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5:1~20)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15절)
단 한 영혼을 위해 예수님은 전력을 다하신다.
어떤 이에게는 가지 않고, 오늘 말씀처럼 어떤 한 영혼을 위해서는 가셔서 구원하신다.
내 무지성 같이 보이는 믿음으로는
예수님의 그 행동이 전혀 공평과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다.
일단 예수님은 단 한 영혼을 위해 모든 전력을 다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가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지 않는 차별은
그 시람에게 직접 가는 것이 가장 적절한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누군가에게 가지 않는 것은,
그가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그에게 가는 것보다 안 가는 것이
더 적절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거라사의 광인에게서 예수님께서는
그때 그곳으로 찾아가야 할 적시, 적절성을 catch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절대 헤아릴 수 없는 그것을 말이다.
예수님은 단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을 가장 높은 우선순위에 두신다.
그렇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처럼
직접 행동으로 보이셨다.
그러니 나만을 위해 예수님은 그의 모든 것을 헌신하시는 분이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오늘 카톡 프사에 적은 글처럼,
수 조원의 자산가 아버지를 둔 내가,
고작 수 억원의 부채에 절망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은혜의 규모나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두고도
피라미 같은 세속적 걱정에 내 전체가 흔들린다면 되겠는가?
결국 믿음의 문제이다.
하나님! 제게 믿음 주시옵소서. 아멘.
----------------------------------------------------------------------
오늘 거라사 광인을 구원하기 위해
2천 마리의 돼지가 소품으로 사용되었다.
워싱턴 한인교회를 다닐 때, 성경공부에서 누군가
2천 마리의 돼지를 소유한 주인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셨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다른 모든 이들이 조소를 보였다.
나는 진지하고 심각했다.
2천 마리의 돼지가 전 재산일 수 있는 주인,
그 전 재산이 그와 그의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성경에서 다루지 않은 대목이라 해서
뜬금없는 주제로 여기는 사람들이 난 이해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거라사 광인 1인을 위해서 그의 모든 것을 바치듯
돼지 주인을 위해서 염려의 마음을 갖는 것은 매우 인격적이다.
성경을 인격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은 기본이고 필수이다 .
성경을 자꾸 신화적으로만 바라보면 그 사이
성경의 교훈이 건조해지고 큰 공백이 생길 수 있으며, 누군가 상처받거나 무시당할 가능성이 커진다.
돼지 주인의 상황을 걱정하는 것은 성경을 바라보는 바람직한 시각이며
어쩌면 지금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다룰 때 가장 결핍한 요소를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