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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8일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5:17-20
차고 넘치는 의: 문자를 넘어 사랑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또 어떤 맥락에서 쓰느냐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이기도 한 ‘의(義)’라는 단어를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일반인(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말할 때, 그 ‘의’는 대개 무엇을 뜻합니까? 보통 위험에 빠진 이웃을 구하기 위해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거나, 화재가 발생했을 때 혼자 피신하지 않고 이웃집 문을 두드리며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구하는, 그런 영웅적이고 희생적인 행동을 일컬을 때가 많습니다. ‘의인’이라는 말을 비꼬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말이지요.
반면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이 “의인”이라고 말할 때, 그 ‘의’는 어떤 느낌인가요? 우리는 주로 “비록 내 삶은 부족하고 여전히 실수투성이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죄 없다 인정받은 상태”를 떠올리곤 합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참으로 귀한 고백입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눈에는 이것이 참 낯설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니, 삶은 엉망이고 욕심쟁이인데 자기들끼리는 의롭다고 한다고? 심지어 자기들만 의롭다고 한다고?”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같은 ‘의’라는 말을 놓고도, 세상의 상식과 교회의 언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깊은 간극이 존재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 차이는 교회 안에서도, 심지어 성서 안에서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마주한 마태복음의 말씀도 이와 비슷한 ‘언어의 온도 차’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익숙한 안경을 내려놓고, 마태가 이 복음서 전체에서 이 단어들을 어떤 습관과 버릇으로 사용해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마태의 용례’를 살피는 것을 통해 마태는 본문을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 그리고 그 말씀과 의미가 지금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 함께 찾아가 보겠습니다.
먼저 17절에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완성하러 왔다”입니다. 새번역 성경이 ‘완성하다’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플레로오(πληρόω)’로 마태는 총 16회 사용했습니다(1:22, 2:15, 17, 23, 3:15, 4:14, 5:17, 8:17, 12:17, 13:35, 13:48, 21:4, 23:32, 26:54, 56, 27:9). 이 중 대다수(13회)는 “구약의 말씀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 성취됐다”는 의미로 사용됐는데요. 그중 1장 22절 한 구절만 잠시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대목은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으로, 마태는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해진 것이 성취되게 하시려고 예수의 탄생이 일어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인 이사야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이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이루려고(πληρόω, 플레로오) 하신 것이었다. 이런 말씀이었다. [보라, 처녀가 아이를 가져 아들을 낳을 텐데,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 이름을 번역하여 옮기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이다.”
마태에게 있어 ‘완성’ 혹은 ‘성취’란, 구약에서 선포됐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예수의 탄생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으로 실현되는 웅장한 드라마였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예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신 말씀 역시 이런 의미로 보입니다. 율법과 예언서, 즉 구약 성경 전체가 가리키고 기다려왔던 하나님의 뜻이, 이제 예수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고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18절 이하를 계속 읽어나가면 그 의미가 보다 잘 이해됩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는 문자 그대로 글자 하나하나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기보다, “율법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 의미는 결코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예수 안에서 모두 실현될 것이다”라는 확신의 표현일 것입니다. 19절 역시 그러하고요. 계명, 즉 율법이 담고 있는 의미를 임의대로 경중을 따지지 말고 모두 소중하게 여기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여러모로 성경 전체의 맥락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성취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가깝게는 17절의 율법과 예언자들로 대표되는 구약의 말씀들을 허물거나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성취하려고 왔다는 말씀과 잘 어울립니다. 멀게는 다른 신약성서와도 잘 어울립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δικαίωμα, 디카이오마: 의로운 요구)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πληρόω, 플레로오)”(롬 8:4)
바울 역시 율법의 의로운 요구(뜻)가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는 입장으로 말합니다. 폐기됐다고 말하지 않고요.
둘째는, ‘율법을 소중하게 여기는’ 입장입니다. 마찬가지로 가깝게는 18-19절의 내용처럼 일점일획과 작은 것, 즉 율법이 담고 있는 의미 모두를 소중하고 진중하게 여기는 것과도 잘 어울리지만, 멀게는 다른 신약성서와도 잘 어울립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롬 7:12)
셋째는, 이처럼 율법을-율법이 요구하는 의미 모두를- 소중하고 진중하게 여기지만, 자구 하나하나에 얽매여 문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닌 율법 곧 문자에 담긴 내용들과 그 정신을 소중히 여기며 따르는 입장입니다. 이는 가깝게는 마태복음 5:21-47절의 6가지(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사랑-이웃과 원수-)로 대표되는 예수의 새로운 율법해석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예수께선 “살인하지 말라”는 문자를 넘어, 그 법이 지키고자 했던 생명 존중과 형제 사랑의 정신으로 법을 성취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멀게는 다른 신약성서와도 딱 맞아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에 얽매인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롬 7:6)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πληρόω, 플레로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πλήρωμα, 플레로마)입니다.”(롬 13:8,-10)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정말 당혹게 하고 충격에 빠뜨리는 구절은 바로 20절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들에게 단언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들의 '의(δικαιοσύνη)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것보다 차고 넘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율법학자(서기관)들은 평생을 바쳐 성경(오경 + 예언서 + 성문서 또는 시가서-시편, 잠언 등- + 구전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당대 최고의 신학 전문가들이었고,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을 일상에서 철저히 지키려 애쓰던 종교적 실천의 대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는 바로 그들의 의보다 차고 넘치는 의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나아온 제자들에게요. 만약 이것이 율법 조항을 그들보다 더 많이, 더 철저히 지키라는 ‘양’의 문제라면, 과연 우리 중에 누가 감히 천국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가 말씀하시는 이 ‘더 나은 의’, '차고 넘치는 의'란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여기서 우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추구했던 의가 어떤 것이었는지, 마태복음의 여러 구절을 통해 마태의 평가-관점-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율법과 말씀들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려 했고, 명시된 율법 외에 구전된 율법까지 소중히 여기며 철저하게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결정적인 한계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율법의 자구 하나, 규정 하나하나, 문자 그 자체에 얽매였습니다. 그 결과. 정작 그 문자 안에 담긴 ‘정신’, 즉 율법과 예언서 등 구약 전체를 통해 진짜 말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시야가 좁아져서 정작 봐야할 건 놓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차고 넘치는 의’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지키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 규정이 담고 있는 ‘본래의 취지와 정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5장 21절부터 47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그 답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선 여섯 가지의 예를 들어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 직접 설명해주십니다. 율법학자들은 가르쳤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으리라.” 이것은 문자에 충실한 의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선 말씀하십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단언컨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가르쳤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지만 예수께선 말씀하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나 사람 안 죽였어”와 같이 행위의 경계선만 넘지 않으면 만족하는 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더 나은 의’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진짜 요구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형제자매, 이웃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 그 정신’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 속에 담긴 ‘타인을 성적 도구가 아닌 인격으로 존중하는 마음’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것보다 <차고 넘치는 의>가 아닐까요? 달리 말하면, 규정이라는 그릇을 넘어 본질로 <차고 넘치는 의>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의’의 충돌은 마태복음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대표적으로 안식일 논쟁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또 어느 안식일에는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때마다 바리새인들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며 비난했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소!”,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그들에게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규정(문자)’을 지키는 날이었습니다. 그 규정을 지키기 위해 눈앞에 있는 이웃의 배고픔도, 병자의 고통도 외면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규정을 지켰으니 의롭다고 생각했다고 마태복음은 증언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가 이해한 안식일의 주인은 ‘규정’이 아니라 ‘사람 또는 생명’이었습니다.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고된 노동과 고통에서 벗어나 생명을 회복하고 안식을 누리는 ‘신실한 사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한결같은 사랑(헤세드)이지 희생제물이 아니다.’(호 6:6)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이 알았다면, 잘못 없는 사람들에게 죄 있다고 판결하지 않았을 겁니다.”(마 12:7).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준수’라는 그릇은 꽉 붙들었지만, 그 안에 담겨야 할 ‘신실한 사랑과 생명’은 쏟아버렸습니다. 반면 예수께선 규정의 껍데기를 초월하면서까지, 그 안에 담긴 ‘신실한 사랑’이라는 알맹이를 지켜내셨습니다. 비록 그로 인해 손해를 보고 불이익과 고난을 당하더라도요. 이것이 바로 예수가 말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보다 ‘차고 넘치는 의’가 아닐까요? 곧 ‘문자를 넘어 그것이 추구하는 정신을 실제로 살아내는 의’의 실체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오늘 20절의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경고도 새롭게 들립니다. 여기서 천국은 죽어서 가는 장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통치(다스림, 돌봄)’로 들어가는 역동적인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어디에 임합니까? 차가운 법 조항을 따지는 곳이 아니라, 율법 및 예언자들 곧 구약 전체가 지향했던 신실한 사랑과 자비가 실현되는 곳에 임하지 않을까요? 이 둘 중 어디가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곳일까요?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단순히 천국 입장권을 빼앗겠다는 협박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사랑과 정의, 자비와 긍휼, 평화와 공의)을 외면하고 그 껍데기만 붙드는 사람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생명력 넘치는 통치의 기쁨을 결코 맛볼 수도, 그 안에 머물 수도 없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물속에 몸을 담그지 않고서는 수영의 기쁨, 물장구의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처럼요. 그렇게 “율법의 정신인 ‘사랑’ 속으로 뛰어들지 않고서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갈 수 없다, 그 돌보심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2026년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 우리도 2천 년 전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 규정들을 지키는 것으로 “나는 의롭다”고 자위하고 있지는 않은지 겸손하게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 평화목 교회는 그런 종교적 규정들을 그렇게 내세우지도 강조하지도 않아 왔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규정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그 '자유함'이 혹시 또 다른 형태의 무관심이 되진 않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규정이 약하다는 이유로, 이웃의 고통을 향해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사랑의 의'를 놓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그런 우리 역시 형식에만 매달려, 정작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뒤로하고 있지는 않는지, “법대로 하자”고 외치면서 그 법이 살려야 할 사람을 죽이는데 동조하거나 침묵하고 있진 않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선 우리에게 율법이라는 악보를 찢어버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율법의 일점일획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악보(율법 곧 문자)를 넘어, 그 악보가 노래하고자 했던 아름다운 선율(정신)을 연주하시는데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초대하신 이 '사랑의 연주'를 우리가 멈추는 순간,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 곁에서 낯선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깨어있어야 합니다. 문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해, 날마다 예수의 마음으로 우리 마음과 일상을 조율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의 정신으로 우리의 정신과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그 의로 초대하셨음을, 초대하고 계심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차가운 규정’으로 다가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따뜻한 정신’으로 다가가고 있습니까? 규칙을 어긴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한 번 헤아려보는 긍휼로 다가가고 있습니까?
또 나 자신에게는 어떻게 적용하고 있습니까? 나 자신에겐 규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충실했다고 여기진 않습니까? 정말 그 규칙을 의도한 취지와 그 핵심 정신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일상의 작고 사소해 보이는 데서부터 이런 하나님의 의를 따르려는 몸부림이야말로, 율법의 문자를 넘어 그 정신을 성취해가는 ‘차고 넘치는 의’가 아닐까요? 그야말로 예수께서 자신의 일상에서 증거하시고 성취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의’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평화목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통치는 분명 우리에게 큰 행복을 줍니다. 그렇기에 그 통치에 들어가길 애쓰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통치를 받아들이길 몸부림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일상은 차가운 규정집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온몸으로 보여주신 것처럼요. 문자의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그 치열한 사랑의 몸부림 속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차고 넘치는 의'가 자연스럽게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요구하시는 의가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와 그 행복이, 그 의가 우리 삶에 차고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