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문장가, 박팽년
신 웅 순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
세조는 끝까지 박팽년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했다. 박팽년의 재주가 아까워서였다. ‘까마귀가 눈비 맞는다해서 희는듯 하지만 희게 되지는 않는다. 빛나는 명월은 밤이라해서 어두워지지 않는다.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수 있겠는가? ’ 밝은 달은 자신을, 밤은 세조를 지칭하고 있다.
세조의 명을 받고 김질이 옥중으로 찾아가 태종의 노래, 하여가로 그의 마음을 떠보려하였으나 박팽년이 이 단심가 한 수로 세조의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자신의 굽힘 없는 지조를 보인 시조이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던 날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후일을 기약하자는 성삼문의 만류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박팽년은 충청감사를 거쳐 형조판서로 있었다. 그러다 단종 복위 실패로 이렇게 국문을 당하게 된 것이다.
친국청에 나온 박팽년은 의연했다.
“ 네가 모의에 가담하였느냐? ”
“ 가담했으니 여기에 나오지 않았소이까. 나으리. ”
나으리라는 말에 세조는 또 한번 화가 치밀었다.
“ 네가 나의 녹을 먹었고 또 나에게 신이라 일컬었으니 너는 나의 신하가 아니고 무 엇이더냐? ”
“ 나는 상왕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외다.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소이다.”
세조는 충청감사 때 그가 올린 장계를 확인해보았다. 신하 신(臣)자 대신 거인 거(巨)자가 씌여 있었다. ‘신하’ 신, 박팽년이 아니라 ‘거인’ 거, 박팽년이었다. 원래 장계의 ‘臣’자는 신하를 낮추어 불러 작게 쓰는 법이다. 세조는 이를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녹도 성삼문처럼 창고에 고스란히 쌓아두었던 것이다.
금부도사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그를 보고 말했다.
“ 고집을 잠깐 거두시오면 온 집안이 영화를 누리실텐데. 무슨 고집을 그렇게도 부리 십니까 ? ”
“ 더럽게 사느니 깨끗하게 죽는 것이 나으리니라.”
그는 기꺼이 형을 받았다. 아버지, 동생, 세살 짜리 아들까지 사형당했다. 이 때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조정에서는 아들을 낳거든 즉시 사형시키라고 명령했다. 때마침 종도 임신 중이었다.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해산을 했다. 약속한 듯이 주인은 사내 아이를 낳고 종은 딸 아이를 낳았다. 종은 자기 아이와 부인의 아이를 바꿔치기 했다. 박팽년의 사내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운 것이다. 성종 대에 이르러 이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성종은 이를 사면해주고 ‘일산’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해 주었다. 이 때문에 사육신 중 박팽년만은 대를 이을 수 있었다. 부인 이씨는 관비가 되어 평생을 수절하여 일생을 마쳤다.
경북 달성 묘골 마을에는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여기 육신사에는 원래 박팽년 선생을 모신 사당이었으나 그의 후손이 꿈속에서 선생의 제삿날에 사육신중 다른 분들이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을 본 뒤 나머지 다섯 분의 위패도 함께 봉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는 일찍이 단심가 한 수 시조를 남겼다.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금강(玉出崑崗)이라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아모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한들 님마다 좇을소냐
금은 아름다운 물에서 나지만 물마다 금이 나며, 옥은 곤윤산에서 나지마는 산마다 옥이 나랴. 아무리 여자는 남자를 따라야한다지만 님마다 이를 좇아야겠는가?
박팽년. 본관은 순천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으로 회덕 출신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다. 성품이 차분하고 말이 없고 종일 단정히 앉아 의관을 벗지 않았다.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시호는 충절이다.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고 대전의 창계 숭절사, 영월의 창절서원, 달성의 육신사 등에 제향되었다. 대전 광역시 동구 가양 2동에 대전 광역시 기념물 제 1 호 박팽년의 유허가 있다. 달성 묘골에는 사육신을 배향한 ‘육신사’가 있다.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다. 그의 묘에는 그저 ‘박씨지묘’라는 글만 표석에 새겨져 있다. 성삼문 등 육신이 죽은 뒤에 한 의사가 그들의 시신을 거둬 이곳 노량진 기슭에 묻었으며, 무덤 앞에 돌을 세우되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저 ‘아무개 성의 묘’라고만 새겨놓았다 고 한다.
인생은 혼자서 선택을 강요받을 수 밖에 없다. 소중하지 않은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더더욱 어디에도 없다. 충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한번 쯤 생각해볼 일이다.

박팽년 유허비.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대전시 동구 가양동 161-1소재.

창계 숭절사.문화재 자료 제 2호.대전시 중구 안영동 560소재

낙빈서원
(대구광역시 달서군 하빈면 묘리 792)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의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셨다.
-출처 : 신웅순, 『시조는역사를 말한다』(푸른사상,2012),163-1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