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서 유일한 부자(父子) 2대 공신 묘역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2호
▲ 무덤들이 물결을 이루는 류홍 묘역 (제일 위쪽에 류홍 묘가 있음) |
구로구의 대표 지붕인 천왕산(天旺山. 144m) 북쪽 끝자락 구석에 류순정(유순정), 류홍(유홍)
부자를 중심으로 한 진주류씨(유씨) 묘역이 넓게 누워있다.
류순정과 류홍은 조선 초기 인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해 부자가 나란히 공신(功臣)이
되었다. 1512년 류순정이 병사하자 중종(中宗)은 매우 슬퍼하며 3일 동안 조회(朝會)를 열지
않았으며, 왕족들에게만 주던 장생전<長生殿, 장흥고(長興庫)>의 관곽(棺槨)을 특별히
내주어
장례를 도왔다. 또한 오류동과 온수동(溫水洞), 부천시(富川市) 여월동과 작동 지역에 300만
평(9,917,355㎡)에
이르는 너른 땅까지 내렸는데, 류순정은 그 땅 중에서 제일 명당으로 꼽히
는 천왕산 자락에 유택(幽宅)을 썼다.
1551년 류홍이 사망하자 아비 묘 서남쪽 자락에 묻혔으며, 이후 후손들은 중종에게 하사받은
다른 동네 땅에 묻혔다.
20세기 이후, 묘역 주변을 조금씩 처분하면서 묘역 규모가 줄어들었고, 속세로 떨어져나간 묘
역
동북쪽에는 동부제강에서 사원용 아파트로 세운 동보아파트가, 동남쪽에는 금강수목원아파
트와 주택이 들어섰다. 그렇게 해서 남은 묘역은 26,531㎡로 비록 옛날만큼은 못해도 여전히
넓은
편이다.
묘역 서북쪽과 서쪽, 서남쪽은 딱히 건드리지 않아 자연 지대로 남으면서 개발의
칼질에 완전
히 고립되는 꼴은 면했으며, 주변에 흩어진 류순정의 후손 묘 5기도 그 땅을
처분하면서 모두
류홍 묘 밑으로 가져와 7대가 모여있는 문중 묘역이 되었다.
20세기가 끝나도록 묘역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적지 않게 훼손이 되었으나 2004년에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더 이상 망가지는 꼴은 면했다. 또한 후손들은 집안의 보물로 16세
기에 제작된 류순정의 영정 4점과 류홍의 영정 1점을 안전하게 후대에 전하고자 서울시에 흔
쾌히 기증해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 보관되고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흔치 않은
16세기
초상화로 그림 바닥에 채전이 등장하는 최초의 예로 가치가 대단해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솔직히 국가 보물급임)
이들 영정은 고약했던 6.25 시절 진주류씨 종손인 유종식(柳宗植)이 목숨을 걸고 지킨 것으로
그때 식솔과 가재도구는 챙기지도 않고 오직 영정함만 챙겨 어깨에 맸다. 그의 부인이 피난길
에
가솔은 안중에도 없고 영정만 챙기냐고 따지자. 집안의 종손으로 그것을 잃어버리면 조상
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답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영정과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서적들, 필요한
가재도구를 챙겨 가솔들과 무사히 피
난을 떠났고, 그렇게 영정은 살아남아 그 가치는 백두산에 붙어있을 정도로 커졌다.
류순정, 류홍 묘역은 후손들의 배려로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다. 묘역 밑에 후손이 거처하는
집이 있으며, 그 집을 중심으로 북쪽에 묘역의 주인공인 류순정 묘, 서쪽에 류홍과 후손들의
묘가 자리해 있다. 류홍과 류순정 묘는 16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무덤 석물과
신도비도 그 시절 것으로 가치가 높다. 그리고 후손들의 무덤도 묘비 등 일부를 제외하고 옛
날
것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류홍 묘는 뒤쪽에 숲이 있으나 류순정 묘는 바로 북쪽과 동쪽 담장 너머로 동보아파트가 들어
앉아 묘역을 굽어보고 있어 보기에도 좀 딱해 보인다. 적어도 류순정 묘 주변 땅은 지켰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 했던 것이다. |
▲ 진흥군(晋興君) 류식(柳寔)과 청풍김씨(오른쪽 무덤)의 합장묘,
류중광(柳重光)과 나주정씨(왼쪽 무덤) 합장묘 |
류식은 류돈의 손자이자 류시경의 아들로 류순정의 7대손이며, 류중광은 류준의 아들로 류순
정의 4대손이다. 무덤을 지키고 있는 문인석(文人石)과 망주석(望柱石), 동자석(童子石), 상
석(床石), 혼유석(魂遊石)은 조선 중기 것으로 고색의 때가 역력하며, 묘비는 1989년 이후에
새로 장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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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흥군 류식과 청풍김씨의 묘비 |
▲ 류중광과 류식 묘 (남쪽에서 본 모습) |
▲ 류사필(柳師弼)과 청주한씨의 합장묘(왼쪽),
류준(柳浚)과 연안이씨의 합장묘(오른쪽) |
류중광, 류식 묘 바로 위에는 류사필과 류준의 묘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류사필(1501~1559)
은 류홍의 아들로 어머니(풍양조씨)가 2살에 사망하자 외가에서 자랐는데, 공신의
자손으로
과거시험도 거치지 않고 음보(蔭補)로 관리가 되어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 사헌부 감찰(
司憲府 監察), 금성현령, 김포현령, 예빈시 주부, 온양군수를 지냈다. 부인은 청주한씨로 영
의정을 지낸 한효원(韓效元)의 딸이다.
류준은 류사필의 아들로 아버지나 할아버지 만큼의 공적은 없으나 그들의 신도비를 세우지 못
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하여 1567년에 증조할아버지인 류순정의 신도비를 마련했고, 류
홍 신도비를 세우고자 친분이 있던 강령군(江寧君) 홍섬(洪暹)에게 신도비의 비명(碑銘)을 부
탁했다. 그래서 홍섬이 흔쾌히 글을 짓고 당대 문장가였던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글씨
를
써서 1573년 신도비를 완성시켰다.
또한 1574년에는 그들(홍섬, 송인)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인 류사필의 묘갈까지 장만했으니 묘
역 관리만큼은 아주 100점 감이었다. 이들 묘갈과 신도비는 류홍 묘역
밑에 나란히 자리해 있
다.
류중광, 류식의 묘처럼 문인석과 망주석, 키 작은 동자석, 상석, 묘비를 지니고 있으며, 1989
년 이후에 세운 묘비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16세기 것들이라 고색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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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준과 류사필묘 (북쪽에서 본 모습) |
▲ 450년 가까이 묵은 류사필 묘갈(墓碣) |
▲ 류돈(柳焞)과 삭녕최씨묘
류돈은 류중광의 아들로 류중광묘 바로 남쪽에 자리해 있다. 묘비와
상석을 제외하고 16세기 것을 유지하고 있다.
▲ 류홍(柳泓)묘 |
류홍 묘역 제일 높은
곳에는 류홍 묘가 자리해 후손들의 무덤을 굽어보고 있다. 류순정과
더
불어 이곳 묘역의 터줏대감으로 구름무늬 이수를 갖춘 늙은 묘표(묘비)와 문인석, 장명등, 망
주석, 상석을 지니고 있으며, 묘역 밑에는 높은 사람만 장만할 수
있던 신도비까지 두어 그의
높은 위치와 행적을 알려준다.
류홍(1483~1551)은 류순정의 아들로 어머니는 안동권씨<권효충(權孝忠)의 딸>이다. 자는 자연
(子淵)으로 1506년 중종반정 때 반정에 가담한 아버지를 도와 부자가 나란히 정국공신(靖國功
臣) 4등에 책록되는 위엄을 보였다. 그 인연으로 그들 부자의 무덤은 서울에서 유일한 부자 2
대 공신 묘역으로 천하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반정 이후 사복시주부,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공조정랑(工曹正郞)이 되었으며, 1510
년 부산포와 제포(薺浦), 염포(鹽浦)에서 왜인(倭人)들이 소란을 일으킨 삼포왜란(三浦倭亂)
이 터지자 남정도원수(南征都元帥)로 파견된 부친을 따라가 왜인을 토벌했다. 그들 부자는 무
예에 아주 능했는데 특히 활을 잘 쏘았다고 전한다.
삼포왜란을 평정하고 내자시(內資寺)와 군기시(軍器寺)의 첨정(僉正)이 되었다가 1511년 무과
에 급제해 사복시 부정(副正)에 올랐으며, 훈련원부정을 거쳐 제포첨사(薺浦僉使, 창원 웅천)
가 되었다.
그는 역대 첨사들이 왜인들에게 뇌물을 받고 그들에게 발급한 도서(圖書)의 검사를 소홀히 한
점을 지적하고 왜인들의 왜관(倭館) 출입과 왜선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이듬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오위장(五位將)을 겸임했다.
1519년 이후 원주와 정주 목사를 거쳐 훈련원도정, 충청도병마사, 수군절도사, 경상우도병마
사, 전라도수군절도사, 회령부사, 북병사(北兵使) 등의 주요 군직을 지냈으며, 1544년 진산군
(晋山君)에 봉해지고 부총관(副摠管)을 겸했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위사원종공
신(衛社原從功臣)에 책록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으며, 154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
府事)가 되었다.
무인이지만 문인, 선비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고, 청렴하고 검소하여 공조정랑으로 있을 때 선
임자들이 관청의 기명(器皿)을 멋대로 사용하던 폐습을 근절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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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홍
묘의 동그란 봉분과 묘표(墓表)
비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구름
무늬가 물결치는 이수(螭首)를 두었다. 비신과
이수에는 무심한 세월이 강제로 달아놓은
검은
주근깨와 온갖 상처들로 가득하여 고색의 향기
를
깊이 뿌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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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홍 묘 문인석과 망주석
문인석은 고된 세월에 지쳤는지 일그러진 표정
을 짓고 있으나 대체로 멀쩡한 모습이다. 허나
그 옆의 망주석은 장대한 세월의 칼날을 정통
으로 맞아 밑둥만 일부 남은 가련한 신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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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홍 묘에서 바라본 류순정, 류홍 묘역 일대
가운데 부분에 보이는 집이 후손이 사는 집(재실)으로 그 너머 언덕에
아파트에 둘러싸인 류순정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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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홍의 행장이 적힌 류홍 신도비(神道碑) |
류홍 신도비는
1573년에 손자 류준이 세웠다. 그는 류홍이 사망한지 20년이 넘도록 신도비를
장만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 좌의정을 지낸 강령군 홍섬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했고, 여
성군
송인에게 글씨를 부탁하여 비로소 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좌(碑座) 윗면에 엎드린 연꽃잎 모양의 복련(伏蓮)을 새기고 비신 앞뒤에는 3구획의 안상(
眼象)과 그 밑에 당초문(唐草紋)을, 옆면에는 두 구획의 안상과 당초문을 새기고, 머리에 지
붕돌을 얹혔다. 그 곁에는 아들 류사필의 묘갈이 나란히 있는데 그 모습이 서로 비슷하나 비
석의 명칭은 다르다. (신도비는 3품 이상의 당상관과 왕족들의 무덤에만 쓸 수 있음)
류순정 묘에도 신도비가 있으며, 오랜 풍상에 시달린 비신에는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피어
나 중후한 멋을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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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정의 후처, 평창이씨묘 |
류홍 묘역과 류순정
묘역 중간 산기슭에는 류순정의 부인인 평창이씨묘가 홀로 자리해 있다.
류홍과 류순정 묘역은 2기 이상의 무덤이 몰려있어 심심치는 않아 보이나 평창이씨묘의 무덤
만 그 중간에 외롭게 자리해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마도 풍수지리에 따라 그렇게 묘를
쓴 것 같다.
여기서는 류홍과 류순정 묘역은 물론 금강수목원아파트, 천왕산이 훤히 두 망막에 들어와 묘
역에서 위치가 아주 좋으며, 봉분(封墳)과 묘표, 상석, 문인석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16세
기 것으로 묘표 같은 경우 조선 초에 많이 나타나는 연꽃 봉오리 지붕돌로 작고 앙큼한 형태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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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쪽에서 바라본 평창이씨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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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봉오리 지붕돌을 지닌
평창이씨묘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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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유난히도 크고 귀여운 평창이씨묘의 꼬마 문인석
왼쪽 문인석은 피부가 덜 탔지만 오른쪽 문인석은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탔는지
피부가 아주 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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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이씨묘에서 바라본 류홍 묘역
제일 왼쪽 모퉁이에 류돈 묘, 바로 오른쪽에 류중광 묘와 류식 묘, 그 위쪽에
류사필 묘와 류준 묘가 차곡차곡 들어앉았다. 그리고 그 한참 위에
류홍 묘가 자리하여 후손의 무덤을 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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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정(柳順汀)묘 |
묘역 북쪽에는 이곳의
시조인 류순정묘가 있다. 짙은 숲을 뒤에 둔 류홍묘와 달리 묘 북쪽과
동쪽에 아파트가 비집고 들어와 그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무덤을 굽어본다. 무덤과 키다리 아
파트의 어색한 조화. 이는 개발의 칼질이 개념 없이 자행되는 이 땅의 씁쓸한 현실의 산물로
이곳과 비슷한 처지의 조선시대 묘역이 서울과 수도권에 비일비재하다.
류순정(1459~1512)은 류양(柳壤)의 아들로 어머니는 정즙(鄭楫)의 딸이다. 자는 지옹(智翁),
호는 청천(菁川)이며, 부인은 안동권씨와 후처인 평창이씨가 있다.
청년 시절에는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에 뛰어나 그와
대
적할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1487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전적
(弘文館典籍)이 되었으며,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어 전라도에 들어온 왜구를 수색하여 잡아
들이는데 공을 세웠고, 1491년 함경도평사로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의 막료가 되어 평안
도평사를 역임했다.
연산군 시절에는 임사홍(任士洪)의 잘못을 논박했고, 평안도절도사 전림(田霖)의 권력 남용을
추궁했으며, 북방 야인 문제에 대한 대책을 진언했다. 그 뒤 홍문관교리가 되었는데, 문신임
에도 활솜씨가 뛰어나 부응교(副應敎)에 배수되었다. 이어 사헌부집의를 거쳐 의주목사가 되
었는데, 조선의 그늘에 있던 압록강 이북 지역의 야인을 토벌했을 때, 적정 탐지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군자금 확보와 성곽 수축 등 국경 경비 강화에도 힘썼다.
1503년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1504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 이때 연산군에게 밤사냥에 대해 진언하다가 임사홍의 모략으로 추국을 당하기도 했다.
1506년 연산군에게 불만을 품은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과 반란을 모의하여 그 유
명한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 1등에 청주부원군(淸州府院君), 숭정대부(崇
政大夫)란 큰 감투를 받았다.
반정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임했으며, 연산군 시절에 폐지된 경연 부
활에 앞장섰다. 이후 우의정과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며, 1507년 이과(李顆) 등이 견성
군(甄城君)을 추대하려고 역모를 꾀하자 이를 처리해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에 봉해졌다.
1508년 평안도 인산(麟山)과 강계(江界) 지역에 둔전(屯田)을 설치했으며, 좌의정(左議政) 시
절에는 인천과 김포, 통진 지역에서 도둑들이 설치자 박영문(朴永文)과 유담년(柳聃年)을 포
도대장으로
삼아 그들을 토벌케하고 유민의 안집책을 마련했다.
1510년 삼포왜란이 터지자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병사를 총괄했으며, 다시 도원수가 되
어 왜란을 토벌하고 삼포(부산포, 제포, 염포)에 비왜방략(備倭方略)을 마련했다. 이때 대간
들이 재물을 늘린다는 명목으로 그를 탄핵했으나 오히려 군공(軍功)을 인정받아 영의정(領議
政)까지 올랐지만 불과 2달 뒤에 5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중종은 크게 슬퍼하며 장흥고의 관곽까지 내주는 등, 장례를 특별히 챙겨주었으며, 무안(武安
)이란 시호를 내려주었다가 나중에 문정(文定)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후 중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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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정 묘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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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정 묘를 지키는 꼬마 동자석 |
류순정 묘는 이수를
갖춘 묘표와 상석, 동자석, 망주석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16세기에 조성
된 것들로 고색이 흠씬 묻어나있는데, 묘 바로 밑에는 부인 안동권씨 묘가 있으며, 서쪽 산자
락에는 앞서 언급한 부인 평창이씨묘가 있다. 부인 묘에는 모두 문인석을 갖추고 있어 류순정
묘에는 작은 동자석으로 대신했다. (장명등은 안동권씨 묘에만 세웠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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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정 묘의 뒷통수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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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정의 부인 안동권씨 묘
안동권씨 부인은 류홍의 어머니로 그가 불과 2살 때 세상을 떠났다. 봉분과 묘표,
상석, 문인석, 장명등을 지니고 있으며, 동자석과 망주석은 류순정 묘가
대신 지니고 있어 따로 갖추지는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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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쪽에서 본 안동권씨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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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를 지닌 안동권씨 묘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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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과 왼쪽 어깨에 세월의 때가
가득 낀 안동권씨묘 문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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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세월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안동권씨묘 장명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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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정 신도비 |
안동권씨묘 옆구리에는
류순정 신도비가 우두커니 서 있다. 류순정 묘 바로 동쪽까지 아파트
가 들어서고 묘역과 아파트 경계에 돌담이 둘러지면서 신도비 정면 공간이 좀 야박하게 되었
다. 하여 부득불 옆에서 그를 담았다.
신도비의 모습은 류홍 신도비와 비슷한데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진천군(晉川君) 강
혼(姜渾)이 글을 짓고 여성군 송인이 글씨를 썼다. 허나 글만 받았지 비석을 세우지 못한 상
태로 50년 정도가 흐른 1567년에 류준이 비로소 비석을 세웠다. 비좌와 비신, 지붕돌로 이루
어진 형태로 비좌 윗면에 복련을 새겼고, 전면에 안상 3구획을, 측면에 안상 2구획을 새겼다.
*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 산 43-31, 43-32(오리로13가길
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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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정 묘역에서 바라본 류홍과 후손들의 묘역
저 공간에 류홍을 비롯한 6대의 유택이 둥지를 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