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강세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국내 시장 점유율 50%를 넘으면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던 한국 영화계는 2004년에도 그 여세를 몰아 할리우드 영화를 먼 발치로 밀어내며 독주 체제를 갖추고 있다.
현재 康祐碩 감독의 영화 「실미도」는 1월26일 현재 할리우드의 대작 「반지의 제왕 3-왕의 귀환」을 일찌감치 따돌리고 흥행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실미도」는 개봉 15일 만에 전국 동원관객 400만 명을 돌파한 뒤 800만 명 고지를 넘어 쾌속 질주 중이다. 康祐碩 감독은 이 영화가 「한국영화 1000만 명 관객동원 시대」의 막을 열어 줬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는 눈치다.
2월6일 개봉된 姜帝圭 감독의 신작 「태극기 휘날리며」도 한국 영화 강세를 이어갈 차기 주자로 손꼽히고 있다. 148억원 이상의 거액이 투입된 이 영화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따라서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이 화면을 압도하며 6·25를 경험한 중·장년 세대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러면서도 형제 간의 사랑과 갈등 등 드라마적 요소도 놓치지 않고 있는데다 장동건, 원빈 등 젊은 스타를 대거 기용, 한국전쟁을 남의 나라 얘기쯤으로 여기는 젊은 세대들도 스크린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도 靜中動(정중동), 조용히 물밑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전국 830만 관객 동원이란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친구」의 족쇄에 묶여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을 발표하지 못한 그는 『이제야말로 「친구」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며 차기작 「태풍」의 시나리오 작업에 한창이다. 현재 3稿(고)째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곽감독은 4, 5월께 시나리오를 완성, 오는 8월 크랭크인에 들어갈 계획이다.
◆ 康祐碩 감독
『유머는 영화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양념』
康 祐 碩
·1960년生
·성균관大 영어영문학과 중퇴
·1988년 「달콤한 신부들」로 데뷔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공공의 적」 등 연출
술힘으로 버틴 나날들
康祐碩(44) 감독은 아직도 극장에 들어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실미도」를 찍으면서 너무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그 때의 악몽 같은 기억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날 것 같아서』라는 게 그가 말하는 이유다. 눈밭이나 수중의 폭파 신 등 지극히 위험한 장면도 컴퓨터 그래픽 하나 쓰지 않고 직접 몸을 던져 가며 만들었다. 그런 만큼 감독이나 배우, 스태프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발바닥이 찢어지는 것은 부상 축에도 들지 못했다.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康감독은 『실미도 사건으로 희생당한 고인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康감독은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촬영 기간 내내 「술힘」으로 버텼을 정도였다. 하루에 30분 자면서 작업을 한 적도 있다. 덕분에 체중이 2개월 만에 9kg이나 빠졌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실미도」다. 『다시 찍어도 이보다 더 잘 만들 수는 없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너무나 고생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시작할 때부터 다짐한 게 있습니다. 아름답게 다듬어서 꾸며낸 영화를 만들기 보다는 거칠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자는 것이었죠.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실제 사건을 목격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康감독은 당초 여성관객들의 호응을 포기했다. 남성들만의 극한 세계를 다루고 있는데다 암울했던 현대사의 한 단면을 건드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康감독의 이러한 생각은 처음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영화를 찍으면서 여성 스태프들이 슬프다며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주인공 인찬(설경구 扮)의 어머니 사연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남자 스태프들마저 훌쩍였다. 康감독이 여성 관객들까지 끌어안을 수 있었던 대목이다.
멜로는 없지만 멜로영화같이 찍자는 생각에 康감독은 여성 관객들의 시각에서 감정이입을 시도했다. 그래서 그는 「실미도」를 『슬픔을 동반한 남성세계를 다루고 있다』고 자평한다. 현재 「실미도」의 남성과 여성 관객의 비율은 50대 50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康감독에게 있어 영화 「실미도」는 처음부터 부담 그 자체였다. 생생한 역사적 사실임에도 관련 정보가 거의 없었던 데다 생존 부대원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또 성격은 다르지만 비슷한 임무를 지녔던 북파공작원 부대(HID) 대원들의 시각도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실화답게 묘사하면서도 관객까지 끌어들여야 했습니다. 그 둘 사이에서 평형을 유지하면서 줄타기를 해야 했죠. 엄청난 부담이었습니다. 15년 동안 영화계에 몸담으면서 이번처럼 머리를 많이 굴린 적이 없었어요』
康祐碩 감독은 사실상 흥행 제조기로 손꼽힌다.
1993년,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치인 서울관객 86만 명을 동원하며 성공을 거둔 「투캅스」를 시작으로 「마누라 죽이기」, 「미스터 맘마」, 「공공의 적」에 이르기까지 그가 만든 영화는 흥행 보증수표나 다름 없었다. 「康祐碩표 코미디」, 「康祐碩 사단」 등의 말이 생긴 것도 그 즈음이다.
즉석 유머
그의 영화가 갖고 있는 흥행 코드 1순위는 뛰어난 유머. 「투캅스」에서 康감독은 유머를 통해 비뚤어진 경찰사회를 마음껏 비웃었다. 「공공의 적」에서 가진 자들의 오만함과 이기심, 부도덕성을 꼬집어 낸 것도 역시 코미디적인 요소였다.
「실미도」에서도 그는 유머를 포기하지 않았다. 영화 전반부를 이끌어 나가는 힘은 역시 웃음이다. 슬프고 진지한 순간에서도 그는 코믹한 요소를 삽입해 그 의미를 배가시켜 나갔다.
『두 시간 이상 영화관에 갇혀 있어야 하는 관객들에게 웃음은 그 시간 동안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원입니다. 잔혹한 장면만 내보내면 보는 사람이 얼마나 지치겠어요』
웃음은 또한 중요한 메시지 전달 수단이라고 그는 본다. 마음속에 묘한 여운을 남겨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웃음이므로 영화 속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데 이것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가 영화를 포기하지 않는 한 웃음은 항상 그의 영화 속에 살아 숨쉴 것이라고 그는 자신한다.
촌철살인의 유머러스한 대사들은 모두 康감독의 지휘 아래 촬영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때와 장소, 상황에 가장 적절한 코믹 대사가 완성될 수 있게 된다. 「공공의 적」에서 『강력반은 좀 쳐먹어도 돼』라고 말하는 설경구의 대사도 康감독이 즉석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康祐碩 영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또한 잘 짜인 캐릭터다. 극명한 캐릭터 간의 대비를 통해 그는 캐릭터들의 특성을 더욱 배가시킨다. 「투갑스」에서 안성기와 박중훈의 캐릭터가 그렇고, 「마누라 죽이기」에서 박중훈과 최진실의 배역 또한 마찬가지다. 「공공의 적」에서 설경구와 이성재의 캐릭터는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핵심이다. 투톱 시스템의 생생한 캐릭터는 康祐碩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다.
생동감 있는 캐릭터는 「실미도」에서도 잘 살려지고 있다. 대신 투톱 시스템을 한층 확대한 점이 다를 뿐이다.
『「실미도」에서는 주인공이 없습니다. 설경구, 안성기, 정재영, 임원희, 허준호, 강신일 등 모든 배우들이 주인공이죠. 모두 살아 있는 캐릭터들입니다. 따라서 영화 작업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가운데 하나도 바로 카메라가 이들 주인공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도록 하는 일이었죠. 다양한 캐릭터들이 작품 속에 물처럼 녹아 든 것도 「실미도」의 성공 요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복합적인 캐릭터의 구성은 저로서도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康감독은 관객을 우선적으로 배려하기로도 유명하다.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먼저 고려하는 대상이 바로 관객이다. 그의 영화가 흥행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시나리오가 나오면 제일 먼저 일반인들에게 보여줍니다.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이죠. 그들이 만족해야만 다음 작업으로 넘어갑니다』
康감독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한다. 사람들 속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또 그들의 생각을 영화에 최대한 반영한다. 그만큼 관객과 가까이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중고등 학생들을 단 몇 초 안에 웃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유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들의 관심사와 생각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영원한 영화감독으로 남는 게 꿈
康祐碩 감독은 어릴 때부터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찾다가 없으면 어머니가 극장으로 들어가 깜깜한 객석을 향해 『우석아』 하고 부를 정도였다. 그만큼 영화에 미쳐 있었다. 영화감독의 존재를 안 시기는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관객들에게 영화가 전달되기까지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사람이 바로 감독이란 사실을 알고 그는 전율했다. 숫기가 없어 배우처럼 남 앞에 잘 나서지는 못하지만 쉬 드러나지 않는 감독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그 때부터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그가 대학을 중퇴하고 주저 없이 영화판 밑바닥으로 뛰어든 이유다.
그런 그가 영향을 받은 영화는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과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 및 「모던 타임즈」이다. 특히 찰리 채플린을 통해 그는 휴먼 코미디의 의미를 알게 됐고 지금까지 코미디 영화를 고수해 오고 있다.
康감독은 수년째 한국 영화산업을 움직이는 파워맨 가운데 1위 자리를 고수해 오고 있다. 감독 이외에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일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1995년 아무도 배급에 대해 거들떠 보지 않던 시절, 그는 시네마 서비스란 회사를 설립해 영화 배급에 손을 대 성공을 거뒀다. 제작과 투자도 병행해 다양한 한국 영화를 흥행 반열에 올려 놓기도 했다. 이밖에 100억원에 달하는 영화 펀드 조성, 파주 영화 세트장 아트 서비스 건립, 극장사업 진출 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쁘게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영원히 영화감독으로 남길 원한다. 2~3년간에 걸쳐 좋은 영화 1편씩 찍으면서 사는 게 그의 꿈이다.
『한국 영화의 약진세가 더 지속돼야 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한국 영화의 점유율이 40% 이상은 유지해야 자생력을 갖출 수 있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영화가 꾸준히 나와줘야 합니다. 또 해외시장으로의 수출도 꾸준히 증가해야겠죠. 저도 더욱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사실 실미도 제작을 마치면서 아내에게 약속을 한 게 있습니다. 올 한 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겠다구요. 하지만 지키지 못할 것 같네요』
「실미도」로 한국 영화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康祐碩 감독. 그런 만큼 그에게 지금까지 가장 가슴에 남는 작품 역시 「실미도」다.
『지금까지는 「투캅스」였는데 이제는 지우기로 했습니다. 꼭 10년 만에 「투캅스」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됐어요』
◆ 곽경택 감독
『나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는 영화는 관객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곽 경 택
·1966년生
·미국 뉴욕대학교 영화연출 전공
·1997년 「억수탕」으로 데뷔
·「친구」, 「챔피언」, 「똥개」 등 연출
한반도를 향한 복수의 칼날
1983년 5월, 105명을 태운 중국 민항기가 중국 국적의 무장 납치범들에 의해 피랍돼 강원도 춘천 某 기지에 불시착하게 된다. 당시 한국과 중국은 수교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 이러한 때에 중국의 민간인 송환 협상 대표단 33명이 한국에 오면서 한국과 중국 간의 공식 접촉이 최초로 이루어진다. 결국 피랍된 중국 민항기는 중국으로 되돌려 보내지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과 중국 간의 교류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영화 「친구」를 만든 곽경택(38) 감독의 차기작 「태풍」은 그 당시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국의 거대한 잠재력에 눈을 떠 한국이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활발한 물밑 외교작업을 벌이던 바로 그 때, 길수네 가족처럼 20명의 가족이 한밤중 몰래 압록강을 넘는다. 중국으로 탈출한 가족들은 오스트리아 영사관으로 진입해 한국으로 망명을 요청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은 외교 특사를 중국으로 급파하지만 이해 당사국 간의 미묘한 정치·외교 논리에 밀려 결국 다들 이 망명 가족의 존재를 쉬쉬하게 되고 한국의 외교 특사는 중국 당국에 이들 가족의 운명을 맡긴다. 중국은 결국 북한 송환을 결심하고 이들을 북송 버스에 강제로 탑승시킨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탈출을 다시 시도하는 가족들. 이 과정에서 모두 죽고 2명의 남매만 살아남는다. 중국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던 남매는 어느 날 서로 헤어지는 운명을 맞는다.
어느 덧 30代의 성인이 된 남동생 명신은 해적이 된다.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그는 한반도 전체를 저주하며 남북 모두를 끝장낼 기회를 노린다. 그러던 중 북한의 核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군사적 행동을 감행하던 미국과 일본의 배를 탈취하게 된다. 명신은 배 속에 들어 있던 무기를 가공할 러시아제 물건과 맞바꿔 태풍이 몰아치는 날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한편 명신의 계획을 알아 차린 남한의 국가정보원은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해군특수전부대(UDT) 장교인 세종을 차출한다. 세종의 아버지는 HID 출신이지만 몸이 망가져 약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신세. 그러나 「조국이 부르면 어디든 간다」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애국심의 중요성에 대해 들은 세종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명신의 테러를 막기 위해 몸을 바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은 어릴 적 헤어진 명신의 누나를 중국에서 찾아내 명신을 검거하기 위한 미끼로 활용하는데….
『비장미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친구」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긴 하지만 「친구」와는 전혀 다른 영화입니다. 드라마로서 갖추어야 할 탄탄한 구성을 충족시키면서도 이전에는 보여주지 못한 액션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끝없이 넓지만 선박을 생각했을 때 일종의 감옥이 될 수도 있는 바다의 극단적 양면성도 부각시킬 생각입니다』
곽감독은 「태풍」에서 무기로서 총이 갖는 의미를 기존 영화와 차별화해 보여줄 생각이다. 「친구」에서 칼이 가졌던 상징성처럼 말이다. 곽감독은 「친구」에서 칼을 무기로 사용하되 일본이나 홍콩의 칼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사무라이 영화에 등장하는 칼은 지나치게 잔인한 도구로 표현되고 있으며, 홍콩 영화에서의 칼은 너무 과장되게 부풀려 보여지고 있다는 게 곽감독의 견해. 따라서 「친구」에서는 기존에 보여주지 못한 칼의 이미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사람을 해하는 행위를 할 때 칼을 타고 손끝에 전달되는 느낌, 그리고 행위 때문에 느끼는 상대방의 고통 등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태풍에서는 총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하고 싶어요. 칼과는 달리 총을 맞으면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 자리에서 죽잖아요. 그런 차원에서 할리우드 액션 영화 등에서 사용된 총과는 다른 점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곽감독은 이번 작품이 「친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첫 작품이 되길 희망한다. 「친구」 이후에 제작한 「챔피언」과 「똥개」 를 만들면서 「친구」와 비슷해 고민했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걱정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친구」를 둘러싼 법정 공방도 지난해 12월4일 마무리됐기 때문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투리는 바로 고향
사실 영화 「친구」는 곽감독에게 있어 왕관이자 멍에였다. 830만 명의 관객동원 기록이 말해 주는 것처럼 그에게는 엄청난 명성을 안겨 주었지만 또한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장벽인 것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3년이 지난 지금 객관적으로, 그리고 마음 편하게 「친구」를 분석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거둘 것을 거두고 버릴 것은 버려 차기작 「태풍」의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의도다.
『「친구」를 볼 기회는 아직 많잖아요. TV에서도 가끔 해 줄 정도니까요. 시간이 지나 이제 남이 만든 영화처럼 보고 있으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재미있다는 거예요. 그만큼 스토리가 탄탄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데 이러한 스토리가 일조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곽감독은 「친구」의 흥행 성공 요인으로 탄탄한 스토리 이외에 완벽에 가까운 소품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적은 예산으로 성공하는 영화를 만들려면 세트보다는 소품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보고 그는 예전의 추억을 되살릴 소품들을 준비하는 데 만전을 기했다.
『「친구」를 본 한 여성 관객의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영화 초반 아이들이 바다에서 수영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이 달린 수영모자가 잠깐 보였어요. 그 수영모자를 보는 순간 잊고 있었던 옛날 기억이 거짓말처럼 되살아났다고 하더군요』
곽감독은 그 수영모자의 플라스틱 꽃을 직접 만들었다고 밝혔다. 아무리 시장을 뒤져도 없더라는 것. 일일이 손으로 꽃을 만들어 붙였다. 그러한 소품들을 통해 관객들은 눈으로는 영화를 보고 있지만 머리 속으로는 자기의 옛날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추하게 된다고 곽감독은 분석했다. 이것은 곧 전국을 휩쓴 「추억」, 「향수」 열풍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친구」의 또 하나의 흥행 코드는 역시 언어가 주는 독특한 뉘앙스다. 특히 지방 사투리는 공통적인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엄청난 효력을 발생했다. 「친구」에서 걸쭉한 부산 사투리는 곧바로 유행어로 大히트했다. 곽감독은 사투리를 『고향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투리가 주는 편안함은 관객들의 다양한 경험과 맞물려 개인적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에 이어 「챔피언」, 「똥개」 등 곽경택 영화에 사투리가 꼭 들어가는 이유다. 이번 「태풍」에서도 함경도 사투리가 들어간다.
곽경택 감독은 「스스로에 대한 설득」을 영화작업의 大원칙으로 삼고 있다. 자신이 먼저 설득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객들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나, 영화를 찍을 때, 편집 작업을 할 때 모두 이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그는 본다.
만능 이야기꾼 아버지가 자문役
곽감독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그의 아버지다. 올해 일흔셋인 아버지는 1·4 후퇴 때 북한에서 피란 내려온 실향민이다. 평안남도 진남포가 그의 고향이다. 월남한 아버지는 처음 만년필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꾸준히 공부, 마침내 의사의 길로 접어 든 강한 의지를 가진 분이다.
아버지는 만능 이야기꾼이었다. 밥상 머리에서 들려주는 고향 이야기는 구수함을 넘어 아련한 동경으로까지 이어질 정도였다. 곽감독이 지금도 아버지의 고향을 마치 자신의 기억처럼 더듬을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의 탁월한 입담 덕분이다. 그는 언젠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기초로 한 영화를 만들 계획이다.
『시나리오가 나오거나 수정될 때 꼭 아버지께 보여드립니다. 그 후 이것을 갖고 많은 얘기를 하죠. 아버지의 조언을 반영할 때가 많습니다』
영화 「챔피언」을 찍을 때 강원도 사투리가 평남 사투리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 고성군수 역을 아버지께 맡긴 적이 있었다. 자신의 역할을 끝내고 촬영장 한 구석에서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곽감독은 아버지의 얼굴에서 묘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한참 후 아버지와 함께 술을 한잔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술기운에 말씀을 하시더군요. 「경택아, 큰일 났다. 너 하는 일 보고 있으면 그 일을 하고 싶어 미치겠다. 이젠 나이가 들어 할 수도 없는데 이 일을 어떡하면 좋으냐」고요. 아버지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도 어린 시절 빈 집에 동네 아이들 모아놓고 연극연습을 한 후 어른들 앞에서 공연도 하고 그랬더라구요. 아버지의 몸속에도 영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발휘할 기회가 없었을 따름이죠』
그 때문일까. 곽감독 가족들 가운데는 영화인들이 많다. 그 자신을 포함, 여동생 부부가 영화계에 몸담고 있다. 여동생 남편은, 최민식·전도연 주연의 영화 「해피엔드」의 감독 정지우다.
자신만의 작업공간 갖는 게 소망
곽감독이 영화감독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을 때는 뉴욕大 영화과 3학년때이다. 다니던 의과대학을 과감히 때려치우고 미국으로 건너갈 때만 해도 영화감독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영상 쪽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영화학교 출신 교수를 만나 영화가 얼마가 강한 매체인가를 알고 나서부터 그는 영화감독의 길을 선택했다.
국내에 돌아와 발표한 첫 데뷔작은 「억수탕」. 대중 목욕탕을 통해 인간 군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신선한 시도였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이어 발표한 차인표, 김혜수 주연의 영화 「닥터K」 역시 쓴맛만 안겨 주었다.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소재를 보여주려 한 것이었죠. 당연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맞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실패의 소지를 안고 있었죠. 「억수탕」은 개봉 후 시간이 지나면서 평이 좋아졌지만 「닥터K」는 여전히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입니다』
아직 시나리오 작업을 할 자신만의 공간도 없는 곽경택 감독. 안방 화장대 옆에 책상을 놓고 틈틈이 시나리오 작업을 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작업공간을 갖는 게 곽감독의 올해 작은 소망이다.
◆ 姜帝圭 감독
『「쉬리」 시나리오는 2년에 걸쳐 만들었고 그 후에도 열두 번이나 수정했다』
姜 帝 圭
·1962년生
·중앙大 연극영화과 졸업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
·「쉬리」 등 연출
영화 신기록 제조기
姜帝圭(42) 감독은 전쟁 대작 「태극기 휘날리며」의 개봉을 앞두고 거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쉬리」 이후 5년 만에 메가폰을 잡아 잔뜩 긴장이 되는 데다 이미 한 차례 개봉이 연기되면서 그만큼 부담이 커진 탓도 있다. 온몸의 신경이 바늘을 촘촘히 세워놓은 듯 곧추 서 있다. 하지만 姜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에 내 인생을 걸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 영화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
사실 姜帝圭 감독 하면 어떤 일에든 철저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판에서 10년 이상의 긴 무명생활을 거치면서 터득한 생존 노하우가 바로 이 철저함이다. 덕분에 그는 「신기록 제조기」란 별명이 어울릴 정도로 충무로에서 다양한 기록들을 만들어 냈다.
영화 「쉬리」가 개봉된 1999년은 한국 영화사에 새로운 장을 연 해로 기록되고 있다. 「쉬리」는 이전 영화와 확연하게 비교될 정도로 모든 면에서 달랐다.
일단 물량 면에서 이전의 영화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거액인 31억원이 제작에 투입됐다. 1990년대 후반의 영화계 상황에서 볼 때 영화 한 편에 30억원 이상을 쏟아 붓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평균 제작비의 2~3배에 달하는 규모였기 때문이었다. 또 「쉬리」에는 총 엑스트라만 3000명이 동원됐다. 제작기간도 3년이나 소요됐다. 돈, 인력, 시간 등 모든 면에서 「쉬리」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영화였다.
마케팅이나 홍보 전략도 새로웠다. 외국의 흥행대작 영화에 사용됐던 극장 앞 스탠드 광고판이 우리 영화 사상 처음으로 등장했고, 홍보를 위해 철저한 非공개전략도 유지됐다. 호기심을 유발시켜 단계별로 영화의 붐을 조성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었다.
姜감독의 새로운 시도는 흥행 신화로 이어졌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할리우드 영화가 한국 영화시장을 독식하고 있었습니다. 「쉬리」 이전까지 그 같은 추세가 계속됐죠. 그만큼 미국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필하고 있었다는 측면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관객들은 천편일률적인 할리우드式 스토리와 상황전개에 실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마침 할리우드 영화에 근접하는 액션에다 한국인들의 정서에 맞는 상황과 스토리, 거기다 멜로까지 곁들여지면서 관객들은 「쉬리」에 열광하게 된 것이죠』
姜帝圭 감독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흥분되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고 한다.
철저하게 관객 우선주의로 제작됐다는 점도 「쉬리」 흥행의 중요한 요소다.
姜帝圭 감독은 시나리오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냈다. 1990년 김성홍 감독의 「그래 가끔은 하늘을 보자」를 시작으로 康祐碩 감독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년),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1994년) 등의 시나리오가 모두 姜감독 작품이다. 이후 「은행나무침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등 자신이 감독한 영화의 시나리오도 모두 그가 썼다. 덕분에 원하면 언제든 시나리오를 수정할 수 있었다.
『「쉬리」의 시나리오는 2년에 걸쳐 만들어졌고 그 이후에도 열두 번이나 수정됐습니다. 관객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때그때 고쳤죠』
영화를 찍을 때도 할리우드 영화의 입맛에 길들여 있는 관객들을 위해 현란한 액션과 긴박감 넘치는 폭파 장면 등 다양한 볼거리를 만들어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姜감독은 「쉬리」를 뛰어넘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대작 「태극기 휘날리며」의 제작비 148억원은 지금까지 제작된 한국 영화 사상 최고액이다. 2만5000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됐다. 이들에게 지급된 군복만도 1만9000여 벌. 이 밖에 2km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진지 구축과 140회의 촬영 횟수 등은 이 영화의 규모를 짐작하게 만든다.
전쟁광으로 변하는 진태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해 애쓰는 진태(장동건 扮)에겐 결혼을 앞둔 약혼녀 영신(이은주 扮)과 대학 진학을 앞둔 진석(원빈 扮)이 전부다. 그러던 어느 날, 6·25 전쟁이 터지고 두 형제는 피란열차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들은 강제 징집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진석과 같은 소대에 배치된 진태는 동생의 징집을 해제시키기 위해 대대장을 찾아가 모종의 거래를 시작하고 그 후 점차 전쟁광이 되어간다. 그런 형을 지켜보는 진석은 당황스럽기만 한데….
戰場(전장)의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姜감독은 처음부터 정면 승부를 펼쳤다.
『전투 장면은 어떤 전쟁 영화이든 비슷하다. 다른 것은 다만 사람과 건축물』이라고 주장한 姜감독은 1950년대 한국이 갖고 있던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기 위해 장소 헌팅을 하는 데만 거의 1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찍어 놓은 사진을 보면서 적합한 장소를 골라 내는 것도 일이었을 정도였다.
전투 장면은 현대식 건물이 보이지 않는 산에서 만들어졌다. 피란민 기차 장면은 전라남도 곡성에 있는 철도공원의 철길에서 촬영됐고 압록강 겨울전투 장면은 해발 1100m가 넘는 대관령에서 완성됐다. 경주 도투락 목장에서는 인민군 기습 전투가 벌어졌고 경남 합천 황매산에서는 두밀령 전투와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이루어졌다.
당시의 건축물을 재현해 내기 위해 합천군 수자원공사 부지 2만2000평에 평양 시가전을 위한 세트가 마련됐고 영화 초반 등장하는 종로 거리는 부천의 야인시대 세트장을 통해 완성됐다.
戰場의 비장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하늘을 가득 메운 砲煙(포연)은 타이어를 태운 연기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합천의 세트장은 태풍 「매미」의 습격을 받아 실제 전투가 벌어진 것처럼 초토화되는 시련을 겪은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쉬리」 이후 姜帝圭 감독은 전쟁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것은 아니었다. 막연한 바람이었다.
『2001년 8월, 한 조감독이 TV에서 6·25 특집으로 방영된 다큐멘터리 테이프를 들고 왔어요. 戰場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가 50년 만에 남편의 유해를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죠. 가슴 한편이 아려오더군요.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그 동안 본 어떤 영화보다 더 큰 울림을 줬습니다. 이거다 싶었죠. 다 제쳐두고 시나리오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태극기 휘날리며」입니다』
姜帝圭 감독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영화를 아주 좋아했다. 용돈이 생기면 극장으로 먼저 뛰어갈 정도였다. 그 후 아버지가 쓰던 카메라를 발견한 姜감독은 틈만 나면 카메라를 메고 사진을 찍으러 나섰다. 사진 속에서 영상의 매력을 발견한 그는 영화 쪽으로 진로를 결정하고 중앙大 연극영화과에 진학한다.
거기서 평생 반려자가 된 탤런트 박성미를 만난다. 아역 탤런트에다 성우까지 하면서 이미 널리 알려진 박성미가 동기로 입학한 것. 둘은 8년간의 긴 연애 끝에 결혼하기에 이른다.
姜감독은 졸업 후 바로 영화계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충무로는 경남 마산 출신의 영화감독 지망생에게 선뜻 자리를 내줄 만큼 결코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춥고 배고픈 시절이 이어졌다. 일년 내내 일해봤자 손에 들어오는 것은 고작 60여만원 남짓. 그나마 없을 때도 있었다. 밤샘 작업도 밥 먹듯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나리오 작업 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시간과 돈에 쫓겼음에도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누구보다 행복했다.
1986년, 영화배우 안성기의 소개로 말로만 듣던 유명 영화 제작자를 만났다.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들고 감독 데뷔 여부를 타진해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시나리오는 좋은데 흥행이 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데뷔를 포기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남자보다 배포 큰 아내 박성미
8년이 흐른 뒤 그동안 머릿속에 담아 두었던 「은행나무 침대」 얘기를 아내에게 꺼냈다.
『이번 시나리오도 다른 감독에게 주면 당신하고 안 살아』
아내의 반응이었다. 괜찮은가 보다 싶었다.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동네 커피숍, 강릉 경포대, 北京 칭화대 기숙사까지 두루 다니며 시나리오 수정 작업에 몰두했다.
1996년 2월, 서울 명보극장 앞 커피숍에서 「은행나무 침대」를 보기 위해 극장 앞에 장사진을 친 관객들을 보고 눈물이 핑 도는 감격을 맛보았다.
영화감독 姜帝圭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 박성미다. 솔직하고 때론 남자보다 배포가 크기로 유명한 박성미는 姜감독이 힘들어할 때마다 큰 도움을 줬다.
단적인 예 한 가지. 대학 때부터 꾸준히 작업을 해 온 덕분에 영화계에 진출해서도 시나리오 집필 실력만큼은 인정받았던 姜감독은 어느 날 한 방송사 측으로부터 미니시리즈를 써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거의 돈을 벌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거액의 고료를 앞세운 제안은 달콤하기 그지 없었다. 덥석 받아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하고 싶다는 자신의 생각을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아내의 대답은 단 한 마디, 「안 된다」는 거였다. 자신은 영화감독과 결혼했지 방송 작가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것. 한 번 시작하면 영원히 감독 일을 하지 못할 게 틀림없다는 말로 쐐기를 박았다. 더 이상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CF감독의 제의가 들어왔을 때도 아내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를 믿고 생계를 책임져 준 아내가 없었다면 아마 姜帝圭 감독은 방송작가나 CF감독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쉬리」 이후 5년 만에 영화감독으로 되돌아온 姜帝圭 감독. 그는 「태극기 휘날리며」 이외에 두 편의 시나리오를 추가로 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