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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우 석은옥
** 1944년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어나 중학교 재학 중 외상에 의한 망막 박리로 실명한 후,온갖 실명의 고통과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신앙과 굳은 의지로 극복, 세계적인 재활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1968년 서울맹학교 고등부를 졸업하고 연세대 교육과에 입학, 1972년 문과대학 전체차석으로 졸업했다.1972년 2월 결혼하고 그해 8월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으로 아내와 함께 도미, 3년 8개월 만에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 전공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1976년4월 한국 맹인 최초 박사가 되었다.
그가 이제는 세계를 주름잡는 미국의 장애인 정책을 움직이는 행정부의 차관보.현재 장애인 정책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있는 강영우박사!! 장애인에서 교육철학박사로, 다시 장애 정책 차관보로 변신한 강영우박사.미국 저명인명사전과 세계 저명인명사전에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 강영우박사.그가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주류사회에서 우뚝 선 그의 신앙생활을 통해 비젼을 보실 수 있기 바랍니다.
강영우 박사는 1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3학년 때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망막이 떨어지기 시작해 시력을 잃었습니다. 당시 국립의료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현대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어머니마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고 하늘 아래 4남매만이 남았습니다. 강영우 박사의 누나가 학업을 포기하고 봉제공장에서 일했으나 과로로 쓰러져 운명을 달리 했습니다. 남은 가족들조차 여동생은 고아원, 남동생은 철물점 점원, 강영우 박사는 맹인재활원으로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이 당시 강영우 박사는 인생의 벼랑 끝으로 떨어졌다는 생각으로 좌절의 나날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나쁜 일이 생겼기 때문에 내일 더 좋은 일이 생긴다’라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시련을 헤쳐 나갔다고 하는군요.
강영우 박사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방법은 절대 평가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에 있었다”며 “자신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개발해 비전과 목적을 세워 따라가면 된다”고 조언했습니다.
강 박사는 ‘장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장애를 통해서’ 성공과 성취를 이뤘다고 말했습니다.
강영우, "도전과 기회 3C 혁명"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4)
'인재는 길러 지고 아름다운 세상은 만들어 진다'는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의 글로벌 인제 교육론 '도전과 기회- 3C 혁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강박사는 이책에서 3C이론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성공하려면 능력(Competence)은 기본이고 여기에 인격(Character),과 헌신(Commitment)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능력은 노력에 의해 축적이 가능하지만 인격과 헌신은 '왜 사는가'에 대한 가치관을 먼저 확립해야 만 갖출 수 있다'며, '여기에는 부모들의 올바른 교육이 절대적' 이라고 강조 했습니다. 미국의 인재들은 어릴 때부터 '남을 위해 공부하고 일하면 결과적으로 자기도 성공하게 된다.'는 말을 들으면서 성장합니다. 헌신의 정신을 체화한 인격자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끔 사회가 짜여 있기 때문이죠.
Competence 첫째, 실력은 기본이다
- 비전과 분명한 목적이 있으면 성취동기가 유발되어 최고의 실력을 갖출 수 있다.
-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정해진 시간 내에 우선순위에 따라 시간을 배정하고 관리하면서 조화를 이루어가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면 사회에 나와서도 낙오자가 되는 것 은 당연하다.
- 훌륭한 학생을 선출하는 기준 : 기본 능력, 성취 수준, 집중력과 시간 관리 능력.
- 지식 있는 사람이 실력 있는 사람은 아니다. 실력 있는 사람은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에 지 속적인 흥분과 감동을 느껴야 한다.
- 학문의 도구가 없거나 변변치 못하면, 고장 난 연장으로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
-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찾아 최선을 다해 개발하라.
Character 둘째, 인격은 가치 교육에 달려 있다
-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인격이 결여되고 헌신적인 자세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세계화 시대 에 지도자가 될 수 없다.
-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 자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느낌과 생각은 자신에게도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자존감)
- 보통 사람이 위대한 생각을 하고 위대한 일을 하면 위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렌즈로 자신과 자녀들을 보라. 당신도 자녀도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 헬렌 켈러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속삭이는 동안 이미 그 불가능은 가능하게 되었다.”
- 링컨의 위대함은 불행한 환경을 평범한 사람들이 고귀한 가치로 여기는 정직, 자유, 끈기, 친절, 배려 등을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Commitment 셋째, 헌신은 학습된다.
- 지도자의 태도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도 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과 성취와 성공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 헌신의 기질은 타고나지만 헌신의 자세는 태도의 일종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 필립스 아카데미 건학 이념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지역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위하여”
- 자신의 능력, 인격, 헌신의 자세를 대변하고 추천해 줄 수 있는 인맥이 필요하다.(인맥의 새로운 시각)
- 운명보다는 도전이, 능력보다는 성취동기가, 환경보다는 헌신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
* 첫 번째 C는 실력을 갖춘 사람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집중하며, 시간 관리를 잘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본 능력을 최대한 개발함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두 번째 C는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은 계명에 충실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도 잘하고, 대인관계에서도 탁월하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 C는 헌신의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로,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헌신적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네요^^
강영우 박사님은 소년시절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망막 박리가 되어 결국 실명하게 되어 현대 의학으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가라 앉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맹인으로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짐이나 되고 인간 구실도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실명과 가난으로 인생이 낮고 낮은 바닥에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고난의 십자가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한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개척자의 사명을 수행하는 도구로 그 운명에 도전의 기회였음을 깨닫게 하실뿐 아니라, 맹인으로서 생산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성공의 초석이 되었다고합니다. 세계와 유엔을 무대로 전세계 5억에 달하는 장애인들의 열정적인 대변자로서 개척자 선구자의 고귀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실명의 절망과 고뇌를 극복하고 오늘날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 인물이 되었는데, 그것은 모진 시련과 역경을 소중한 자산으로 극복한 인간승리자로서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 여러분은 이 단어가 어떻게 보이시나요?
시각 장애인 강영우 박사(미국 백악관 정책차관보)의 마지막 남긴 말
시각장애인으로 불굴의 의지와 투지로 우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시각장애인 강영우박사가 지난 23일(미국 현지시간)에 췌장암과 투병을 하다가 향년 68세로 별세하셨다.
시각장애인으로, 한국(인)계로는 미국 최고위의 공직에 오른 강영우박사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수 많은 장애인과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남겨주고 가셨다.
그는 1944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서 태어나 13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14세 때에 축구를 하다가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망막이 파괴(망막박리)되어 시력을 상실하고 그 해 어머니 마저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온갖 사회의 차별과 멸시와 천대, 편견과 고난을 신앙과 굳은 의지로 극복하고 서울 맹아학교를 거쳐 연세대에서 문과대학 전체 차석으로 졸업을 했으며, 1972년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 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한국인 최초의 맹인 박사가 되었다.
그는 장애인으로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위장, 루즈벨트 재단 고문,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역임하며 미국 내 장애인의 지위 향상을 위한 자립과 권리 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미국은 물론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강연과 신앙 간증으로 감동과 용기를 주었으며 6개월이라는 시한부 암 선고를 받고도 그는 마지막까지 우리들에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 이것이 참 사랑의 힘이 구나 느끼게 된다.
여기에 그가 마지막 가족에게 남긴(기사화된 것 발췌) 편지 일부의 내용을 전하려고 한다.
"내가 너희들을 품에 안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희들과 이별의 약속을 나눠야 할때가 되었다니, 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하지만 너희들이 나에게 준 사랑이 너무나 컷 기에 그리고 너희들과 함께한 추억이 내 맘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단다.
해보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나의 말을 가슴 속 깊이 새긴 채로 자라준 너희들이 고맙고, 너희들의 아버지로 반평생을 살아왔다는 게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내가 떠나더라도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기에 너희들 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항상 함께 할 것이기에 아버지는 슬픔도 걱정도 없다.
나의 아들 진석, 진영이를 나는 넘치도록 사랑했고 사랑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남긴 편지,
"사랑하는 아내에게,
당신을 처음 만난 게 벌써 50년 전입니다.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예뻣던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을 번쩍 들고 나를 바래다 주겠다고 나섰던 당돌한 여대생,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
앞으로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에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당신을 향한 감사함과 미안함, 시각 장애인의 아내로 살아 온 그 세월이 어찌 편했겠느냐.
항상 주기만 한 당신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좀 더 배려하지 못해서, 너무 많이 고생시킨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지난 40년간 늘 나를 위로해 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오래 함께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 해 주지 못할 것이라서, 나의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여기 강영우 박사에 대한 세계 유명인들의 말을 적어 본다.
"강영우 박사는 인생에 등을 돌려야 할 정도의 절박한 처지에 있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고 투쟁해서 오늘날 주류사회에 떳떳하게 설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러한 고귀한 삶의 태도와 가치관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누구에게나 진한 감동을 주고 귀감이 됩니다. - 미국 41대 대통령 조지 부시 -
"강영우 박사는 실명의 장애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긍정적인 자산으로 바꾼 분입니다. 그의 실명은 장애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이 겹칠 때 힘을 보태어 주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소중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 전 미국 법무장관 리처드 소버그 -
"벼랑 끝에서 오늘날 세계적인 인물이 된 강영우 박사의 극적인 생애를 알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 전"가이드포스트" 발행인 노만 빈센트 필 -
"강영우 박사는 사랑과 봉사로 리더쉽을 길러 참된 지도자로 우리 국게로터리 백년사에 전설적인 존재로 남게 된 분입니다." - 전 국제로터리 세계총회장 프랭크 데불린 -
"강영우 박사는 극복하기 어려운 불운을 극복하고 밝은 비전과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승리의 인생을 살아가며 훌륭한 교육자로, 사회봉사자로, 정책전문가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 빛나는 공적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서영훈 -
시인 늘샘 반병섭 목사님께서 강영우 박사에 대하여 쓰신 시 한 수를 여기에 발췌해서 적습니다.
눈 먼 새의 비상
-늘샘 반병섭 목사
문호교회 강명기 영수의 장남
모태 신앙으로 태어난 재동 영우는
서울로 진학, 중학생이 되고
어느 날 축구공에 눈을 다쳐
국립의료원의 최후 진단
"회복불능" 실명이 선고 되던 날
"영우가 장님이 된다고" 이 한 마디를 남긴
홀어머니(임인희)는 졸도하고
8시간 후에 절명한다.
평화의 시장의 밤낮 없는 공녀 처녀 가장
누나(원자)는 18세에 과로사를 하고
동생(영수)는 철공장의 공동으로
여동생(원숙)은 고아원으로
"눈먼새" 영우는 맹아학교로
세 고아는 서울을 헤맨다
맹인 영우 소년의 세상은 절벽 또 절벽
해 있는 낮도 밤, 달 있어도 밤은 더욱 칠흑
피리로 울어야 하는 야반의 집시
주홍글씨 눈에 달고
점쟁이 되는 그 길만이
실낱같이 가물거렸다.
가슴엔 빛
귀엔 영음 있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올소이다"
신앙은 응답, 성취는 은혜이었네
숙대생 석은옥이
그의 지팡이로 다가오고
눈에는 꿈, 액화에 날개 돋아
태평양을 비상하네
한국 최초의 맹인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저술가가 되고
펴낸 책들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읽는 이의 가슴에 불을 지피네
만만 장애인의 희망
만만 역경 이겨낸 승리자
연세대(모교)의 명예박사
백악관과 유엔, 세계무대 위에로
지팡이 잡고 단상에 우뚝 설 때마다
단하는 울었어도 한 쌍의 촛불은 울지 않앗네
흩어졌던 동생들 불러 모으고
고마웠던 은인들 고루 고루 보답하고
외동 딸 키운 장모(이정현)에게 안식처 드리고
모두는 명문교 출신의
큰아들, 진석은 안과의사, 박사
자부(에이미)도 의학박사
둘째아들, 진영은 변호사, 박사
자부(엘리자베스)도 법학박사
미국 명사록에 오른 가문
만인의 거울, 강박사는
붕조의 날개 달고
드높게 더 넓게 비상하리니
눈 부비며 바라볼
우리들의 자랑이여!
- 후대의 우리 모두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신 강영우박사님을 기리며
#석은옥씨의 고백
-미 백악관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의 아내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이자,
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
그의 뒤에는 한평생 그의 지팡이가 되어준
아내 석은옥씨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다
석은옥씨가 직접 말하는 감동 인생.
“최고 엘리트였던 내가 앞 못 보는 남자와 결혼,
남편의 성공을 위해 헌신해온 감동 인생 사연”
이제 우리 부부는 인생 육십을 넘겼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의 인생을 뒤바꾼 한 맹인 소년과의 만남!
그 후 자원봉사자로 1년,
누나로 6년, 약혼녀로 3년,
그리고 아내로 34년을 그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왔다.
처음엔 고개를 젓던 사람들도 이젠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 찬사 뒤에는 우리 부부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강영우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
우리의 만남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그가 평생 단 한 번 걸스카우트를 방문한 그때, 나는 걸스카우트
신입회원으로 그를 돕는 프로그램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 하느님께서 내게, 저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맹인 중학생이 10년 후 나의 신랑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다면 나는 그대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때 그는 맹아학교 중등부 1학년생이었고, 나는 여대생이었다.
가난과 실명의 고통에 찌든 모습을 상상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학생은 외모만 봐서는 전혀 맹인 같지 않았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 학생만 힐금힐금 쳐다보았다.
누군가 그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을 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내가 다녀오겠다”며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학생의 손을 덥석 잡고 광화문 사거리로 나섰다.
그때 처음으로 “숙대 영문과 1학년 석은옥이에요”라며 나를 소개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1학년 때인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실명 때문에 충격을 받아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그는 장애인 재활원! 으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며 남편은 수년간 방황했다. 자살도 여러 차례 기도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뒤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며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처음 만날 때는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게 아니어서
남편은 어렴풋이나마 내 젊은 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불빛조차도 구별할 수 없는 완전 맹인이다.
그때부터 주말이면 맹학교 기숙사에 찾아가 책도 읽어주고
안내도 해주는 일을 1년 정도 봉사하다 보니 정이 들어,
그를 동생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잘됐다 싶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당시 나는 그가 투병과 방황으로
여러 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학생과 중학생이라는 것만 생각해 부담 없이
그의 누나가 되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2년 정도 지나 그의 성적표에 있는 생년월일을 보고
한 살 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양친이 안 계신 동생이 생기니 누나로서 할 일이 정말 많았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가야 했고
빨래, 장보기부터 대학 진학 준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동생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내게 기쁨이었다. 누나 동생으로 6년,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물론 아가페사랑이다.
당시엔 맹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맹인이 버스를 타려고 하면 차장이 밀어내기 일쑤고,
가게에서는 재수가 없다며 오후에 오라하고,
식당에서는 구석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주위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 그와 만난 지 5 년째 되던 해,
그동안 혼자만 생각해온 유학 계획을 그에게 털어 놓았다.
나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는지, 그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나는 좀 당혹스러웠지만,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결혼을 해서도 시각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천직으로 알고 계속할 텐데
더 늦기 전에 유학을 다녀와야겠다는 말에 결국 그도 동의했다.
나는 1967년 9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동안 정이 든 그와의 이별은 큰 아픔이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가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겹쳤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누나를 보내고
혼자 힘으로 다가오는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과
불안이 겹쳐 이별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내가 떠난 뒤 동생 영우는 마음을 독하게 고쳐먹고 대학 입시에 전념했다.
그리고 1968년 연세대 문과대 교육학과에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원서 자체를 접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학원서조차 낼 수 없다니, 소식을 들은 나는 미국 땅에서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런데 4주 정도 지나 또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영문과 교수 한 분이 대필 해 주어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교육과에 10등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1968년 3월, 서울맹학교 고등부에서 연세대에 입학해
그동안 박박 깎은 머리를 기른 채 교복 대신 신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보내주었다.
정상인들과 같이 공부하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첫 학기부터 장학생이 되었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나는 1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동안의 이별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1968년 12월 22일,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함께 연세대 백양로를 걷던 중 영우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도 그를 무척 좋아한 데다 남은 생을 시각장애인 교육에 헌신하려고
준비해왔는데 그를 반려자로 맞으면 남편에게 맹인 동생을 이해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우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장래를 약속한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비밀리에 약혼식을 올렸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가 애지중지 기른 딸을
맹인에게 준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셨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친구들은 더 심했다.
어떤 친구는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며
“관상을 보면 팔자가 그렇게 센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느님이 해도 너무하셨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학벌이 좋으면 뭐하니?
너는 좋아서 결혼한다 해도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들을 생각해봐.
아버지가 장님인데” 하고 말렸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2년 2월 26일,
대학생이던 약혼자를 졸업하기까지 만 3년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난 다른 친구들에 비해 결혼이 늦은 편이었고,
모두 판사, 의사, 약사, 대기업 간부의 부인이 되어 있을 때
연하인 맹인 학사를 신랑으로 맞은 것이다.
그래도 어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아 하객들의 놀림을 받을 정도였다.
맹인 아내로서 내가 겪은 고통
1972년 8월, 우리 부부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LA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에는 장애가 해외유학의 결격사유에
속했다. 그 항목을 삭제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이 될 때까지
몇 년 동안 겪은 마음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결국 피츠버그대학교 9월 학기 개강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한미재단총재와 연세대 총장이 공동으로 제안한 청원서에 문교부장관이
서명함으로써 미국 유학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LA에 도착해 여러 해 동안 그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신 양부모님을
만나 일주일을 보내고 피츠버그에는 개강 전날 도착했다.
당시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서울을 떠나기 직전까지 맹인재활센터에서 일했고, 입덧도 심했다.
그러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돕지 않으면 강의실에도
갈 수 없어 편하게 쉴 수도 없었다.
하루는 남편을 강의실에 들여보낸 뒤 도서관에서 책을 녹음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강의가
끝난 지 30분 이상 지난 시간이었다.
온 힘을 다해 강의실로 뛰어가 보니 그는 불안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하고 부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며 화를 버럭 냈다.
나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항상 잘하다가 한 번 실수했는데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나 싶어 섭섭한 마음에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미국에 와서 처음 한 부부싸움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남편은 보행훈련을 받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혼자 강의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미루던 차에 결단의 기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행훈련을 받아도 자주 다니지 않은 곳이나
생소한 지역을 갈 때는 여전히 정안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보행훈련을 받아 나에 대한 의존도가 다소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안내해주어야 했다.
어린 두 아들을 남에게 맡긴 채 남편의 대학원 강의실을 향해
떠날 때,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남편의 강의가 먼저였다.
맹인 아빠에게 젖먹이 아기를 맡기고 도서관에 자료
심부름을 갈 때면 혹시 불이라도 날까 불안했지만
그의 눈이 되고 지팡이가 되는 것이 먼저였다.
몸이 아플 겨를도 없이 매일 동분서주하는 고달프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후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수업료는 문제가 없었는데,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이 만료된 것이다.
닥치는 대로 막일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병원 청소원으로 겨우 취업이 되었는데 이민국에서 노동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민하던 어느 날, 캠퍼스
근처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한 맹인 여성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다가가 한국에서 유학 온 맹인 학생이라고 소개하면서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그네를 밀어주던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라고 했다.
과부가 과부사정을 안다고, 우리 사정을 이해할 것 같아서 초면에 우리 형편을 털어놓았다.
그 부부는 우리에게 자기 집 3층을 내줄 테니 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다. 대신 식사 후 설거지를 해주고, 두 내외가
외출할 때 어린 두 자녀를 돌봐달라고 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가족의 생계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 생각할 것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집에 살면서 매일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을 해도 행복하기만 했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머지않아 박사가 될
남편을 내조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주관 적인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남의 식모살이나 하는 처지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가 오히려 아파트에 살 때보다 더 행복했다.
우리와 처지도 같고 동년배라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를 배우는 계기도 되었다.
또 두 살 된 진석이도 네 살, 다섯 살이던 그 집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둘째 아이 진영이가 생겨 더욱 감사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절대 좌절하거나 울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맹인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 내외는 출세 지향적이 아닌, 성취 지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맹인이기 때문에 넘어야 할 물리적, 심리적, 법적, 제도적 장벽을 넘을 때마다
오히려 성취감을 느꼈다.
또 쾌락보다는 보람을 추구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할
때마다 승리감과 보람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다.
1976년 4월 25일, 남편이 드디어 피츠버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당국의 배려로 박사복을 입은 남편을 총장
앞으로 안내하면서 느낀 보람과 행복이란….
“마음껏 사랑하고 즐긴 것은 결코 잊히지 않으며,
자신의 일부분으로 남게 된다”는 헬렌 켈러의 말이 생각났다.
물론 아무나 맹인의 아내가 되어 어려운 내조를 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때로는 희생을 요하는
힘겨운 내조를 할 때도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성취를 나의 성취로, 그의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록 학사복을 입었지만, 남편이 받은 박사학위가
나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느껴져 더 행복했다.
어려움이 닥치고 고난이 겹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박사학위를 받고도
남편은 고국에 돌아가 대학 강단에 설 기회를 얻지 못해
무직자로 8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맹인이 어떻게 눈뜬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을 가르치고
논문지도를 할 수 있겠느냐며, 어디에서도 남편을 채용하지 않았다.
무직자인 박사 남편, 아직 어린 진석이, 갓 태어난 진영이,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형편이었다.
장학금으로 지급되던 생활비가 졸업과 동시에 끊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만료된 유학생비자를 다시 살리기 위해
남편이 포스트 닥터럴 프로그램에 들어갈 때의 일이다.
오도가도 못 하고 막다른 골목에 배수진을 친 남편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오히려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현재의 고난을 성공의
조건으로 바꿔주실 테니 인내하며 좀 더 기다려 봐요.
부디 아무 걱정 말고 연구에 몰두하고 직장 찾는 노력이나 계속하세요.”
지금도 남편은 당시 자신의 고통을 함께하면서 그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줄 때가 가장 고마웠다고 말한다.
하루는 나의 격려가 통했는지 남편이 면접을 다녀오더니
취직이 되었다고했다. 기적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면접을 보았지만 번번이 영주권이 없어 채용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일단 학생비자로 취직이 된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1월 3일 첫 출근을 하게 되어 서둘러 인디애나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인디애나에 도착해 남편의 첫 출근과 함께 나는 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벌써 30년이 흘렀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동안 무사고 운전으로 남편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저녁에는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대학원에 출강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터리 클럽 회원으로 매주 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해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운전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병이라도 나서 내가 누워버리면 일상생활의 리듬이 깨질 텐데,
다행히도 그런 기억은 없다. 아마도 내조하는 기쁨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보람이 엔도르핀을 나오게 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대의 지팡이, 그대는 나의 등대
남편이 인디애나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2년 가까이 되던 1987년 9월,
유학을 떠난 지 6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한국 언론은 ‘우리나라 최초 장님 박사 탄생’,
‘한국 최초 맹인 박사 금의환향’ 등의 제목으로 남편의 귀국을
대서특필했다. 그때 그 기사를 본 연세대 윤형섭 교수가 <조선일보>에
평균점수’라는 제하의 칼럼을 썼다.
내용인즉슨, 앞 못 보는 장님이 박사가 되었다기에 기사를 읽어보니
그 뒤에는 남편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며 석사학위 교사까지 된 부인의
희생적인 사랑과 내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 여성의
평균 점수를 올려주었다는 것이다.
6월 5일은 남편이 최초로 국제무대에 등단한 날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 로터리 세계대회에서
그가 연설을 한 것이다. 23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1만6000명의 세계 민간 지도자가 모인
단상으로 남편을 안내하는데, 연설자도 아닌 내가
극도로 긴장해 떨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군중의 시선을 볼 수 없어서인지,
그다지 긴장하지 않고 연설했다.
그리고 남편은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았다.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은 450만 명에 달한다.
그중 2500명이 대통령의 임명을 받으며, 그중 500명은 상원 인준까지
받아 이름 앞에 ‘Honorable’이 붙는다.
먼 이국땅에 유학 와서 이민자로 정착한 지 사반세기 만에 남편은
‘Honorable’이라는 경칭이 붙는 연방정부 최고 공직자가 되었다.
대통령 직속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의 지팡이가 되어 부시 대통령 앞으로 그를 안내할 때
느낀 감회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불쌍한 맹인 중학생을 안내하기 시작한 지 40년,
이젠 명예로운 자리에 서게 되는 자랑스러운 남편을 안내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 부부는 서로의 강점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하나의 팀으로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게 되었다.
1972년 신혼부부로 미국 땅에 도착할 때 태중에 있던 진석이는
링컨 대통령의 장남 로버트 토드와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하버드대 동문이 되었다.
그리고 안과의사의 꿈을 이루어 듀크대학병원에 근무 중이며,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를 맞았다.
작은아들 진영이는 필립스 앤도버 아카데미 출신으로 부시 대통령 부자와
동문이다. 약관 27세의 나이로 연방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리처드 더빈
상원의원 입법 활동을 보좌하는 고문변호사이며, 아내 역시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이민자로 미국 땅에 와서 교육자의 꿈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교육인명사전, 미국여성명사인명사전에 올라 역사 속에 작은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지난 2003년 5월 29일, 내 생일에 아들 며느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케이크를 앞에 두고 축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남편이 말했다.
“아들, 며느리 네 명의 박사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니 당신 정말 행복하겠소.”
진영이가 웃으며 덧붙였다.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잖아요.”
그렇다. 한집에 다섯 명의 박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지팡이가 되어 헌신적인 아내로, 두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며느리들까지 본 어머니로 살아온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처럼 선명한 비전으로 내 인생을 인도해 신앙 안에서
명문가를 만드는 동반자가 되어준 남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