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0일 낮 12시 서울 연세대 토목환경공학과 강의실. 1학기 종강(終講) 수업을 마친 송하원(50) 교수가 제자 20명과 일일이 짤막한 대화를 나눴다.
"○○야, 이번 방학 땐 뭐 할 거니?" "넌 취업 됐다며? 축하한다."
"참, ○○는 2학기 때 어학연수 간다며? 가서 공부만 하지 말고 여행도 다니면서 견문을 넓혀라."
송 교수는 강의실을 나서며 제자들을 돌아보고 빙긋 웃었다. "한 학기 동안 즐거웠다. 지금껏 한 수업 중 가장 재미있는 시간이었어. 안녕."
이 수업을 마지막으로 송 교수는 여름 풀 무성한 교정을 떠났다. 한달 반 뒤인 7월 25일 새벽, 송 교수는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작년 5월 폐암4기 진단을 받은 지 14개월 만이었다.
투병기간 내내 송 교수는 동료와 제자들에게 병을 내색하지 않고 평소처럼 강의와 연구를 계속했다. 숭숭 빠진 머리칼을 가발로 감추고 매주 9시간씩 강단에 섰다. 어깨와 등, 허리의 통증을 견디기 위해 6시간마다 진통제를 복용했다. 그는 말기암 환자였지만 제자들에겐 담담하게 웃는 낯을 보였다. 어린 제자가 연구실에 찾아와 어려움을 털어놓을 때마다, 송 교수는 자신의 중병을 머릿속 한편에 밀어두고 자기 앞에 앉은 젊은이에게 힘을 보태줄 방안을 골똘하게 궁리했다.
지난 1월, 석사과정 제자 이모(26)씨는 늦도록 연구실에 남아 있었다. 송 교수가 다가와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빳빳한 1만원짜리 100장이 들어 있었다. 송 교수는 "힘들어도 꿈을 잃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돌아섰다. 이씨는 스승이 준 봉투를 품에 넣고 칼바람 부는 교정을 가로질러 귀가했다. 그 일을 떠올리며 이씨는 목이 멨다. "아버지 사업이 기울어 무척 힘들 때였어요. 어떻게 아셨는지…."
지난 4월, 인도 출신 유학생 발라(25)씨는 고향에 있는 어머니의 당뇨병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애태우고 있었다. 발라씨는 송 교수를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튿날 송 교수가 발라씨에게 140만원을 쥐여줬다. "얼마 안 된다. 미안하다. 수술비에 보태라."
제자 김주삼(25)씨는 "교수님이 '절대 경제적인 문제로 학업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회고했다. 송 교수 자신도 가난한 수재였다. 그는 서울 신림동의 단칸방에 살며 연세대에 합격했다. 과외로 학비를 벌며 고학으로 대학을 마쳤다. 미국 UC버클리 석사, 텍사스대 토목공학 박사 과정 때는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부인 박영숙(46)씨는 "남편은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고 했다. 미국의 한 대학에 연구교수로 자리 잡은 제자는 스승의 부음을 듣고, 스승의 이메일 주소로 이메일을 보내왔다.
"만날 저 보고 미련하다더니, 이렇게 먼저 가십니까. 제 결혼식 때 '신부 얼굴 봐야지' 하며 대기실에 들어와서 쌈짓돈이라며 300달러를 쥐여주셨죠…. 남들에게 투병 중이라는 말씀도 안 하시고 얼마나 아팠습니까."
동료와 제자들은 그가 깐깐한 학자였다고 기억했다. 같은 과 정상섬(49) 교수는 "SCI(과학논문인용색인)급 논문만 40여편에 달할 정도로 연구에 매진한 분"이라고 했다. 안기용(36) 박사는 "외국 저널에 7번이나 논문을 게재했던 학생도 교수님의 심사 때는 몇 번씩 논문을 고쳐 써야 했다"고 말했다.
사석에서 그는 소탈했다. 정 교수는 "송 교수는 학생들을 재미있게 해주려고 강의 때마다 유머를 한두 개씩 미리 준비했고, 스스로도 학생 가르치는 일을 무척 즐거워했다"고 했다.
폐암 진단을 받기 직전 그는 터키에서 열린 토목 관련 국제학회에 참석 중이었다. 그는 두 다리와 등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호텔 방에서 쓰러졌다. 휠체어를 탄 채 서둘러 귀국했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 송 교수는 부인 박씨에게 "주변에는 급성 하반신 마비 정도로 해 두자"고 했다. 그는 "평소처럼 제자들 논문 지도를 하고 싶다"고 했다.
연구실 제자 10여명이 번갈아 병실에 들러 하루 6시간씩 물리치료 받는 스승을 도왔다. 이들은 스승이 폐암인 줄 까맣게 몰랐다. 하루빨리 기력을 되찾기만 바랐다. 제주도 출신 제자가 스승의 밥상에 전복을 올렸다. 포항 물회를 공수해온 제자, 흑염소 진액을 가져온 제자도 있었다.
개강을 앞둔 2월 중순, 송 교수는 "당분간 항암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주치의인 연세대 종양내과 김주황(58) 교수가 여러 번 말렸다. 송 교수는 완강했다.
1학기 내내 송 교수는 통증 때문에 밤잠을 설치면서도 강의를 계속했다. 소변을 보지 못해 팔다리가 퉁퉁 붓기도 했다. 호흡 곤란도 잦았다.
그는 종강 수업을 마친 뒤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지난달 22일, '마지막'을 예감한 부인 박씨가 송 교수의 동료와 제자들에게 폐암 투병 사실을 알렸다. 병실로 찾아온 제자들을 오히려 송 교수가 위로했다. "난 괜찮다. 너희들은 꿈을 크게 가져서 반드시 세계적인 학자가 돼야 한다."
사흘 뒤인 지난달 25일 새벽 송 교수의 맥박과 혈압이 차츰 떨어졌다. 의료진이 가족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송 교수가 끔찍이 사랑했던 맏딸(18)이 소리 내 울었다. "아빠, 죽으면 안 돼. 내 말 들려? 사랑해."
송 교수는 딸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부인 박씨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때, 눈물 한줄기가 주르륵 흘렀다"고 했다. 오전 6시30분, 송 교수의 몸에 연결된 '심전도 모니터'의 곡선이 수평선을 그렸다.
이틀 뒤 연세대 루스채플예배당에서 만 15년간 이 학교에서 봉직한 송 교수의 장례식이 열렸다. 동료 교수와 제자 등 1500명이 송 교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학생 대표 강민경(21)씨가 조사를 낭독했다. "저희들을 아들 딸처럼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시던 아버지 같은 선생님, 이제 편히 쉬세요."
송 교수의 유골은 화장돼 경기도 파주의 한 납골당에 안치됐다. 부인 박씨는 지난 6일 연세대에 찾아와 부의금 3000만원 전액을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박씨는 "'부의금은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써 달라'는 것이 남편의 마지막 뜻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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