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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 조공 묘갈명 서문 - 정재 류치명
치명(致明)은 젊은 시절 손재 남공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그 시절 뜻을 함께하던 인물 중에 구당 조공이 있었다. 때때로 얼굴을 뵙고 교류할 수 있었는데, 그 인품과 도덕적 풍모는 참으로 간절하고 진실했다.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애잔하다.
그 손자 좌영(佐榮)이, 종조 숙부 술주(述周)의 명에 따라 묘비의 명문을 요청하였다. 감히 감당하기 어렵다고 사양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명문을 짓게 되었다.
조씨는 풍양을 본관으로 한다. 고려시대 평장사 조맹(趙孟)이 시조이며, 조선 초에는 중추원사 조숭(趙崇)이 상주에 정착하였다. 7세손 조정(趙靖)은 봉상정(奉常正)을 지냈으며, 호는 검간(黔澗)이다. 증직으로 좌시랑(左侍郞 이조참판)을 받았고, 속수서원에 제향되었다.
3세손 조대윤(大胤)은 효성으로 이름났고, 그의 아들 조혜(瀣), 손자 조시경(時經)도 덕행이 뛰어났다. 부친 조석우(錫愚)는 문과에 급제했으며, 대간으로서 공보의 기대를 받았으나, 젊은 나이에 별세하였다. 관직은 지평(持平)까지 올랐다.
어머니는 풍산 유씨로, 유후잠(後潛)의 딸이며 수암 유진(柳袗)의 현손이다. 두 번째 어머니는 밀양 박씨(박성환의 딸), 세 번째는 의성 김씨(김여만의 딸)이다. 선생은 유씨 소생으로, 영조 병진년(丙辰年, 1796, 정조 20)에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호연(虎然), 자는 사위(士威)였고, 뒤에 이름을 목수(沐洙)로 고쳤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글자 모양을 구분하고, 오육세 무렵에는 말을 잘하고 어른들을 놀라게 할 만큼 문장을 지었다. 열 살이 되기도 전에《효경》과《소학》을 완벽히 통달하였다. 학문 외에도 매일 자식 된 도리를 실천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806, 순조 6)에 어머니상을 당했을 때 성인처럼 곡하고 절하며 장례를 치렀고, 열여덟에 관례를 행하고 스스로 경계문을 지어 성숙한 문장을 남겼다. 이듬해 과거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강물의 험함을 보고 과감히 돌아왔다. 또 다른 해에는 시험을 앞두고 아내가 병이 들어 시험을 포기하고 간호를 택했다. 이는 생명과 도리를 시험이나 명예보다 중하게 여긴 행실이었다.
경진년(庚辰年, 1820, 순조 20) 부친의 상을 당했으며, 당시 금씨 계모가 집에 들어온 지 몇 달 안 되어 별세했다. 공은 깊은 슬픔에 빠졌으나, 지극히 정성스럽게 간호하고 모셨으며, 노년에 이를 때까지 그 정성이 한결같았다.
계축년(癸丑年, 1829, 순조 29)에 계모상을 다시 당했을 때는 이미 예순이었으나, 상복을 입은 채 더욱 엄격히 제도를 따랐고, 제사와 예절에 있어서도 소홀함이 없었다. 정묘년(丁未年, 1847, 헌종 13)에 병을 얻어 임종 시에 자손들에게 유훈을 남기고, 평상 자리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였다. 처음에는 갑장산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고, 나중에 남쪽 기슭으로 이장하였다.
공은 젊은 시절부터 재능과 기개가 높았고, 부친 앞에서 '鴨江에 말을 던져 중원을 평정하겠다'는 뜻을 밝힐 정도였다. 책 수만 권을 품고,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앞에서 고개를 숙일 정도로 문학적 포부가 컸다. 그러나 점차 도덕적 수양과 실천에 전념하게 되었으며, 오십 년 넘게 몸과 마음을 도야하였다. 가족에 대한 정성과 효행은 지극하였고, 숙부와 당숙을 모시며 경전과 예를 익혔다.
과거에도 몇 차례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떨어지자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오직《사서》와《경전》에 전념하며 후학을 이끄는 데 힘썼다.
선생의 스승이자 벗인 입재(立齋) 정공(鄭公)과는 학문과 도리를 함께 이끌어 간 동지였으며, 후학에게 요점을 깨우치고 실천하게 하는 데 힘썼다.
항상 세 가지 성찰, 여섯 가지 덕목, 아홉 가지 몸가짐을 중심으로 자기를 수양하였다. 그는 “경(敬)은 마음을 바로 세우는 주재요, 성(誠)은 자신을 닦는 중요한 길이다. 배움을 뜻하는 사람이 여기에 힘쓰지 않는다면 진정한 실학이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부인은 평산 신씨로, 극재 신익황의 손녀이자 군수 신염의 딸이다.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셨고, 남편을 공경하며 가정에 충실하였다. 공보다 8년 앞서 세상을 떠났고, 법곡 묘역에 모셔졌다. 슬하에 자녀는 없었고, 동생 사연의 아들 술지(述志)를 양자로 삼았다. 술지도 자식이 없어 종형 술주의 아들 관영(觀榮)을 양자로 삼았다. 관영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말년에 얻은 손자 좌영(佐榮)이 지금 가묘를 돌보고 있다. 명에이르기를
옛날 상산(商山)에는 / 商山舊日。
세 노인이 도를 나누어 세웠고, / 三老鼎峙。
공은 그 중 한 사람과도 같았도다. / 公居其一。
도는 가까운 데에 있었고, / 道在於邇。
예의와 윤리를 깊이 실천하며, / 篤於彝倫。
스스로는 겸손하게 절제하였도다. / 謙於持己。
그 마음은 경계로 가득하고, / 兢兢其心。
그 걸음은 평온하고 바르며, / 坦坦其履。
한마디 말로 요약하자면, / 一言以蔽。
군자의 도를 몸소 실천한 이였도다. / 躳行君子。
옥을 다듬어 정련한 보석처럼, / 琢之貞珉。
아름다운 명성이 끊기지 않으리라. / 令聞不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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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舊堂趙公墓碣銘 幷序。
致明少遊損齋南公門下。竊嘗講服一時道義之契。如舊堂趙公其一也。間亦一瞻顔色。懇懇乎其德儀也。今往事衋然在懷。而其孫佐榮。以其從祖叔父述周之命。責以顯刻之辭。惟懼不堪。敢固以辭。謹按趙氏。貫豐壤。麗平章事諱孟。爲上祖。我朝商議中樞院事諱崇。始居尙州。七世而奉常正諱靖。號黔澗。 贈天官左侍郞。享涑水院。三世諱大胤。以孝聞。生諱瀣。生諱時經。俱有德行。生諱錫愚。文科。負公輔望。不幸早世卒。官持平。卽公皇考也。妣豐山柳氏。後潛女。修巖諱袗玄孫。密陽朴氏。成煥女。義城金氏。汝萬女。公柳氏出也。英廟丙辰公生。初諱虎然。後改沐洙。字士威。幼而警穎。解語。辨字畫偏旁。五六歲。出語驚人。未十歲。通孝經小學。課學外。修子弟職日勤。丙寅。遭母憂。哭擗如成人。十八。加冠。效周誥。作字戒。辭語逼古。明年。赴試。見江路險危。卽旋馬。戊寅。占解。當隨計。有室中憂病。公以看護易疎虞。不可以得失易死生。亦停行。庚辰。丁外艱。時繼妣金氏。入門纔數月。叫哀屢絶。公創巨情迫。益以哀苦。或至杖不能起。猶自力扶救。一意洞屬。至老白首如一日。癸丑。遭故。公且六十矣。守制益嚴。旣除喪。日拜廟。謹齊祭。丁卯。感疾。臨歿。語子弟以恪守先訓。正席而終。享年七十二。葬甲長東麓負甲原。公少負才氣。嘗侍王考言志。有投鞭鴨江。肅淸中原。胷藏萬軸。屈膝韓柳之對。旣擩染典訓。日就規矩。知修身爲立命。盡倫爲常行。委身從事五十年矣。霜露之感。如將有見。連氣之愛。如或有傷。替事季父。慈孝無間。日侍從叔靜窩公。講問服習。率以經禮爲先。每祭先飮餕之席。誦說家先遺訓。申勉不已。少事公車。屢擧而屢屈省圍。卽輟不爲。專意四子洛建書。樂與賢朋友相資警。我先師及立齋鄭公。其最相善也。屹然有交撐互持之功。倡率後輩。以曉會要旨。切實體驗。爲歸宿。常以三省六德九容。自修飭。嘗曰。敬爲立心主宰。誠是修己要道。志學而不於此用功。何以做得眞正篤實之業。葢其兢存冲養之實。有不可誣者。配平山申氏。克齋益愰孫。郡守琰女。孝舅姑。宜君子。葬法谷卯坐之原。無嗣。取季弟獅然子述志爲後。三女朴文寧,成周魯,金性準。述志初無子。以從弟述周子觀榮嗣。有志行早夭。晩而生佐榮。方攝公祀。銘曰。
商山舊日。三老鼎峙。公居其一。道在於邇。篤於彝倫。謙於持己。兢兢其心。坦坦其履。一言以蔽。躳行君子。琢之貞珉。
令聞不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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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兄舊堂先生趙公行狀
先生初諱虎然字士威。後改諱沐洙。舊堂其自號也。始祖諱孟。高麗侍中。趙氏之貫豐壤者咸祖焉。入我朝有諱崇官商議中樞院事。自是簪組不絶。至七世祖諱靖贈吏曹參判行奉常寺正號黔澗。士林俎豆之。高祖諱大胤號立齋。以至孝聞。曾祖諱瀣號疎軒。祖諱時經號中厓。世以文學行誼見推鄕邦。考諱錫愚文科。歷堂后官止持平號存省齋。負公輔望。不幸蚤世。妣淑人豐山柳氏。諱後潛之女。寢郞諱經河孫。文忠公西厓先生五世孫也。次妣淑人密陽朴氏。諱成煥之女。松堂先生諱英後。繼妣淑人義城金氏。諱汝萬之女。公兄弟三人。皆柳氏出。公其長也。以英廟丙辰五月十三日。生于思泉本第。眉彩如畫。眼精炯如晨星。王考中厓公喜曰此兒非凡物。自能行便知拜跪。自解語能辨字畫。五六歲能屬文。句語往往多驚人。八九歲已通孝經小學等書。反覆成誦。辨說旨義。性本剛果。時有㬥發處。一日背誦所讀書不能通。王考責而退之。公卽掩卷而出。王考嚴辭切責曰
人之爲學。將欲服習訓誨。培養德性。而汝之躁㬥如是。讀書何爲。束所學冊子置丌上。使不敢讀者數日。公痛自刻責。惕然警懼。乃作改過書一通凡數十行。候王考晨謁祠廟之時。置諸案上。退以竢命。王考數三被閱。喜形于色曰不但文理成行。儘所謂改過不吝者也。因撫頂面諭曰人孰無過。改之爲貴。苟能因此善端。日新又新。則其於爲君子也何有。自是刻意篤志。勑厲修省。晨起盥櫛。整襟端坐。終日讀書。周旋左右。惟王考意是承。其㬥發之性。便更不萌作。丙寅 遭柳淑人憂。時公年纔十一。自疾患沈劇之時。晝夜扶護。不暫離側。遭變之後。哀號擗踊。朝夕奠儀。晨昏哭泣之節。一如成人。十八始加冠。著字戒一篇以自警。其志尙之高大。文詞之夙就。觀於此槩可知矣。甲戌有慶科。公當赴左試。行到江津。船路甚危。試日已迫。公卽返庭。王考問其故。對曰科事雖重。涉危趲程。非謹愼之道。故未免徑歸。王考曰年少者難制者科欲。而汝能判得此輕重分數。吾何憂哉。乙亥四月。王考下世。冬十月又遭次妣朴淑人喪。翌年四月王母又下世。周歲之內。三遭大故。時値無前歉荒。家力蕩殘。而公卒當幹蠱之任。凡於送終之節。饋奠之需。稟承親命。靡不用極焉。戊寅占鄕解。翌年春當會期。以端人申氏病不赴。亦可見其審於輕重而澹於名利也。庚辰遭外艱。公守制嚴苦。暑不解絰帶。寒不就煖處。足跡不入中門。聲色不至罵詈。泣血茹素。澌薾毁瘠。或至杖而不能起。時繼妣金淑人當中饋。纔數月奄遭變故。晝夜叫號。絶而復甦者。不知一日幾度。而公至誠扶護。無一事或違。當寒而親自爇薪。當飡而躳自執饌。晨昏定省之節。志色承順之道。至老白首如一日。淑人嘗語仲公曰吾所以忍而不死。苟延至此者。乃而兄至誠保護之致也。癸丑淑人又下世。公以衰麻在身之年。其所守制。與少壯時無異焉。每晨拜祠廟。大小祀饗。必敬必愼。以致著存之誠。而當忌日則追慕愈切。祭禮之有不得已變通處。廣詢禮家。博考先輩定論。以爲永行之規。參酌情文。咸盡其宜。公以妻喪杖期。實有三年之體。而練祭受葛之節。只行於子。而夫則不行。非制禮本意。遂於端人喪。躬行練服節次。處兄弟友愛篤至。常曰人之難得者兄弟。可愛者兄弟。而或衰於妻子。或形於物我。終始保骨肉之恩者鮮矣。可不懼哉。兄弟三人。從弟一人同居一垣之內。坐而聯床。臥而聯枕。謹夙夜無忝之誠。盡天倫湛洽之樂。歲乙巳季公不幸無壽。公晝夜痛恨。置孤姪於懷中。撫摩敎導。無間己子。以至成就。季父日省公篤於彝倫。自存省公捐舘之後。不忍捨去宗第。因與公同宮。公替事無間。左右承侍。愉色怡聲。無或少違。事諸父極其誠愛。晩年先行次第零落。惟堂父靜窩公在堂。公日夕陪侍。講論不掇。無異嚴師弟。靜窩公嘗語子弟曰吾黨間以儒行稱者。未見如吾姪也。在族黨尤致意焉。每語羣兄弟曰吾家法文。一遵繩墨。故後來傳襲之弊。或失於嗇或失於阸。規模節度。卻欠撤去藩籬。廣大門戶底氣象。此豈合族一視之誼哉。故當儉歲而不能自存者則謀所以賙之。有負糶而不能自辦者則思所以濟之。竆喪之無以殯殮者。嫁娶之無以爲禮者。亦必出謀發慮。俾免失時之歎。而以式好無猶。爲第一義。至其言議之有厓異。做事之有顚錯。反覆曉諭。委曲懇到。期於悔悟歸一而後已。每於祭先受釐之席。弟兄子姪環列次第。公整襟中坐。申申勉戒。或誦說先祖遺訓。或引論古家模範。勖之以孝謹悌遜之行。申之以宗族親睦之道。皆是子弟職分常行道理。子姪之挾冊門下者。無論遠近親疎。訓誨如一。必以德行爲先。文藝爲後。其在鄕黨。謙虛退讓。卑以自牧。其交雖久而未嘗褻狎。其年稍長則必加敬謹。從容周徧。無或欠缺。其議論不爲苟同。亦不厓異。審量輕重。務歸停當。而至於義理關頭處。確乎有人不能奪者。素性泛愛。而於賢朋益友親愛尤切。每於愚山泉石杜陵風烟。所懷伊人之思。老而彌篤。相對則如逢陽春。不見則心焉如渴。長書短牘。盈溢几案。而俱是朋友間責善規勉論理講道之言也。門臨大道。日接賓客。而雖年少後生。下堂迎送。寒乞流丐。誠心接遇。以至僕隷下賤。未嘗加之以惰慢之容。嘗曰誠敬二字。不但用之於事上。其於接下之道。亦不外是。公聰明絶倫。才器過人。弱冠已涉獵書史。汎濫百家。以致君澤民爲自任。一心上許大抱負。不在於區區章句之儒。故嘗屈首擧業。大小鄕解十居前列。而亦不以得喪爲欣慽。又嘗憂科弊日甚。士風日頹。每戒子姪曰只盡在我。不要捷徑。是吾家遺業。汝輩其知之乎。以朱夫子科擧非累人。程先生不習擧業望第之戒。申申面諭之。葢公之平日操守。只是隨分應擧。無一毫苟且之念。故畢竟不得售。中年以後聞見日就高明。趨向日就眞的。慨然興歎曰中間數十年。都是枉了人事。豈不凜然而寒心哉。遂全意於向裏之工。以四子爲基本。六經爲門路。心經近思等書。我東諸先輩雅言格說。反覆莊誦。潛心服膺。以爲終身受用之資。病世之學者專事辨說而無益於踐履。徒務末習而無補於本領。不屑屑於訓誥同異之辨。不區區於口耳出入之習。平說大義。曉會要旨。爲切實體驗之地。若四勿三貴六德九容。句句理會。勉勉從事。嘗曰敬是立心主宰。一念之篤而百體從令。一念之怠而羣邪抵隙。可不懼哉。又曰誠是眞實無妄之謂。天下之百千萬事。未有不誠而成者。况志於學者。苟無其誠。何以做得眞正篤實之業。曰人之百病。都從一私字出。學者須先除去此病。方可入道。又曰人之可戒。無如人欲。擧一世出沒奔走。罔晝夜頟頟。所以斁人倫滅天理者。職由此也。故一生用力。專在於體驗克治上。幽獨隱微之中。嘗存怠忽之戒。應接事物之際。必致審察之工。偏私刻迫之論。未嘗一出於口。計功謀利之念。未嘗一萌於心。施之於日用云爲之間者。謙厚而平實。公恕而周徧。一端忠愛之誠。雖在草野。常懇懇不已。當丙辰求言之日。士林設應旨疏。推公爲疏首。大槩伸辨某年義理也。公慨然草疏。將指日伏閤。而伊時事機有不敢輒伸己志者。遂發向華城。瞻望 園寢而歸。自是凡於鄕鄰大小論議。一切謝卻。以治心養性。倡率後學。爲晩來事業。家塾黨庠。與遠近秀才。或月朔考講。或輪次通讀。或設庭揖禮。以明其進退周旋之節。或出問目。以觀其議論歸宿之地。其引進後學。開導成就之志。實有所不能自已者。公嘗憂一種洋學橫流畿湖。以至於衣裳之族。將爲禽獸之域。抵書李公敬儒曰邪說之橫流。全由於正學之不明。以明正學講實理等語。反覆上下累百言。無非斥邪明理之語也。晩年喜讀論語。嘗曰吾生晩未得親炙聖門。而吾夫子日用言行。在此一部。語其極則聖人之事。而語其近則吾輩亦可行。雖熱日方中而讀之不已。永夜過半而誦之不撤。子姪輩請無以努力損精。公笑曰今吾夕死非久而朝聞無路。雖夜夜秉燭。而尙有日不足之歎。此身不病之前。豈可浪過時日哉。一門宗族之家于商者十五六世。各派諸先輩嘉言懿行足法於子孫者。公爲之撰述誌狀。藏于追遠堂。以爲效則之地。至於文章。在公餘事。而自蚤歲體段已成。往往有秦漢口氣。晩年以理勝辭達爲主。發於詩句著於書牘者。冲澹渾浩。眞有德之言也。不喜著述。間有不得已應之者。亦不以自居也。丁卯秋攜心經入墳庵數日。感疾還家。疾旣革。命諸弟姪進前。誡之以各遵先訓。勿墜遺業。遂屛婦女正席而終。卽十一月二十二日也。訃聞遠近士友莫不奔走致唁曰。君子亡矣。吾黨將安所依歸。翌年正月。葬于甲長山東麓庚坐之原。越三月日。遷于南麓負酉原。公天分甚高。德器夙成。以恁地聰明。加篤實工夫。學承家庭。道在日用。事親而盡其孝。奉先而盡其誠。爲兄弟盡其友。處宗族盡其睦。在鄕黨謹。與朋友信。其於彝倫上常行道理。曲盡無餘。是豈但資質之美而然哉。葢其治心也以誠敬爲本。行己也以忠信爲主。不憚改過而樂於爲善。恬於名利而安於貧窶。其於克伐怨欲境界。尤致意焉。思辨之工。不爲不精而未嘗以問學自標。踐履之力不爲不篤而未嘗以行能自居。通達之識不爲不高而未嘗以吾見自多。常慊然若無所知而無所能焉。或於難疑問答之際。輒辭遜而不質言。或於書牘過重之稱。輒固辭而痛拒之。平生一言一行。皆可師法於世。於乎盛矣。若使公進用明時。得展其抱負。則經綸足以陶鑄一世。文章足以黼黻皇猷。而天於吾道。不謀已久。屢登薦剡。未霑一命。畢竟終老於荒閒寂寞之濱。此乃斯文之不幸。在公何憾哉。有遺集十餘卷藏于家。配平山申氏。贈大司憲克齋諱益愰之孫郡守諱琰之女。天性仁厚。事舅姑以誠。奉君子以禮。實爲宜家之婦。先公八年而歿。葬于法谷卯坐之原。無嗣。以季弟獅然長子述志爲后。三女長適朴文寧。次適成周魯。季適金性準。述志初無子。以從弟述周子觀榮爲嗣。有文行早夭。晩生子佐榮。述志以可隱公所撰家狀授尋春。使繼而狀之。竊自念尋春無狀。自幼少時從學于外氏。師事公五十餘年矣。耳聞而目見。心悅而誠服。每有公明宣學而未能之歎。葢其德媺之盛。雖無以形容。而親炙之久。亦豈敢曰全無窺測哉。子思子贊詩之衣錦尙絅曰惡其文之著也。又曰君子之道。闇然而日章。公之學。其有得於斯也歟。今於賢胤之託。義不敢終辭。謹因家狀竊附以平日尊事慕悅之意。以竢夫秉筆君子採擇焉。<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