이라는 말을 마구 씁니다.
이런 무모함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칼 웨이그라는 미시간대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세상을 연구하고 그 데이터를 분석한 후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려면 이미 세상은 바뀌어 있다.” 이런 세상에서는 일단 일을 저지르고, 생기는 문제들을 즉흥적으로 잘 대응하는 나라나 기업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CEO들과 성경공부를 할 때,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표현이 있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 말씀이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분이 기가 막힌 표현을 합니다. “다리같이 보여? 그러면 무조건 뛰어!” 그 결과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또 ‘배려 문화’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대화 소통에 상대를 동참케 하는 것이 있습니다. 머리를 자르러 가서 미용사가 “어떻게 해 드릴까요?”라고 물으면 “적당히 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음식점에서 “얼마나 맵게 해 드릴까요?”하면 “적당히 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음식이 너무 맵게 나오면 ‘이 집 음식 맛없어!’라며 다시 안 갑니다. 손님인 나를 눈치 없이 대했다는 결론입니다. ‘눈치가 없다’는 말은 ‘미련하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의 극치가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서 제일 많이 쓴다는 ‘거시기’라는 단어입니다. “거시기한테 거시기 좀 갔다 주그라.” 그래도 일이 진행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눈치문화’와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기질이 좋은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처음에는 어리버리 하다가도 금방 상황 파악을 끝내고 자리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가장 많이 흩어져 사는 민족은 중국인도 유대인도 아닌 우리 민족입니다. 저는,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쓰시고자 이렇게 준비하셨구나, 믿는 사람이 깨어서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인도하심으로 봐야겠구나 하는 기대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때는 늘 한결같이 하시지는 않습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내려갈 때 사람들은 죽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내려갈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더 높이 올리시겠구나!” 이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올려 보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정상에 가까울수록 산이 더 가파른 것처럼, 우리가 힘이 들수록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관점에서 매사를 보면서 그분과 더 가까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관점’으로 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정탐꾼들도 동일한 경험을 합니다. 갈렙이 “우리가 그 땅을 올라가서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할 때 열 명의 사람들은 “우리가 능히 이기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두 부류가 모두 그들의 믿음대로 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 명에게 “너희가 나를 멸시하느니라”라는 엄청난 표현을 쓰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만드십니다. 나머지 두 사람을 통해서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세대가 성숙하여 이들을 통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최근에 굉장히 흥미로운 실험결과를 보았습니다. 주제는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는가, 떨어지지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먼저 참여자들을 두 부류로 나누기 위한 설문을 실시했습니다. 설문에 응한 사람들은 그 설문내용의 의미는 모릅니다. 연구자만 알 수 있습니다. 두 부류 중 하나는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가 들더라도 기억력이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수년에 걸쳐서 추적한 결과, 참여자들은 애초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 그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뇌는 나이가 들면 다 망가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뇌는 망가집니다. 그렇게 믿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연구는 뇌는 근육과 같아서 쓰면 쓸수록 발달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나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인지적 편향성’이라고 합니다. 같은 것을 봐도 무엇을 보고 있는가, 어떻게 보고 있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단 긍정적인 것이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 부정적인 것이 틈타지 못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것이 들어가면 긍정적인 것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밖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느 것을 넣느냐는 선택입니다. 두려움과 낙심과 어둠을 넣는다면 기대와 소망과 믿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상도 이것을 알기에 긍정적인 것을 집어넣으라고 말하고 있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어떻게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살 수가 있겠습니까?
믿음을 집어넣으십시오. 소망을 집어넣으십시오. 기대를 집어넣으십시오. 긍정을 집어넣으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끌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매사를 영적으로 보면서, 지금까지 나의 삶을 주관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주관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관점을 가지고 믿음으로 도전하여 매사에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확대의 법칙 / 13:30-33
본문은 열 명의 차세대 지도자들과 두 명의 차세대 지도자 갈렙과 여호수아의 운명이 바뀐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같은 사건, 같은 상황을 두고서도 왜 이렇게 행운과 불행으로, 기회와 위기로 갈렸습니까? 문제의 크기와 상황의 위기는 꼭 같았는데 말입니다.
한 편의 사람들은 문제의 크기를 뻥튀기로 크게 튀겼습니다. 자신은 가만있고 문제만 뻥! 튀겼으니 눈덩이처럼 커진 문제가 무서워 당연히 후진 기어 쪽으로 손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편의 사람들은 문제의 크기를 압축기로 놓고 최소의 단위로 압축시켜 버렸습니다. 거인이라 생각했던 가나안 원주민들이 난장이처럼 작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감 있게 전진 기어를 놓으면서 가자! 고 합니다.
1. 우리의 관점을 확대해야 합니다.
확대의 법칙! 무엇을 확대하라는 것입니까? 문제의 크기를, 상황의 위기를 확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문제, 작은 상황을 뻥튀기하면서 확대해 버립니다. 그러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큽니다.
㉠ 성격 때문에 문제가 확대됩니다. 마음이 너무 여려서, 예민해서, 신경과민으로 문제를 실제보다 더 크게 확대합니다. 이런 분들은 믿음이 어느 선(線)을 넘지 못합니다. 문제만 있으면 후진 기어를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 교회생활에 믿음의 불신이 문제를 확대합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늘 문제는 있습니다. 그러려니 넘어가면 될 것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결해 갈 것을 믿으면서 기다리면 될 걸 문제를 확대시켜 버리고 교회는 후진기어를 놓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확대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실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해당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충만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충만성은 최대한으로 확장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우주 만물에, 모든 공간에 충만하신 유일신이기에 더 이상 충만 하려야 충만할 데가 없고 확대하려야 확대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최대치로 확대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확대되지 않습니다. 확대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눈입니다. 우리 눈을 더 크게 확장하면 우리 눈에 비치는 하나님도 점점 확장되어 갑니다. 우리 눈을 더욱 깊이 주님께 주목할수록 하나님의 숨겨진 속성들이 더욱 또렷하게 잡힐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더 크게 보이고 더 분명하게 보이면서 하나님의 역량이 확장됩니다.
확장은, 하나님이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 믿음이 확장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우리 지식이 확대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 마음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문제와 상황을 바라보게 되면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다시 용기와 힘을 내게 되고 용서하고 털게 되고 전진 기어를 놓으면서 다시 출발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회복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2. 문제의 크기보다 하나님의 크기를 확대시키십시오.
망원경에는 확대의 법칙과 함께 축소의 법칙도 있습니다. 거꾸로 돌려 보면 큰 것도 아주 작게 보입니다. 학교도 작고 선생님도 작게 보이고… 그것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망원경의 확대의 법칙, 축소의 법칙을 믿음에서 잘 활용해야 합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은 망원경을 잘못 사용합니다. 커보여야 할 것은 축소해 버리고, 작게 보여야 할 것은 크게 확대합니다. 그러니 늘 문제투성입니다. 매사에 후진 기어만 놓고 살아갑니다.
확대만 해서 좋은 게 아니고 축소만 한다고 좋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확대해야 하지만 문제의 크기에 대해서, 상황의 위기에 대해서는 축소해야 합니다. 자신을 내세우는 일은 축소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에 대해서 그들이 한 일에 대해서는 확대의 망원경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인간성이 참 좋게 됩니다. 반대로 가면 인간성이 안 좋습니다.
바로 그런 일이 본문에 일어났습니다. 열 명의 사람들은 상황을 직시(直視)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의 관점은 정확하고 정직하게 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점에서 그것은 옳습니다. 가나안은 좋은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거기에 거인이 살고 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인간의 눈으로 판단해서 백성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정리를 해 준 다음,“비록 그리할 지라도 하나님에게 비교하면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들고 있는 우리들에게 저들은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해석을 내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확대의 망원경 렌즈로,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축소의 망원경 렌즈로 보아야 했습니다. 아깝게도 거꾸로 망원경을 보았습니다. 거인들에 대해서는 확대의 망원경으로, 자신들에 대해서는 축소의 망원경 렌즈로! 아예 하나님은 개입도 안 시켰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자신들은 초라해진 반면에 상대방은 엄청 커졌습니다. 문제가 몇 십 배로 확대되었습니다. 위기가 몇 십 배로 확대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 명의 지도자들에 의해 편집된 내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크기보다 문제의 크기를 확대시켰습니다. 그들은 믿음이라고 적힌 쪽으로 상황을 본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적힌 쪽을 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후진 기어를 작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그들은 반대입니다. 그들에게도 믿음이라는 망원경, 이성(理性)이라는 망원경, 현실을 직시하는 망원경이 있습니다. 그들은 망원경을 제대로 사용했습니다. 원수들은 축소렌즈를 사용했습니다. 가나안에 숨어들어 망보듯 살펴볼 때는 왜 그렇게 크게 보였을까요? 두려운 마음으로 볼 때는 그들이 거인이었습니다. 큰일 났다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원주민들을 보고… 하나님은 엄청 크신 분이었습니다. 엄청난 용량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본 것은, 믿음이라는 망원경을 거꾸로 해서 본 것입니다. 축소의 법칙으로 상황을 본 것입니다. 그랬더니, 원주민들은 작게 축소됐습니다. 그들의 용맹, 숫자, 군대, 땅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작게 축소되고 위기도 작아졌습니다. 그들은 전진기어를 놓으면서 말했습니다.
“앞으로 가자!”
꼭 같은 상황, 꼭 같은 문제였습니다. 열 명의 지도자들은 문제 앞에서 문제와 자신들만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문제와 문제를 만난 나-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문제를 보니 문제는 확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명의 지도자들은 문제와 문제를 만난 나의 관계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였습니다. 확대의 법칙, 축소의 법칙을 활용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확대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눈이 되고 하나님의 관점이 되니까 정면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형극(荊棘)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문제더니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니 문제는 문제이나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위기더니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더니 그 전에도 있었던 문제, 나만 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하는 일상적인 문제처럼 작게 보였습니다. 축소의 법칙입니다. 그러니 불평할 일도, 의심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믿고 따르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전진기어를 작동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렌즈로 본다면 문제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은 더 커 보이십니다. 하나님만으로 확대된다면 우리는 문제를 압축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십시오.
갈렙과 여호수아는 확대의 법칙과 축소의 법칙을 사용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배자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부관으로 하나님의 성막에서 살았습니다. 모세는 내려갔지만 여호수아는 거기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서 대했고 하나님의 위엄과 광대함을 알았습니다.
갈렙은 온전한 사람입니다. 일편단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주목했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였습니다.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예배한 사람입니다.
다윗도 군급한 지경에 빠졌던 적이 많습니다. 그는 오랜 망명생활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불러오고 자신들은 빠졌습니다.
돋보기를 통해 있는 사물을 우리 수준에서 확대하듯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위엄과 힘을 확대합니다(시 34:3). 우리가 성경이라는 돋보기를 사용하는 순간, 예배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확대되면 하나님의 역량이 커지고 우리 생애가 변화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불가능한 언약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평생 하나님의 돋보기를 쓰고 살았습니다. 정반대의 상황을 대하면서도 예배로 하나님을 확대한 것입니다.
오늘 문제가 보여도 먼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성심을 다해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케이! 하실 때까지 예배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을 향할 때 마음의 느낌이 옵니다. 그 느낌이 올 때까지 하나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 때문도 아니고 상황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문제의 근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채워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그분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에서 대접받는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웨이터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열심히 서비스하는 예배의 웨이터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정도가 지옥에 가지 않는 보험을 든 정도로만 믿습니다. 지옥에는 가기 싫고 하나님에게는 열정적이 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니 예배는 시들해지고 예배에 관전자가 됩니다. 그래서 잘 한다 못한다, 은혜 받았다 못 받았다 판단합니다. 우리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가 세상에서 더욱 능력 있게 하고 확대된 하나님의 관점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누가 큰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크게 보는 사람일수록 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확대하는 것만큼 크게 됩니다. 안 좋은 문제는 확대하는 만큼 작은 사람입니다. 문제를 축소시키는 사람만큼 큰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전진기어로 살아갈 것입니까,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올려다보며 후진기어로 살아갈 것입니까?
출처: 야곱의 우물가 글쓴이: 예수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