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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
2025년 새해가 구렁이 담 넘듯 슬그머니 우리를 찾아왔다. 오늘 뜬 태양은 어제 본 그 해가 아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맞는 해돋이나, 의왕 청계산 위에 떠오르는 해는 같지만, 또 다르다. 일출(日出)이 언제나 감격스러운 이유다. 세상에 반복되는 것은 없으며, 하루하루가 늘 새롭다. 적어도 그런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마거릿 미첼).
날마다 맞이하는 해는 얼마나 반가운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임재가 동쪽에서 임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동쪽은 기도하는 방향이며, 그런 이해에 따라 고전적인 예배당은 동쪽을 향해 세워졌다. 해가 뜨는 모습으로 부활의 신비를 간접 체험하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의의 태양이 “서쪽을 동쪽으로 되돌리고, 죽음을 이기고 삶으로 이르렀다”고 고백하였다. 부활하신 날은 태양(日)의 날(일요일), 곧 주님의 날이 되었다.
우리 속담에 ‘아침에 복을 받는다’고 한다. 새벽기도를 강조하는 슬로건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뿌리 깊은 믿음이 있다. 고대인들에게 동틀 무렵,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우주 질서의 근원으로 비치었다. 쉼 없이 밤과 낮을 주관하는 태양의 무궁함은 경외감 그 자체였다. 따라서 고대 세계에서 태양은 최고의 신이었고, 숭배의 대상이었다. 바벨론의 역법(曆法)은 태양의 연간 운행궤도를 관찰함으로써 정하였다.
우리가 사용해온 전통 달력은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로 구성한 60간지에 기초한다. 하늘의 주기와 땅의 공간을 결합한 것이다. 6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기 때문에, 한 바퀴 순환하면 환갑(還甲) 혹은 회갑(回甲)이라고 하여, 만 60세에 크게 축하한다. 갑자(甲子)년으로 시작하여 계해(癸亥)년으로 마치는 순서 중 올해는 42번째 을사년(乙巳年)이다. 을(乙)은 청색을 상징하며, 사(巳)는 12가지 띠 중 여섯 번째인 뱀이다.
신년 벽두부터 ‘희망과 변화가 꿈틀대는 2025년 푸른 뱀의 해’가 등장한 배경이다. 사실 아무리 뱀을 친밀하게 표현해도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창세기에서 단정했듯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창 3:1)다는 뱀의 존재는 몹시 불편하다. 물론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는 말씀이 있기도 하다. 복음전도자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는 “사람은 눈물로 씻은 눈으로만 천국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젖은 눈이 비둘기라면, 뱀의 경우는 눈이 메마른 상태이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그의 평전에서 “이 좁은 세계(팔레스타인)는 돌멩이마다 뱀을 한 마리씩 숨기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비유에 따르면 아랍 사람과 이스라엘인이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이유를 팔레스타인의 돌멩이 수만큼 많은 뱀의 존재로 탓을 돌린다. 그 짐승에게는 이중성이 몸에 배었다. ‘구렁이가 담을 넘는다’는 우리 속담에도 그런 음흉한 술수를 내포하고 있다.
꼭 120년 전인 1905년도 을사년이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1월 17일 제국주의 침략 근성을 드러내어 대한제국으로부터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골자는 ‘한국은 자주적으로 외교업무를 담당할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의 보호를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을사년 ‘늑약’(勒約)이라고 부른다. 비합법적이고 강압적인 상태에서 맺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찬성한 대신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을 가리켜 을사오적이라고 부른다. 반대하여 순국한 의인은 충정공 민영환 등 14명이다.
을사년에서 온 관용어가 있다. 요즘처럼 겨울철 추위 탓도 있지만, 탄핵정국이란 심리적 불안정 상태에도 어울리는 말이다. ‘을씨년스럽다’는 1905년 ‘을사늑약’ 당시 비통한 분위기를 일컫는 말이다. 날씨나 마음이 쓸쓸하고 스산함을 뜻하는 이 말은 애초에 ‘을사년스럽다’였는데, 점점 ‘을씨년스럽다’로 바뀌었다.
영화 ‘하얼빈’에서 안중근과 그의 동지들은 을사년에 국권을 강탈한 이토 히로부미를 겨냥한다. 그들의 의분은 을사년의 울화와 동시에 희망을 담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로 압축된 드라마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어 오늘 우리 시대와도 통한다. 애국자와 매국노의 차이가 있다면 ‘내일의 태양’에 대한 믿음 여부(與否)이다. 올해 을사년은 광복 80년이다. 광복(光復)은 빛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믿음이 있다면 내일의 태양은 반드시 뜨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