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령이 가난한 자(마 5:1-12)
할렐루야! 2024년, 새해 첫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새해가 되었기에, 뭔가 변한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난 주일이나 이번 주일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새해가 되었기에,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졌을 것입니다. 소망, 바램, 기대하는 것들이 모두 다 이루어지는 2024년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새해에는 소망하는 모든 것들이 주님 안에서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버린 사람들을 깨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구석구석, 온 수리아에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이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사람, 귀신 들린 사람, 간질하는 사람,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머무는 곳마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수님의 병 고침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머물러 있는 곳으로 나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무리들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가르치셨기에,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중에서도,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대한 천국의 말씀들입니다. 이 산상수훈을 가리켜, 어떤 사람은 “천국의 대헌장”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신구약 전체 메시지의 요약”, 또는 “천국 시민들의 거룩한 사랑의 예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고,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그 산상수훈 가운데, 오늘부터 특별히,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팔복에 대하여, 하나 하나, 한 주일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팔복의 첫 시간이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앉아서 가르치셨다”고 하는 것은 길을 걸으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선포하거나, 가르칠 때에는, 언제나 앉아서 했다고 합니다. 회당에서 가르치고, 설교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은 서서 설교를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앉아서 가르치셨습니다.
“앉아서 가르치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즉흥적으로, 아무런 계획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천국의 귀한 진리들을,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자세하게 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들, 예를 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씀들은 참 듣기 좋은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말씀대로,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살아보려고 한다면, 얼마나 실천하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금방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에 기록된 말씀을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대로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 듣고 행하라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아니되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삶이 아니라, 뭔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은 달라야 합니다.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따라 올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변화를 무조건 맹신하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무엇인가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팔복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씀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귀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한평생 붙잡고 따라가야 할 은혜와 축복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누가복음 6: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표현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어떤 복입니까? “천국”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누구나 알다시피, “천국”, “하나님의 나라”, “하늘 나라”는 같은 말입니다.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하게 보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천국의 복을 받습니다.”
여기서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물질적인 “가난”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천국의 복을 받는다고 한다면, 부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어서는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요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부요를 주시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적인 가난으로 어려움 당하며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6: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가리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까?
팔복에서 말하는 “가난”은 절대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텅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어야 합니다.
“가난”을 그 상태 그대로, 계속 유지하는 것, 별로 유익하지 않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써야 합니다. “가난”을 벗어나, 부자가 되기 위하여, 밤낮으로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 가지고는 가난으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천석꾼, 만석꾼이 되어, 남 부럽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꿈꾸기도 해야겠지만, 당장 허기진 배에 먹을 것을 넣기 위해서라도,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 가난을 벗어날 것인가를 생각하고, 벗어나기 위하여, 몸부림을 쳐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3:2절을 보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 그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단 한번도 제 발로 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미문’이라는 성전 앞에서, 지금껏 구걸하면서 살아왔는데, 아침에는 사람들이 그를 그곳에 데려다주고, 저녁이면, 사람들이 그를 집으로 데려다주어야만 했습니다.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평상시와 똑같이 구걸하던 어느 날, 그는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그들에게 구걸했습니다. 그때 구걸하는 그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는 놀이 삼아 외치거나, 여유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성전 앞에 앉아, 베드로와 요한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고 사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세계적인 추리작가인 “코넌 도일”이 쓴 명탐정 셜록 홈즈 시리즈 가운데 “입술이 비뚤어진 사나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거지가 된 기자 이야기입니다. 어느 기자가 거지의 삶을 취재하게 되었습니다. 거지의 삶을 취재하면서, 그 실상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거지가 자기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자 생활을 때려치우고 거지 행세를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올 때에는 말끔한 정장을 입고 나와 가지고는, 시장 허름한 여관에서 거지의 옷으로 갈아입고, 하루 종일, 거지 행세를 하며 돈을 벌다가, 저녁이 되면, 말끔한 정장으로 갈아 입고는 집으로 돌아가, 가정생활을 해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오후, 집에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다가, 열려진 창문으로 시장에 나온 자기 부인과 눈이 마주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는 단편입니다.
거지가 된 기자, 원래 기자이다 보니까, 능수능란한 말 솜씨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돈을 뜯어내는데, 그에게는 “가난”이라고는 전혀 상관없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가난을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는 그의 외침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는 거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 하나하나가 간절했습니다. 그에게, 그것은 어쩌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거지 행세를 하는 기자의 외침은 그런 간절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의 가난은 거지 행세를 하는 기자의 가난이 아닙니다. 성전 문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외치는 사람의 가난일 것입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심정을 가진 사람, 바로 그가 처해 있는 그 가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131절을 보면,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시편 기자는 말했습니다.
시편 42:1-2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라고 말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기에, 반드시 채워져야만 하기에,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간절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으로나 채워져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큰 통이라고 할지라도, 사용할 수 없는 쓰레기로 채워진다면, 가득 채워진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르자면, 그는 당연히 행복했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귀한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아가 오실 다윗 왕의 후손으로,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고귀한 혈통을 지녔습니다. 그의 궁전은 이 땅에 세워진 궁전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궁전은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의 부가 얼마나 엄청나고, 그의 보물이 얼마나 많았던지, 구약은 그의 은이 길가의 돌멩이처럼 흔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멋진 음식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수천 필의 말이 가득한 멋진 마구간이 그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궁전, 종, 포도원, 낚시터, 정원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으며,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솔로몬은 한없이 행복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고 말했습니다.
헛된 것으로 가득 채워진다 한들,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빈 자리없이, 물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한들, 그것들이 쓰레기라고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가난을 누가 채워줄 수 있단 말입니까? 무엇으로 채워야 하겠습니까?
세상은 우리의 가진 것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일반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업체들을 찾아갑니다.
100만원을 빌리면, 일주일 후에, 얼마를 갚아야 할까요? 얼마 전, 신문에 보니, 대부업체에서 100만원을 빌리고자 하면, 선이자 포함하여, 150만원을 빌리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선이자 50만원을 제하고, 100만원을 받고, 일주일 후에, 빌린 150만원을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자가 얼마입니까? 계산이 안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 그 없는 것마저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가난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을 빼앗고, 우리의 가난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빼앗길 뿐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쉼을 얻거나, 채움을 받거나,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텅빈 마음을 채워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달래주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참된 행복을 찾아, 그것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가난의 상태에 머물려서는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가난”이라고 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라고 하는,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뭔가를 가지고자 하는 마음, 뭔가를 얻고자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텅빈 마음이 아니라, 그 텅빈 마음에 예수님만을 모시고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다고 아무 것이나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빈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8:5-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했습니다.
텅빈 우리의 마음, 육신의 생각보다는 영의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갈라디아서 6: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단지 영의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거두기 위하여, 텅빈 우리의 마음 밭에, 성령을 위하여, 말씀과 기도를 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언 8:17절을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성전 문앞에 앉아 있는 거지가 하루 종일, 앉아만 있다고 해서, 저절로 먹을 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외쳐야 합니다.
“도와주세요”, “당신이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굶어 죽습니다. 나를 살려주세요. 나를 도와주세요.”
그 거지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절박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34:8-10절을 보면, 다윗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가난, 그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삶이 아니라,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그 부족함이 채워지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모시고 살아가고자 하오니,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새해를 허락하여 주셨사오니,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복된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새 날과 새 생명과 새로운 은총을 베풀어 주시니, 오직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