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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보에서 긴 1박을 하고 렌트한 버스를 타고 아누라다푸라로 갑니다.
5시간 남짓 거리의 아누라다푸라는 기원전 377년부터 기원후 1017년까지 1,400년간 스리랑카 싱할라왕조의 수도였던 곳입니다.
싱할라왕조는 아누라다푸라에 이어 폴론나루와 여러 수도를 거쳐 캔디까지 2,000년간 왕조를 유지해 왔습니다.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들만큼 긴 단일 왕조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아누라다푸라로 가는 길에 점심식사를 위해 들른 식당입니다. 부페였는데 500루피랍니다. 우리 돈 4,000원 정도입니다.
그래도 현지식치곤 조금 비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몇몇 선재들은 현지식인 스리랑카식이 부답스럽고 조금 음식값도 비싼듯해서 식사를 하지 않았지만,
점심을 함께한 선재들은 제법 깔끔하고 맛도 있다는 평입니다. 제대로된 스리랑카식 식사를 처음하게 된 셈입니다.
몇몇 선재들이 또 감탄을 한 것이 있엇습니다. 즉석에서 갈아주는 파파야쥬스입니다..
200루피 우리돈 1,600원이니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가격과 휼륭한 맛에 대 만족이었다고합니다. ㅎㅎ
아누라다푸라의 숙소에 도착을 했습니다. 숙소는 도심과 유적지에도 조금 많이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호수라고하기에도 아주 큰 호수가 앞에 있고 민가들이 뛰엄 뛰엄있는 숲 근처에 있었습니다.
한적한면에서는 더말할나위없이 좋은 곳이지만, 개별적으로 시내로 나가거나 유적지를 들러보기에는 많이 떨어진 곳이라
걱정이 되었습니다. 짐을 푼 선재들이 숙소 주변을 둘러 보기위해 나왔습니다.
제 걱정과 염려와는 별개로 선재들의 눈에 보이는 모습들은 하나 하나가 신기한듯 합니다.
함께한 나현선재가 스리랑카여행 단체 카톡방에 올렸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가족들의 모습이 신기하고 보기 좋았던 모양입니다.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인데도 속도감있게 잘 찍었습니다.
은규선재는 숙소앞의 호수를 찍어 올렸습니다. 바다만큼이나 넓은 호수가 신기해서 였겠지요?
형식선재는 야생에서 사는 공작새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동물원에서나 봄직한 공작이 이렇게 야생에서 사는 모습을보니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상호선재는 호수가에 나갔다가 2m정도되는 검은뱀 한마리를 발견했답니다.
처음 발견했을 땐 무척이나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왜 안그랬겠습니까?
모두 신기한듯 우리가 살던 곳과 다른 모습 그리고 비슷한 모습에도 이국적인 풍경을 보면서
앞으로의 여행에 기대를 더해갔습니다.
제가 묵은 숙소 방 사진입니다.
오래된 건물의 숙소였지만 나름 깔끔하고 주변의 자연과 잘 어울어져 있는 리조트형 숙소였습니다.
이번에 가지고 간 다구茶具입니다. 시간날때마다 여행에서 찻자리를 갖곤 했는데,
이번 여행에서도 선재들과 함께 하려고 준비해 갔습니다.
찻잔받침을 빼고 모두 중국여행길에 마련한 다구입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여행내내 제 몫을 톡톡히했습니다.
숙소내에 있는 식당입니다. 아침은 숙박비에 포함이되어 있어 부담없이 먹을 수 있었지만,
점심 저녁때는 생각보다 가격이 부담스러웠습니다.
한끼 식사를 350~400루피 정도로 예상을 했는데, 숙소 식당에서는 부페의 경우 1,600루피, 단품인 경우도 800~1,000루피 정도하니
매우 부담스러운 가격이였기 때문입니다. 오던 길에 만난 부페식당의 500루피도 부담스러웠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가격에 가만있을 선재들이 아닙니다.
눈치 삐른 청년선재들과 청소년선재들이 숙소 근처에서 값싸고 양도 많은 푸라이드 라이스(볶음밥) 식당을찾아냈기 때문입니다.
가격도 참한 가격 150루피! 숙소의 식당과 비슷한 메뉴를 비교해도 5배 정도 차이가 납니다. 싼 가격이지만 맛도 훌륭했다고 합니다.
또 몇몇 선재는 작은 구멍가게도 찾아내었습니다. ㅎㅎ 대단들 하지요?
다음날 아침 부담없이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깨우지 않았는데도 늦잠 잘것같던 어린 선재들까지 아침식사가 시작되는 7시 반에 모든 선재들이 식당에모였습니다.
콜롬보의 숙소와 마찬가지로 부페식입니다. 크게 나누어 서양식과 스리랑카식이 함께 나왔습니다.
아직까지 스리랑카식 음식에 약간의 거부감이 있는 몇몇 선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골고루 맛탐색에 열중입니다.
아침식사후 오늘은 부득이하게 단체패키지여행에 준하는 여행으로 시작합니다.
숙소에서 둘러볼 유적지가 있는 곳이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대중교통도 없어 함께 온 버스로 이동을 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점심까지 먹고 각자 계획대로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일부 선재들은 자전거로 아누라다푸라를 여행 할 생각입니다.
또 어떤 선재는 1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의 미힌탈레 유적지를 다녀 오기로 했습니다.
미힌탈레는 인도의 마힌다 스님이 불교의 가르침을 스리랑카에 처음 전한 곳으로
스리랑카에서는 매우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는 곳입니다.
더운 날씨 때문에 힘든 선재들은 숙소로 버스와 함께 돌아가 숙소에서 쉬기도 했습니다.
처음 들른 곳은 스리랑카 최초로 지어진 불교 사원인 '이스수루무니아' 사원입니다.
포쿠나라고 불리는 인공 연못을 지나 계단을 거쳐 올라가면 작은 동굴법당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의 석굴암에 비해서도 한참 작지만 2,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스리랑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유서 깊은 사원입니다.
이 사원역시 인도의 마힌다스님에 의해 지어졌는데, 마힌다스님은 인도의 전륜성왕으로 불리는 아쇼카왕의 아들입니다.
아쇼카왕이 왕이 되기 전 지금의 인도 보팔지역 비딧사지방 태수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사냥길에 만난 여인 데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데비와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얻게 되지만, 부왕의 죽음으로 그 당시 수도였던 파탈라푸트라(지금의 파트나)로 돌아 가게 됩니다.
아쇼카는 권력의 야옥 때문에 장례에 참여했던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릅니다.
왕이 되는 복잡한 사건과 영토 확장으로 이어지면서 최초로 인도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룹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데비가 아닌 다른 여인을 왕비로 맞아 결혼도 하게되고 다른 자식들도 두게 됩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태수시절 사랑했던 데비와 아들과 딸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데비는 병을 얻어 죽게 되면서 증표가 되는 물건을 주며 아버지인 아쇼카왕을 찾아가게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인 아쇼카 왕을 만나고 아쇼카왕은 데비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묘를 찾아 흐느끼던 아쇼카왕은 무덤 위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큰 수투파(탑)를 조성하게 합니다.
이 탑이 유명한 산치의 대탑입니다. 인도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통일 이후 세상의 덧없음을 안 아쇼카는 불교에 귀의하고 성왕聖王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이런 영향으로 후에 데비의 아들과 딸도 불교에 귀의해 출가를 하게 되는데
그 아들이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스님입니다.
딸인 상기밋타 스님도 스리랑카 역사와 불교에서는 뺄 수 없는 인물이 되는데...
그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뒤에서 하게 될겁니다. ㅎㅎ
인도의 산치대탑
이스루무니아사원의 본당으로 쓰고 있는 동굴법당입니다.
오래된 본 법당은 규모가 작아 아마도 후대에 새롭게 조성된 법당인듯 합니다.
스리랑카의 법당에는 대부분 와불인 누워있는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한중일 삼국의 불교문화와도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단청보다도 더 화려하고 선명한 색깔의 칠 때문에 스리랑카만의 이국적인 색깔을 보입니다.
법당 위로 올라가는 바위 계단을 밟고 올라가다 보면 정상에 바위에 새겨진 문자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쳐진 철망 사이로
많은 매듭이 묶여져 있습니다.
하나같이 동전을 흰천으로 묶어 철망에 묶어 놓았습니다. 이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많은 분들은 이건 소원을 담아 묶어 놓은것이 아니냐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ㅎㅎ
그럼 뭘까요? ... ㅋㅋ
이 매듭은 고통, 번뇌의 매듭이라고 합니다. ㅎㅎ
이 매듭에 고통과 번뇌를 담아 매듭을 묶어 두는 것이지요?
물론 그런 인연으로 고통과 번뇌가 잘 극복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겠지요?
한 선재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탑돌이를 하고 있습니다.
탑을 인도에서는 수투파라고 부르지만, 스리랑카에서는 다고바라고 부릅니다. 현지인 발음으로는 따게바에 가까운듯합니다.
그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이해하는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럽에 가면 중심문화인 카톨릭과 개신교의 기독교문화를 이해하는것이 매우 중요하고,
중동 이슬람국가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문화의 이해가 중요하고
인도, 네팔과 같은 힌두교 국가에서는 힌두교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듯
스리랑카를 포함 동양 대부분의 나라에서 불교문화를 빼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이 곳 스리랑카에서 불교의 역사를 빼고 스리랑카의 역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높다랗게 올라가 세워진 저 다고바도 처음 세워진 역사는 당연히 기원전으로 올라가겠지요?
2,000년년의 스리랑카 역사를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수루무니아 사원을 나와 다음으로 들른곳은 스리랑카에서 가장 성스러운 나무가 있는 곳입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나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성스러운 나무라고하니 우리의 성황당나무 정도되는 나무인가 하고 생각하실겁니다.
하지만 이 나무의 나이 또한 2,000살 쯤 됩니다.
성스러운 나무는 다름 아닌 보리수나무입니다.
본래 이 나무는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가장 흔한 나무 중 하나입니다.
이 흔한 보리수 나무가 가장 성스러운 나무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보리수나무는 2,000년을 넘게 산 세상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보리수 나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그만한 이유로도 마땅히 숭배의 대상이 될만한 나무지만, 이 나무가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보리수나무로 불리는 이유는
부처님께서 인도 보리수나무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을때 성불의 과정을 지켜 본 나무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께달음을 지켜 본 본래의 보리수는 후대에 이교도들에 의해 불태워져서 사라졌습니다.
그럼 인도도 아닌 스리랑카에 있는 이 보리수나무는 어떻게 이 곳으로 오게 된걸까요? ㅎㅎ
위에서 설명하다 만 아쇼카 대왕의 딸이자 인도에 불교를 전한 마린다 스님의 여동생인 상기밋다 스님과 연관이 있습니다.
아쇼카 대왕이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할때 아들인 마힌다스님을 보내 불교를 전했고
이어 상기밋다 스님이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를 잘라 뿌리를 내리게해 성스러운 보리수 나무의 묘목을
이 곳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에 심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보리수는 후대에 이교도들에게 불에 타 죽게 되고 200여년전에 불에 탄 보리수나무 자리에
다시 이 곳의 보리수 나무를 삽목해 뿌리를 내리게 해서 다시 심은 나무라고 하니 이 곳의 보리수나무가
가장 오래된 가장 성스러운 보리수나무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시지요?
다시 정리하면 원 보리수는 없고 그 나무의 적자인 나무가 아누라다푸라로 2,000년전에 전해졌고
다시 200여년전에 원보리수나무가 자라던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 자리에
아누라다푸라의 보리수나무 가지에 뿌리를 내려 심어 다시 전하니 현재의 인도 보리수는 원나무의 손자뻘이 되는 셈입니다.
이러니 이들에게 있어서의 보리수나무는 스리랑카의 자랑이며, 가장 신성한 나무인것이 이해가 갑니다.
스리랑카를 포함한 우리가 소승불교라 부르는 남방불교인 상좌부 불교의 예불문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보리수에 예배하오니....
위대한 스승께서 결가부좌하시고 모든 장애를 극복하시어 모든 깨달음을 얻으신 보리수좌에 에배드리옵니다.
이렇듯 보리수 나무는 불교 국가인 스리랑카 뿐만 아니라 불자들에게는 가장 존경받는 나무인데,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실 때 지켜보았던 나무인 보리수는 말해 무엇할까요? ㅎㅎ
성스런 보리수 나무에 오르는 계단에도 이수루무니아에서 보았던 번뇌매듭이 보입니다.
고해의 바다를 헤엄치며 사는 중생들에게는 묶어 두어야할 고통과 번뇌가 많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보리수나무를 향해 기도를 합니다.
경전을 읽기도 하고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며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보리수 나무아래 마련된 불단과 꽃공양된 꽃들입니다.
성스런 보리수나무 아래쪽에 있는 큰법당의 부처님 상입니다.
보통 부처님상은 수인手印이라 불리는 부처님의 손모양으로 구분을 합니다.
북방불교인 대승불교권에서는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아촉불, 노사나불, 약사불...등 많은 부처님상을 조성하지만
스리랑카와 같은 상좌부불교인 남방불교에서는 오직 한분 석가모니부처님상 만을 조성합니다.
위 법당의 불상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보이는 불상의 모습입니다. 석굴암의 불상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의 불상을 '수하항마상'이라고하는데, 보리수나무아래애서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는 모습을 표현한 불상입니다.
보리수사원 앞에 있는 궁궐터입니다. 기원전 2세기 스리랑카의 최전성기 시대인 토투게무누왕에 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긴 돌기둥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그림과 설명이된 안내판을 보면 아마도 이 돌기둥 위로 건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열대 기후의 가옥 구조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듯 합니다.
열대의 일반 가옥들이 나무 기둥위에 집을 지는다면 이 궁궐은 다듬어진 돌기둥위애 지어졌다는 것이 다른듯합니다.
물론 규모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사진의 노란색 지붕의 건물은 고증을 거쳐 복원한 건물이라고 합니다.
바다 건너 인도에서 성스런 보리수 나무를 스리랑카에 전한 상기밋타 비구니 스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성스런 보리수사원을 지나 '르완웰라 세야 다고바'로 가던 길에 원숭이떼를 만났습니다.
자비심 많은 스리랑카인이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습니다.
르완웰라 세야 다고바입니다.
이 다고바는 도투게무누왕이 인도에서 쳐들어와 점령을하던 타밀세력을 무찌르고
빼았겼던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탈환한 것을 기념해 세웠다고 합니다.
기원전 2세기에 지어진 이 다고바는 조성 당시 높이 103m로 세계에서 가장 큰 탑이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탑은 그 절반인 55m정도이지만, 지금의 위상으로도 대단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합니다.
이렇게 거대한 다고바의 본래 높이가 2배가 더 큰 다고바였다니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 사원은 스리랑카 전역에서는 16곳의 성지 중 한곳으로, 아누라다푸라에서는 8곳의 성지 중 한 곳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많은 참배객들과 여행객들이 찾고 있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사원에 들어갈때 지켜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발을 벗어야한다는 것과 너무 짧은 상의나 무릎, 다리가 보이는 짧은 바지나 치마로는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불교사원 뿐만 아니라 성당, 교회, 힌두사원까지 똑같이 지켜야하는 예절입니다.
대부분의 스리랑카사람들은 남자의 경우 사롱이라는 치마형태의 옷을 두르며 여자의 경우는 긴 치마를 입기 때문에
출입에 큰 문제가 없지만 선재들의 경우는 더운 날씨 때문에 짧은 옷을 입은 선재들이 더러있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함께하신 선재님들이 가지고 있던 머풀러..등을 내 놓으셔서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맨발을 벗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보통 때는 문제가 될것이 없었지만,
바닥이 대부분 돌로 되어 있어 뜨거운 날씨탓에 어찌나 돌이 뜨겁게 달궈져 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현지인들이야 늘 일상의 일이니 뜨거울일도 걱정할 일도 아닌듯 해 보이는데
경험이 없는 선재들에게는 참기 힘들만큼 바닥이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르완 웰라 세야 다고바 옆으로 세워진 작은 다고바입니다.
흰다고바를 휘감겨있는 노란색 천은 스리랑카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다고바(탑)는 곧 부처님을 상징하기 때문에 부처님께 가사를 대신해 공양을 한것입니다.
스리랑카에서는 크고 작은 다고바에 오렌지색이나 노란색의 가사를 대신한 천이 둘러진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스리랑카인들은 흰색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우리민족이 흰색을 좋아해 백의민족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그 말은 스리랑카인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할듯 합니다.
특히나 사원에 올때는 꼭 흰색을 갖추어 입고 오는 것이 나름 인상적입니다.
이 법당의 부처님도 석가모니불입니다. 그런데 성스렁 보리수 사원에서 보던 불상과는 조금 다른의 수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뷸상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첫 법문을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불상입니다.
초전법륜상이라고도 하고 또는 설법상이라고 하는데, 모두 설법하시는 부처님을 표현한 상입니다.
초전법륜이란 처음 법을 설함을 말합니다. 인도 샤르나트(녹야원)에서 처음 설법하시던 부처님을 형상화 한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스리랑카로 들어 오면서 공항에서도 처음만난 불상의 모습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기억나시지요? ㅎㅎ
입과 마음으로는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점점 더 뜨거워 지는 바닥 때문에 빨리 내려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찌나 뜨겁던지.... 가만히 서있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르완웰라 세야 다고바 일정 이후에는 각자 정한 일정대로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힘겨워하는 몇몇 선재들과 함께 버스는 숙소로 돌아가고
몇몇 선재들이 자건거를 빌려 반나절 정도 아누라다푸라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자전거를 먼저 빌리고 자전거 여행을 함께 하는 것을 기념해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고 기념 사진을 한장 찍었습니다.
아이스크림 1개는 25루피 우리돈 200원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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