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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4주년 기념 그 유적지를 찾아서
탑골공원-승동교회-태화관-(공평도시유적전시장)-보성사터-천도교중앙교당
탑골공원은...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이다. 조선 세조 13년에 원각사로 건립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어 1920년에 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발상지로 처음
으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시설로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당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물 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
운동 기념탑, 3·1 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탑골공원은 광무
1년(1897) 총세무사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꾸며진 현대식 공원이며,
1919년 3·1운동 당시 시내 청년 학도와 애국시민이 이곳 파고다 공원에 모여 학생 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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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동교회
1912년 건축돼 지금까지 잘 보존돼온 승동교회 예배당은 서울시의 유형문화재인 동시에, 3.1 운동 당시 학생
들이 비밀리에 거사를 모의하고 준비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인 김원벽
선생은 승동교회 청년 면려회 회장 출신이었으며, 그를 중심으로 모인 학생 지도자들은 교회 밀실에서 3.1
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을 계획했습니다.
"(김원벽 선생과 학생들은) 교회에 태극기를 숨겨두고 있다가 거사 당일 태극기를 가지고 나가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합니다. (승동교회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외치는 독립만세
운동의 시작이 되는 거룩한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최영태 승동교회 목사
3.1운동 이후 수많은 학생들과 교인들이 투옥되자, 당시 차상진 담임목사는 근처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12인의 장서'를 조선 총독부에 제출하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교회는 일본 경찰의 압수수색을 받는 등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앞장섰으며, 그 신앙과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최영태 승동교회 목사
(모신문과의인터뷰에서발췌)
민족대표 신석구, 오화영, 정춘수씨는 이 교회 목사였다.
신도들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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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관은...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요릿집으로 명월관(明月館)의 분점격이었다.
명월관은 한말에 궁내부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으면서 어선(御膳)과 향연을 맡아 궁중
요리를 하던 안순환(安淳煥)이 1909년에 지은 요릿집이다. 명월관은 개점 초기부터 대한제국의 고관과 친일
파 인물들이 출입하였으며, 후기에는 문인·언론인들과 국외에서 잠입한 애국지사들의 밀담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8년 명월관이 소실되자 안순환은 순화궁(順和宮: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 194)에 명월관의 분점격인
태화관(太華館)을 차렸다가 뒤에 태화관(泰和館)으로 개명하였다. 이곳은 3·1독립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하연을 베푼 곳으로 유명하다.
민족의 독립만세운동계획에 따른 준비를 1919년 2월 28일까지 완료한 민족대표 33인 중 29인(길선주·김병조·
유여대·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은 태화관에 모였는데,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가까워
지자 손병희(孫秉熙)는 최린(崔麟)으로 하여금 태화관 주인 안순환이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게 하여
“민족대표 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였다.
이에 일본경찰대 80여명이 곧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이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韓龍雲)의
식사를 듣고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일본경찰에 의연하게 연행되었다. 이와 함께 탑골공원
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독립의 함성은 전국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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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도시유적전시관
2015년 공평동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추진하던 중 조선 한양에서 근대 경성에 이르는 역사도시 서울의 골목길
과 건물터가 온전히 발굴되었다. 서울시는 도시유적과 기억을 원래 위치에 보존하기 위해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을 만들었다. 서울 한복판 종로에 위치한 이곳은, 도시유적의 개발과 보존의 좋은 예이다.
종로구 공평동에는 양반과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 수사하던 조선 시대의 의금부가 있었다. 해서 1914년 동명
을 제정할 때 의금부에서 공평하게 재판을 처리한다는 뜻을 담아 ‘공평公平’동이라 했다. 공평동은 한양의 행정
구역에서 중부 건평방에 속한다. 건평방은 조선 최고의 번화가이자 시전의 중심지였다. 의금부, 의료와 약재
를 관장하던 전의감 등의 관청이 있었다. 공평동의 동쪽은 인사동, 서쪽은 청진동과 접하며 북쪽은 인사동길
을 경계로 하고 남쪽은 종로이다. 이 부근에 ‘이문里門’이 설치되어 이문동의 동명이 유래되기도 했다. 특히
이문 안 설렁탕집이 유명하다.
공평동 북쪽으로는 여러 궁가가 입지했다. 순화궁은 헌종의 후궁 경빈 김 씨가 살았던 곳으로 영웅대군의
사위 구수영이 세조에게 집터를 하사받아 살았다. 이밖에 수진궁, 용동궁, 사동궁, 죽동궁 등이 있었다. 이렇듯
공평동은 조선부터 현재까지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시전부터 왕족의 주거지까지 서민적이면서도 위계 높은
장소의 특징을 갖고 있다.
2010년 공평지구 문화재 제표조사를 하고 2014년부터 정밀발굴조사를 하였다. 지표면을 기준으로 약 2.8~3.9
m 깊이까지 조사한 결과 조선부터 일제강점기까지 4개의 시대별 문화층에서 108동의 건물지와 도로 유적,
약 1000여 점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여러 문화층 가운데 16~17세기 유구는 총 34개소의 건물지에서
출토되었는데 학술적 가치가 높고 유구의 상태가 온전히 남아 있어 전시관 내부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이는 도심 정비에서 발굴 매장 문화재를 최대한 ‘원위치 전면 보존’한다는 ‘공평동 룰’을 적용한 첫 사례이다.
전동 큰 집, 골목길 ‘ㅁ’자 집, 이문안길 작은 집의 3개 건물지가 핵심 콘텐츠로 각 건물지별로 1/10 축소 모형,
VR체험, 1:1 복원 모형 등 다양한 전시기법을 통해 16~17세기 한양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조선 시대
부터 현대까지 사용했던 골목길이 확인되어 이문안길과 전동 골목길을 직접 걸으면서 조선 시대에 와 있는
느낌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전동 큰 집은 발굴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지로 중인 이상의 가옥 또는 관청의 부속 시설물로 추정된다. 안마당
을 둘러싼 기단석, 적심석, 그리고 긴 초석 등이 발굴되었으며, 4개 동의 건물이 하나의 집을 이루고 있다.
골목길 ‘ㅁ’자 집은 지금의 우정국로에 해당되는 큰 길에서 갈라진 골목길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초석, 기단석
, 고맥이석, 마당 박석, 배수로 등이 상당히 잘 남아 있어 ‘ㅁ’자 모양의 구조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이문안
길 작은 집은 온돌과 마루, 아궁이 등의 주택 바닥형식이 모두 발굴되어 조선 전기 한옥의 발전 과정을 보여
준다. 6칸의 작은 집이지만 마룻널의 크기, 초석과 큰 길에 마주하고 있는 점 등을 보아 기와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동 골목길도 특색있다. 공평동 유적의 중앙부에서 폭 210~305㎝ 내외의 골목길 3곳이 확인되었다.
전동 골목에 난 길이라 전동 골목길이라 부른다. 이곳은, 잠시 서울 도심에서 한양을 걷는 느낌이다.
-매일경제 기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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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 인쇄소 보성사 터를 찾아서
독립선언서 인쇄 중 형사 들이닥치자, 거금 5000원으로 입막았다
'묵암 비망록'으로 본 독립선언서 비밀 인쇄작전/조선일보 2019.2.5일자
입력 2019.02.26
'준비 상태는 물론 만점이다. 내일만은 실수 없이 신명을 바쳐 거사에 성공해야 한다. 꿈을 잘 꾸자.'
1919년 2월 28일 묵암(默菴) 이종일(李鍾一·1858~1925)은 이렇게 일기('묵암 비망록')에 적었다. 자신이 사장
인 보성사에서 인쇄를 마친 독립선언서를 손에 든 묵암은 그 감회를 '꿈을 잘 꾸자'란 문장에 압축했다.
서울 조계사 옆 수송공원에 서 있는 이종일 선생 동상. 독립선언서 인쇄의 총책임자이자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종일 선생은 '묵암 비망록'을 통해 3·1운동 전후의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1898년 순한글 '제국신문'을 창간한 그는 1910년까지 사장 겸 기자로서 개화와 계몽운동에 앞장선 언론인
이자 교육자였다. 30평 푸른 벽돌 2층 건물의 보성사는 독립운동의 요람이었고, 직원 60명은 동지였다. 3·1
운동 당시 핵심은 천도교였다. 천도교는 당시 전국에 300만명의 신자가 있었다. 현금 동원력도 막강했다. 이
조직과 자금력은 3·1운동의 바탕이 됐다. 보성사도 천도교가 운영하고 있었다.
'묵암 비망록'은 독립선언서 인쇄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오늘부터 독립선언서를 보성사에서
인쇄하기 시작하다. 좁은 인쇄소에서 문을 굳게 닫고 찍기 시작했다.'(2월 20일) '2만5000매를 1차로 인쇄
완료하여 천도교 본부로 운반하다.'(2월 25일) '1차로 인쇄된 것을 각계 동지들 7~8명에게 2000~3000매씩
배포했다. 이갑성에게 2500매가 전달됐다.'(2월 26일) '오늘까지 2차로 1만매를 더 인쇄하여 천도교당으로
가지고 가다가 파출소 경찰에 검문당했으나 족보라고 속이고 겨우 운반했다.'(2월 27일)
현재 조계사 자리에 있던 보성학교 전경. 사진 오른쪽 회화나무 뒤 건물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로
추정된다. 보성사 건물은 3·1운동 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됐다.
'묵암 비망록'과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 '남강 이승훈 전기' 그리고 민족 대표 33인에 대한 일경(日警)의 취조서
엔 3·1운동 전야(前夜)의 풍경이 생생하다. 스스로 "나는 과격한 사람"이라고 밝힌 묵암은 수시로 손병희를
찾아가 '결심'을 촉구했다. 그러나 번번이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답만 들었다. 그의 일기를 보면 당시 지식인
들이 국제 정세도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것(민족자결주의)은 패전국에 속해 있는 약소국
의 자국 영토 처리권이라는 것 같은데, 그러면 일본이 패전해야만 우리의 독립이 올 것 아니겠는가.'(1918년
1월 27일) 1918년 2월에 접어들자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 등이 잇따라 독립을 선언했다. 묵암은 다급해졌다.
1918년 1월 '천도교 단독이 아닌 다른 종교인 연합'이란 아이디어를 꺼낸 손병희는 그해 5월 마침내 '대중화·
일원화·비폭력'이라는 독립운동의 3원칙을 정했다. 1918년 9월 9일을 거사일로 잡기도 했다. 계획이 무산된
것은 명망가들이 머뭇거렸기 때문. 묵암은 '나도 이젠 기진맥진이다'(1918년 12월 15일)라고 썼다.
이듬해 1월 고종 승하 소식이 전해졌다. 동경 유학생들의 2·8선언도 터져 나왔다. 지도자들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손병희는 '속히 결단하지 못해 민망하다'(1919년 2월 15일, '묵암 비망록')고 했다. 개신교와의 접촉이
시작됐다. 오산학교 교장 남강 이승훈 장로가 접촉 창구였다. 2월 10일쯤 연락을 받은 그는 즉시 상경해 거사
계획을 들었다. 의기투합한 남강은 초인적으로 뛰었다. 선천으로 달려가 양순백·김병조·유여대·이명룡 등을
만나 동의를 얻고 바로 평양으로 이동, 복통(腹痛)을 핑계로 입원해 병실을 거점 삼아 손정도·길선주·신홍식
등 동지를 모으고 16일 밤 기차로 상경한다. 서울에서도 남강 이승훈은 이갑성·박희도·오기선·함태영·오화영·
현순·이세환 등을 잇따라 접촉했다.
운동 자금을 모금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손병희는 최린을 통해 10원권 200장, 5원권 600장 합계 5000원을
개신교계에 지원했다. 보름 남짓 만에 개신교 측 민족 대표 16명이 모였다. 최린이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을 끌어들였다. 천도교 15명, 개신교 16명, 불교 2명 등 민족 대표 33인이 정해졌다. 2월 28일 밤 서울
가회동 손병희 집에 모인 민족 대표들은 초면인 경우도 많았다. 통신·교통이 미비하던 시절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인적 네트워크가 이뤄낸 쾌거였다.
가슴을 쓸어내린 일도 있었다. 26일 저녁 한창 독립선언서 인쇄가 진행되던 중 순찰하던 조선인 형사 신승희
가 들이닥친 것. 묵암은 손병희에게 달려가 5000원을 받아 형사에게 줬다. 당시 자신이 받던 순사보 월급
40여원의 125배에 달하는 거금을 받은 조선인 형사는 입을 다물었다.
학계에서는 33인에 대한 취조 기록 등을 근거로 독립선언서 인쇄 날짜를 2월 27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천도교 측은 '묵암 비망록'과 2월 26일 개성에서 독립선언서 인쇄본을 수령했다는 증언 등을 토대로
2월 20일부터 두 차례에 걸쳐 약 3만5000장을 인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묵암은 3·1운동 민족 대표로 참가해
3년형을 선고받고 2년6개월 감옥에 있었다. 가출옥 후 1922년 제2의 3·1운동을 추진하다 발각됐고, 1925년
사실상 영양실조로 굶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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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우리길에서 이곳을 탐방했습니다.
▼그날 채널에서 취재 중 인터뷰(잛은..) 장면입니다. 아래 박스를 터치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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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중앙교당
독립운동에 있어 천도교의 활동은 타 종교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자금을 마련했다.
33인중 천도교 15명, 기독교16명 불교 2명이었다.
창시자 초대 최재우 3대 손병희에 대해서는 다 잘 아실겠고...
소파 방정환은 손병희의 사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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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벽의 독립운동가 사진이
흑백이 아닌 컬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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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모 목사의 연설(?)로 광화문이...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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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함깨하며 안내를 하신 종로구청 해설사 윤성기님께 감사 드리며
오늘 3.1운동 유적지 역사 탐방에 함께하신 분들(존칭 생략)...함께한 역사문화도보~ 수고하셨습니다.
꽃담 그녀 민수기 사즐남 연두 이청춘 첼시 푸른장미 행복걷기
첫댓글 역사의 현장을 본 뜻깊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역사를 잊는 민족은 망합니다
104주년 3.1절 오랫동안 기억에 간직하고 후세에 전하겠습니다
민수기님과 오랜만에 함께하여 반갑고 보람찼습니다.
저도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돌아보는 귀한 하루였지요.
104주년 3.1절날 로따님따라 뜻깊은 역사의현장을 둘러보면서 우리의과거 현재 또한 미래를 생각해보는 귀중한시간들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가까이 있음에도 지나쳤던 길들이 많았음을 실감했지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잊어서는 안되는 날였구요.
의미있는 역사문화도보 로따님께서 이어감이 얼마나
기쁜지요 발자취을따라 걸음하며
다시 상기되어짐이 우리에게는
큰 선물과 같아요 숭동교회가
큰역활을한 장소이네요 보성사에서도 역사공부 참여는
못했지만 문장과후기로 공부
했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정말 의미가 큰 역사문화길이였음을 실감했답니다.
숭고한 삶을 살아가신 분들께 고개를 숙인 하루였구요.
로따님의 역사도보 후기는 사진과 자세한 설명을 항상 해주셔서 우리 역사를 재조명하여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감사합니다.
푸른수풀님과 함께 한 하루는 정말 가슴 뭉쿨한 시간였지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영령께 고개 숙인 날이구요.
오늘 로따님의 후기를 읽으면서 차분하게 그날의 역사문화도보의 의미을 다시 새겨 보는 기회가 됩니다.나라에 대한 고마움도 모르고~~
우리가 잘 살고 있는 것은 그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많이 반성하는 하루였습니다.
뜻 깊은 특별한 하루~~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