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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 김은주
초췌한 꼴의 여인이 서 있었는데 그의 목엔 다음과 같은 종이장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지금 내 주머니엔 돈 백원이 있다. 월급 2천원(한국 천원이 좀 못된다.)을 손에 쥘 때마다 천구백원은 장롱속에 넣어두고 백원은 반드시 시장에 들고 나온다. 돈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돈 백원도 없어 몇 달 전에 굶겨 죽인 아내와 딸에 대한 추억이 이 시장만큼 간절해지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 이런 돈이 있었다면 나는 절대로 그 귀한 생명들을 언 땅에 묻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에게는 이쁜 빗을, 딸애에게는 그렇게 졸라대던 밀가루 빵도 반드시 사주었을 것이다.
목숨이 질긴 탓에 홀로 살아남은 게 원수 같아서 언젠가는 양잿물을 사려고 나왔던 적도 있는 시장, 나는 특히 아이들 옷이나 장난감 파는 매점에 오래 서있는 버릇이 있군 한다. 그때마다 장사꾼들은 나를 보면 쌀이 있는가? 혹은 식용기름이 있으면 물건과 바꾸어주겠다고 서로 싸워가며 매달리군 한다.
한 것은 나의 시누런 군복을 보아서이다. 먹을 것이 없어 하루에도 수백명씩 굶어죽는 난리판이지만 당 간부들과 군대에만은 식량배급이 정상적으로 공급되었다. 그래서 군복 입은 사람들이 시장에 나오면 쌀을 팔려고 나오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군복을 벗고 여기로 왔을 걸 하는 후회 때문인지 나는 그들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왜서나면 나야말로 가난한 군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군복 입은 지 석 달도 채 안되는 신입이다. 가족을 다 잃고 난 후 중앙에서 간부로 일하는 먼 친척 되는 사람이 총참모부에 줄을 대어 배급이라도 타먹고 살라고 입혀준 군복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해양학 전공의 대학 졸업증을 가지고 있어서 빽만 있으면 바보도 출세하는 나라인지라 국방연구소에 중위로 입대할 수 있었다.
그런 나에게 쌀을 달라고 하다니, 나도 바로 몇 달 전에 처와 자식까지 굶겨 죽인 짐승 같은 놈이라고 그들에게 버럭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래선지 가족 생각이 더 간절해져서 오늘은 과거를 돌이켜 볼만한 것을 하나라도 사야지 견디기 어려웠다. 뭘 살까.
나는 갑자기 허둥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던 나에게 한 장사꾼이 들고 있는 빵이 보였다. 딸애가 그처럼 먹고 싶어 하던 밀가루 빵, 그 앞으로 다가간 나는 품속에서 돈을 꺼내며 얼마인가 성급하게 물어보았다.
장사꾼은 마침 백 원이라고 대답했다. 빵이 든 봉지를 만져보니 아직도 따뜻했다. 순간 그 온기가 심장으로까지 스며들며 나의 두 눈도 더워졌다. 이 백 원이 없어! 이 백 원이 없어! 하는 부르짖음이 온 몸을 북처럼 때렸다. 아니, 아이도 못 만져 보았던 따끈한 빵을 네가 지금 사서 어쩐단 말인가 하고 매질하는 것 같아 손에 쥔 백원이 금방 떨렸다.
나는 미안하단 말을 던지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피하면서 빵을 만졌던 손을 불이 나게 불끈 쥐였다. 그 힘이 그대로 어깨에도 미쳤는지 사람들이 내 몸에 부딪치며 곱지 않게 흘겨 보았다.
나는 겹겹이 막아서는 인파를 뚫으며 시장출구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 못가 도저히 전진할 수 없는 사람장벽에 막혀버렸다. 키 돋움을 해서 앞을 보니 가운데는 텅 비워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또 어떤 장사꾼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구경거리를 만든 모양이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조선에는 시장에 별의별 것이 다 있었다. 누구는 빈깡통으로 기름등잔을 만들어 팔았고 누구는 담배꽁초를 주어 힐터로 이불도 만든다. 풀죽도 먹기 힘든 나라여서 일명 송기떡이라고 하는 각종 나무껍질도 식용으로 많이 나온다.
세수물도 판다. 전기가 없어 도시에 물 공급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에 맹물도 세수물이라는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 어디가나 맹물세수는 5원, 비누세수는 십원, 이런식으로 세수하고 가세요. 소리치는 여인들이 허다하다.
나는 길이 열릴 때까지 참아 보려고 했지만 사람들의 땀 냄새와 비위생적인 시장 환경의 오물냄새 때문에 더 참을 수 없었다. 하여 군인스러운 거친 말투와 우직스런 몸동작으로 무작정 헤집고 앞으로 나갔다. 어찌나 빼곡히 몰려있었던지 내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다 흔들거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땅이 보이는 곳에 다달은 나는 이마의 땀을 씻을 새도 없이 눈앞의 광경에 굳어지고 말았다.
시장안의 사는 사람, 파는 사람 모두 몰려서게 하는 그 가운 곳에 초췌한 꼴의 여인이 서 있었는데 그의 목엔 다음과 같은 종이장이 걸려있었던 것이다.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그 여인 옆에는 정말 6살쯤 돼 보이는 처녀애가 죄진 것처럼 머리 숙이고 앉아 있었다.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자식을 버리거나 남에게 주는 실례들은 많이 듣고 보아 왔어도 이런 거짓말 같은 상황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그것도 빵 한 봉지 값에 팔다니, 모여선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너나없이 저주를 퍼부어댔다.
“저 년 완전히 미쳤구먼”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도 자식을 어떻게 팔어?”
“생긴 건 바람둥이처럼 매끈한데 속은 흉물스럽기 짝이 없군”
“요즘 별의별 놈들을 다 보겠구만”
어떤 사람이 애 엄마가 맞긴 맞아? 하자 한 노인이 처녀애에게 묻기까지 했다.
“애야, 저 여자 정말 네 엄마냐?”
그 목소리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아이의 얼굴을 주시했다. 아이가 선뜻 대답을 않자 엄마가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지 여러 사람들이 꼬집듯 다시 물었다.
“야, 네 엄마 맞어?”
“네 엄마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우리가 있으니깐 일없어, 어서 말해”
쭈그리고 앉아있던 아이가 마침내 비실비실 일어섰다. 삽시에 주위는 조용해졌다. 내 옆에서 자꾸 온 몸을 굵던 사람도 그 때만은 손을 까딱 안했다. 처녀애는 어른들의 시선보다 갑작스런 정숙이 더 옹색했던지 엄마 옆에 꼭 붙어서며 중얼거렸다.
“맞아요. 울 엄마예요”
울 엄마, 그렇게 말하는 딸애를 돈 백 원에 파는 에미라니. 사람들의 분노는 한 충 더해졌다.
“저런저런, 애가 불쌍하구나”
“야 쌍년아 아이를 팔겠으면 제대로 팔아라. 백 원이 뭐냐”
“개도 삼천 원인데 딸이 개 값도 안 되냐!”
“제 입도 풀칠하기 힘든 세상에 누가 돈 주고 아이를 갖다 기를 사람이 있겠다고 저 지랄이야”
“그러게나 말이지. 차라리 아이를 키워달라고 사정하면 동정이라도 받겠다”
“백 원으로 부자 되겠냐 미친년아!”
그 소리들은 고함에 가까웠지만 여인은 두 눈을 내리 깔고 미동도 없었다. 그게 더 미웠는지 사람들의 욕은 더 거세져 돌덩이처럼 날아들었다.
누군가 “야 할 말 있으면 어디 변명이라도 해봐. 저거 벙어리 아니야”라고 하자 이번엔 욕질보다도 벙어리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내 보기에도 그 여인은 정말 듣지도 말도 못하는 벙어리 같았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도 저 여자, 저 여자라는 말 대신 저 벙어리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서로 수군들 거렸다. 벙어리에게 아무리 욕을 해봤자 소용없겠다 싶었는지 누군가 이번엔 큰 소리로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냐고 물었다.
또다시 시장 안은 조용해졌다. 아버지라도 있었으면 하는 하나같은 기대감에 어찌 보면 모두들 긴장한 듯싶었다. 아이는 좀 전보다 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부진 없어요. 먹지 못해서....”
여기까지 맥없이 중얼거리던 아이가 갑자기 머리 들며 또릿또릿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우리 엄마 욕하지 마세요. 울 엄마 지금 암에 걸려서 죽으려고 해요.”
비명처럼 들리는 아이의 그 소리는 사람들의 심장을 찌르는 창 같았다. 그 창 앞에선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죽음보다 이제 곧 죽어야 할 삶을 볼 때가 더 침통한 법이다.
그 여인을 보니 이 세상 마지막 시간을 보는 것 같았다. 목소리라도 가지고 있다면 모든 사연을 쏟아 놓으며 통곡이라도 해보겠는데 그렇지도 못하는 것이 오죽하랴싶어 사람들은 더더욱 처량하게 벙어리 여인을 지켜보았다. 왜 이때껏 그를 한번도 동정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내 딸을 돈 백 원에 팝니다.” 그 글만 보고 왜 사람은 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보면 그 글로서 남들에게 더 동정과 배려를 받아보려는 모성의 최후 몸부림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비로소 여인과 처녀애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엄마가 죽는다고 야단치는 딸애의 목소리에도 덤덤히 서있기만 하는 벙어리 30대 여인, 누렇게 떠 있는 얼굴은 이미 삶을 포기한듯 아무런 표정이 없었고 뼈가 마디마디 들여다 보이는 손에는 피도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옷은 그동안의 고단한 생활을 설명해주듯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보였는데 바느질 솜씨가 깔끔했다.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손재간이 좋다는 말이 생각났다. 아이도 엄마를 닮아 미운 구석이 없었다. 갸름한 얼굴, 쌍까풀진 두 눈, 오똑한 코, 작은 입술, 이렇게 흩어보던 나는 아이의 입술 밑에 난 작은 김을 보고 흠칫했다. 내 딸애에게도 그 자리에 그런 작은 김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김이 있어야 복이 되고 보이는 곳에 있으면 화가 된다는 동네 어르신의 말 때문에 늘 가슴에 걸렸던 딸애의 흔적이었다. 그래서 처녀애의 불행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나는 딸애를 먼저 보냈는데 저 애는 아빠를 먼저 잃었구나 하는 처지의 공통심리가 작용하면서 언젠가 만났던 인연 같기도 했다. 어쩌자고 혹시 내가 저 애를 키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욕구까지 솟구쳤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머리까지 흔들며 그 모든 생각을 말끔히 털어 버리고 싶었다. 남을 동정하기엔 내 자신이 너무도 큰 불행이고 슬픔이고 죄인이었던 것이다. 남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들을 해보는 것인지 한마디씩 동정하기 시작했다.
“저 여자 죽으면 애는 정말 어찌 사노”
“엄마도 살고 애도 살면 얼마나 좋을까”
“친척 중에 애 기를 사람이 없을까?”
“에구 저거 불쌍해서 어쩌노”
그들 중 장사꾼으로 보이는 사람 하나가 모녀 앞으로 다가갔다. 장사꾼은 5백원을 꺼내 여인의 손에 쥐여주고 대신 목에 걸린 종이장을 벗겨내며 말했다.
“아주머니, 요즘 누구나 먹고 살기 힘든데 남의 아이를 돈 주고 데려다 키우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이 돈 가지고 가시우”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공감하는 소리들이 연발했다.
“맞아요. 그 사람 말 들어요.”
“어서 그렇게 해요. 여기 나와 있어야 병이나 더 심해져요. 엄마가 살아야 아이도 살지요”
“날도 찬데 아이 데리고 어서 가요.”
나는 그 말들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여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소리들을 못 들어서인지 아니면 듣고 하는 행동인지 벙어리 여인은 장사꾼의 손에 돈을 돌려주고 글을 다시 목에 걸었다.
5백원보다 애를 부양해주는 게 더 고맙겠다는 마지막 사정 같기도 하고 자기는 그 돈에 살아날 목숨이 아니라는 의미 같기도 했다.
이때 갑자기 비켜! 비켜!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사람들을 마구 헤치며 나타나는 사람이 있었다. 안전원이었다. 누구의 신고를 받고 왔는지 목적하고 온 듯 여인에게로 곧장 다가와 다짜고짜로 어깨를 툭 툭 쳤다.
“이 년이 미치지 않았어! 여기가 사람을 노예처럼 사고파는 썩어빠진 자본주인줄 알어? 당장 없어지지 못해!”
그러면서 여인의 목에서 종이장까지 획 잡아채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 한 조각 한 조각이 땅 바닥에 뿌려질 때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동정이 증오로 바뀌는 순간들이 쌓여지다 못해 누군가 폭발했다.
“여 이 사람아. 그 여인 중병 걸린 사람인데 사정이나 좀 들어보고 그 야단을 치지”
그러자 여기저기서도 비난하는 소리들이 터졌다. 그들을 모조리 잡아갈 듯한 기세로 안전원이 사방을 일일이 둘러보자 그 면상을 쥐여 박기라도 하듯 이번엔 누군가 야유조로 웨쳐댔다.
“ 저 새끼 생고기는 냄새나서 아마 돈 백원에 시장 내놔도 사가는 사람이 없을거다”
순간 시장안은 와! 하는 웃음판으로 변했다. 분노로 얼굴이 험하게 이그러진 안전원은 그 자리에 더는 서있을 수 없었던지 벙어리 여인에게 달려들어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가자. 인간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에서 이런 짓은 분명히 체제증상 모독죄야. 어디 네 새끼까지 정치범 수용소에 가 봐라.”
팔소매까지 걷어 올리고 안전원이 여인을 무섭게 잡아끌자 아이가 울음 절반 애걸 절반으로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우리 엄마 아파서 그래요. 제발 놔주세요. 엄마 가자. 엄마 죽을 때 나도 같이 죽으면 되잖어. 나 혼자 안살거야”
엄마랑 같이 죽겠다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아내와 딸의 죽음을 보는 착각과 함께 온 몸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나만의 불행이 아니라 이 나라 인민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불행, 이런 불행의 나라를 금방 저 놈은 인간중심의 사회라고 했다.
노예제도 때도 사람은 사람 값으로 당당히 팔렸다. 그러나 백원에도 팔릴 수 없는 노예보다 못한 목숨들이여서 저 놈은 저렇게 지금 마구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모녀에 대한 동정도 동정이지만 그 놈의 행위가 얄밉기도 하여 벙어리 여인에게 다가가며 큰 소리쳤다
“이보시오. 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겠소. 나에게 돈 백원이 있소”
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뭐야!?” 하면서 나에게 머리를 돌리던 안전원은 나의 군복을 보고 뚝 굳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인의 손에 돈을 쥐어주며 나는 간절히 말했다.
“이 백원으로 당신 딸을 산다기보다 당신 모성애를 사는 것이니 그렇게 아십시오”
그리고 그 말을 시각적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딸애의 여린 손목을 확신있게 잡았다. 내가 당장 데려 가려는 줄 알았는지 여인이 반사적으로 내 팔을 성큼 잡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갑자기 사람들을 밀어내며 어디론가 급히 갈려고 하였다. 처음 그의 행동을 이해 못하던 사람들이 이내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나도 벙어리 여인의 돌발적인 행동이 몹시 의문스러웠다. 내가 마음을 다시 고쳐 먹을까봐 아이를 버리고 서둘러 달아나는 것인가. 정말 그렇다면 그 여인은 너무 어리석다.
혹시 어리석어서 제 아이를 정말로 백원에 팔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다면 그 돈으로 양잿물이라도 사서 자살할려는가. 나는 같은 혈육의 생각을 읽어보기 위해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아이도 당황한 듯 싶었다. 그러자 내가 너무도 큰 결심을 쉽게 한게 아닌가 싶어 조금 긴장이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갑자기 술렁거리며 혀 차는 소리까지 들렸다. 머리를 들던 나도 아연해졌다. 펑 펑 울면서 다시 나타난 여인, 숨차게 달려 오기 바쁘게 아이앞에 무너져 앉으며 뻗치는 저 손의 것이 과연 무엇인가.
나는 흐려지는 눈을 껌뻑이며 다시 보고 또 보았다. 그것은 바로 아이를 판 백원으로 사 온 밀가루 빵 한봉지였다. 나와 모든 사람들을 더 울리게 한 것은 벙어리라고 생각했던 그 여인이 빵을 아이의 입으로 가져가며 왕왕 통곡할 때였다.
“아이고, 내 팔자야. 백원도 없어 딸을 팔아 빵을 사는 내 신세야! 아이고, 아이고”
2006년 7월 17일 김은주
자료출처 : 자유북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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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의 탈북시인 장진성씨<수정내용 있음>
최보식 선임기자 congchi@chosun.com
"시집(詩集) 가슴에 품고 두만강 넘어… 노무현 정부에선 출판 못하게 해"
"CD 통해 남한드라마 봐 막상 와서 확인해 보니 나오는 집은 모두 회장님 집이었다"
"원산 갈마초대소에서 김정일 접견할 때 손 닦으라 알코올솜 봉투 줘"
'그는 초췌했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을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백원으로/ 밀가루빵 사들고 허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세간의 화제가 됐던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의 작가 장진성은 언론에 얼굴이 공개된 적이 없다. '탈북 시인'으로만 되어 있다. 구체적인 이력, 북한 내 활동, 탈북 동기와 과정 등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가 몇 살쯤 됐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그는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라는 시집을 또 냈다.
'사실'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그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 앞에 앉은 그는 예상보다 젊은 30대 후반이었다. 작고 포동포동한 체구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다가, 신분 노출의 부담을 떠올리며 "그건 안 밝힐 수 없는가" 요청하곤 했다.
▲ 최근‘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라는 시집을 낸 장진성씨는“권력이 아무리 절대적이 라도 인간의 마음까지는 지배할 수 없다”고 했다./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당신은 어떻게 해서 북한에서 시인이 됐는가?
"평양음악대학을 다니던 1992년 김정일을 찬양한 시 50편을 묶은 '복받은 세대의 노래'라는 시집을 올렸다.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문학과에서 해마다 한명씩 문학신인을 뽑는 제도에 내가 뽑혔다. 김정일이 그 시집을 봤다. 전학생과 교직원 앞에서 감사장을 받고 시를 낭송하게 됐다. 그 시가 김정일 생일 50돌 기념으로 노동신문에 실렸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에 나오는 장면은 당신이 직접 본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들은 것인가?
"1999년 어느 날 오후 5시쯤이다. 평양의 동대원구역 시장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공개 처형이 있는 줄 알았다. 공개처형은 주민 '교양'이 목적이라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에서 많이 이뤄진다. 그런데 병든 엄마가 딸을 파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안전원(경찰)이 와서 '사람을 팔고 사느냐, 정치범 감이다'고 흥분했다. 한 군인이 차마 더 볼 수가 없는 듯 백원을 주고 딸을 데려갔다. 돈을 받더니 엄마는 어딘가로 뛰어갔다. 가버리는 줄 알았는데… 그 돈으로 빵을 사 갖고 와 우는 딸에게 건네줬다. 그때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평양은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고 가본 사람들은 말하는데,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뒷골목을 가본 적은 없을 것이다. 시내에 옷 차려입고 나온 사람들은 연출된 것이다. 당(黨)에서 가두인민반 주부와 남자들을 동원한다. '고난의 행군'시기(1994~1999년)에는 '꽃제비'들이 아침밥을 짓는 시간이면 문을 두들겼다. 나는 일일 배급을 받았고 그래도 여유가 있었다. 중국 단동의 무역지사에 전화해 과일, 장난감 등 아이 생일상을 배달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동냥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한번 주면 더 몰려오기 때문이다. 그때 내 자신이 부끄럽다."
그는 음대 졸업 후 조선중앙텔레비전총국에 내보내는 시를 검열·편집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면서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박사원(대학원)을 다녔다. 1998년부터는 '통일전선부 101연락소'에서 일했다. 이 때문에 탈북한 뒤 '안가(安家)'에서 6개월 동안 조사받았다.
"남한 민중작가의 명의로 '반독재, 반미, 연방제 찬양' 내용의 책을 만들어 남한에 침투시키는 작업을 내가 했다. '돌아보는 얼굴', '낮과 밤' 같은 남한에서 소위 말하는 '불온서적'이라는 것들이 우리 작품이다. '통전부 26연락소'는 '구국의 소리방송'을 통해 운동권 가요를 침투시켰다. 내가 나오기 직전 '인터넷침투 연락소'로 변경됐고, 남한 주민등록증 30만개를 확보해 '댓글심리전'을 펼치고 있다. 우리는 대남심리전이 주 임무이지만, 가끔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대북심리전도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대북심리전을 말하나?
"김정일의 '선군(先軍)정치'가 남한도 지켜준다는 심리전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래서 1999년 5월 22일 노동신문에 '영장(영용한 지도자)의 총대 위에 봄이 있다'라는 장문의 서사시를 썼다. '김경민'이라는 남한의 민중 시인 명의였다. 남한의 시인이 북한 체제를 찬양해 쓴 것처럼 말이다.
'남한에도 총이 있고 북한에도 총이 있다…/그이께서 쏘신 탄도를 따라 역사가 흘러왔고/목표가 명중되는 곳에 평화의 집이 있어라 정의의 집이 있어라….'
이 시가 노동신문에 나가니 '남한 사람이 쓴 글은 다르다'는 반응이 나왔다."
―북한에서는 시인이 '귀족작가'로 불린다고 당신이 말한 적 있다.
"소설은 많은 종이가 필요해 발간이 어렵다. 하지만 시는 노동신문에 실릴 수 있다. 선전선동 도구로써는 훨씬 낫다. 노동신문에 소개되는 시들은 김정일의 찬사나 사인을 받아서 게재된다. 그래서 '귀족시인'이라고 한다. 나는 '영장의 총대 위에 봄이 있다'는 시를 쓴 뒤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 돈 3000원 영수증을 받은 적 있다. 중앙당 재정경리부에서 운영하는 상점에 가서 상품과 바꿀 수 있었다."
―그렇게 인정받았던 당신이 탈북한 이유가 뭔가?
"통일전선부에는 남한의 신문과 시사잡지들이 있다. 통전부 구호가 '현지화'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조선일보만 30년 본 사람도 있다. 그에게 물어보면 '어느 기자는 몇 년 생이고 어떤 칼럼을 썼다'고 금방 나온다. 여기에 있는 남한 잡지를 친구들에게 몰래 보여줬다. 또 사석에서 '이게 뭐냐, 한민족에서 반(半)민족은 후진국이고 반민족은 선진국이다' 하는 식의 발언이 문제가 됐다. 곧 체포될 것이라고 누군가 귀띔해줬다. 하지만 나는 '접견자'로 분류돼, 중범죄를 범해도 바로 잡아가지 못한다. 김정일로부터 체포 사인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달아날 시간이 있었다."
▲ 탈북하면서 품고 온 시작(詩作)노트. 중국산 공책이다. ―접견자란 무슨 뜻인가?
"김정일을 접견했던 인물을 말한다. 2002년 노동신문에 '태양의 미소를 노래하노라'는 시를 실었다. 북에서는 김정일이 웃는 것을 '태양의 미소'라고 한다. 다른 시인이라면 '찬란한' 수식어를 썼겠지만, 나는 '미소 뒤로 돌아가보니/우리 수령님 고향집부터 눈물이 돌아/ 자신을 위해 웃을 줄 몰랐고/ 인민을 위해 그 웃음을 다 주었다'는 식으로 썼다. 그게 김정일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그래서 원산의 갈마초대소에 불려가 김정일을 접견하게 됐다."
―접견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
"접견자는 나 말고 두명이 더 있었다. 부동자세로 서 있는데, 초대소 호위관들이 손 닦으라고 알코올솜 봉투를 줬다. 김정일과 악수를 위해서다. 김정일이 앉을 자리에는 소독 분사를 했다. 김정일은 고영희(아들 김정철과 김정운의 모친·2004년 사망)를 대동했다. 고영희는 몹시 불편해 보였다. 김정일은 키높이 구두를 벗고 좌석 위에 양반다리를 해 앉았다. '조선의 어머니' 노래가 울리자, 기분을 전환해주려는지 부끄러워하는 고영희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크게 웃기도 했다."
―김정일을 접견한 신분인데 남한 잡지를 반출한 걸로 굳이 탈북까지 생각했나?
"접견자가 정치적 죄를 범할 때는 더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 하늘이 노랬다. 자살하려고 대동강에 나갔다가, 다시 주변과 상의하니 '앉아서 죽지 말고 뛰다가 죽어라'고 했다. 그때 '왕재산경음악단(김정일의 기쁨조)'에서 일하던 친구 K도 '나도 가겠다'고 했다."
―곡절 없이 친구가 왜 따라나섰나?
"그 체제가 너무 싫기 때문이다. 우리끼리 농(弄)으로 '인생에서 30대가 절정인데 우리는 지금 뭘 하나'라며 분노를 터뜨린다. 특히 당간부 자녀들 모임에서 그런 불만이 높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된 것은 남한의 라디오를 몰래 듣는 것이다. 또 하나는 김정일을 욕하면서 술 마시는 것이다. 단둘이 있으면 김정일을 욕하는 게 사교전략이다."
―고발과 감시체제가 그걸 용인하나?
"대학 다닐 때 주체철학 강의 시간에 선생이 '인민대중의 발전 형태를 말해보시오?'라고 물었다. '마르크스 인식론을 보면 나선형으로 발전한다'는 내 답변에, '너는 주체철학도 안 봐. 승승장구한다고 되어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사회주의 동구권이 붕괴된 것도 발전으로 봐야 됩니까?'라고 비꼬아 말했다. 배급체제가 무너지면서 주민 통제 능력을 잃었다. 남한에 1만6000명의 탈북자가 있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북한 국경을 탈출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나?
"국경여행증으로 함경북도 무산까지 왔다. 그날 밤 두만강을 뛰려고 강기슭을 걷다가, 경비대에 붙잡혔다. '당에서 근무하던 사람에게 어디 총부리를 들이대나. 간부사업 하러 왔다가 길이 헷갈렸는데 알아보라'고 큰소리쳤다. 웃기는 게, 평양까지 전화가 잘 안 됐던 모양이다. 다음 날 풀려난 뒤 밤까지 안 기다리고 대낮에 두만강을 죽으라고 뛰어넘어왔다. 강폭이 좁고 얼음이 얼었을 때다. 다른 경비초소에서 우릴 봤다. 하지만 강 중간을 건너면 중국 국경이라 총을 못 쏜다. 북한 지옥을 벗어나는 게 그렇게 가깝고 쉬운 줄 몰랐다."
그는 중국 국경의 한 민가에 들어가, '연길까지만 보내달라'며 7백달러를 내밀었다. 연길까지 와서 찜질방에 숨었다. 거기서 한국 신문을 보고 신문사를 통해 국정원과 연결됐다.
―탈북때 동행한 친구 K는 어떻게 됐나?
"연길에서 헤어진 그는 현실적 한계에 부딪혀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 '체제 선전'을 한다고 들었다. 북한에서는 내가 살인을 하고 도망간 현상수배자로 되어있다."
장진성씨는 탈출할 당시 시작 노트 2권을 품고 왔다고 한다.
"김정일 찬양시를 쓰면서 몰래 내 양심으로 썼던 것들이다. 북한 작가들이 정치범 수용소로 가는 것은 이런 작품들이 들통났을 때다. 고발한다고 갖고 나왔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에 책을 못 내게 했다. 누군가가 정권 바뀔 때까지 기다리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작년에 출판할 수 있었다."
―김정일의 후계구도가 어떻게 될지 세계적 관심사다. 김정일의 세 아들 중 누구를 본 적 있나?
"1997년 당시에 북한 시장의 쌀 가격을 정하는 일명 '큰손'이라는 북한 특권층 자녀들과 돈 많은 귀국동포들의 모임이 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평양 '보통강호텔'에 모여 시장상황을 보면서 쌀을 비롯한 생필품들의 수입시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인맥으로 나는 그 자리에 참석했다.
하루는 김정남이 나와 '장군님께서 내게 우리 경제를 회복해 보라는 특권을 주었다. 지금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니 중국식 개혁개방을 도입해 보려고 한다. 광명성총회사를 만들려고 하는데 당신들이 계열사 역할을 해다오. 이게 잘 되면 인민들에게 쌀 정도는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다'며 진지하게 설명했다. 실제로 한 달 뒤부터 평양 대동강구역에 위치한 외화백화점인 '대성백화점' 옆에 '광명성총회사' 간판을 건 건물이 지어졌다. 하지만 얼마 뒤 그 건물은 지금의 '삼천리총회사'로 변경됐다. 김정남의 개혁개방 발언이 김정일에게 보고되어 경제권을 박탈당했다는 말이 돌았다. "
―한국으로 들어올 때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중국을 통해 남한 드라마 CD가 많이 들어와 있다. '이브의 모든 것' '가을동화' '모래시계'를 북한에서 봤다. 북한 주민들 중 한 번이라도 남한 드라마를 안 본 사람이 드물 것이다. 남한을 알게 된 것이 이런 드라마를 통해서다. 막상 와보니 드라마에 나오는 집은 다 회장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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