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 장안의 화제였던 드라마<여로>가 리바이벌된다.
태현실, 장욱제, 박주아라는 황금 멤버가 다시 뭉쳐 재현해내는 악극 <여로>에서 태현실과 함꼐 젊은 날의 분이역을 맡아 공연하게 되는 북한 출신 여배우 김혜영이 바쁜 연습 중에 시간을 내 따로 만났다.
'안방에서 들으면 시어머니 말이 맞고 부엌에서 들으면 며느리 말이 맞다'는 옛말도 있듯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고부 갈등에 대해 두 사람이 조분조분 늘어놓은 이야기들.
KBS 드라마 <여로>에 출연했을 당시 태현실씨의 나이는 서른둘이었다.
‘국민 드라마’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였고, 주인공인 태씨가 받은 갈채도 엄청났다.
그런 그가 벌써 오십대 후반이 됐다.
그렇지만 3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다시 ‘분이’가 되어 우리 눈앞에 선다.
2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선보일 극단 세령의 악극 <여로>.
장욱제, 박주아 등 그 시절 그 멤버 그대로, 그 감동 그대로 무대에 올릴 참이다.
“TV가 귀했던 시절, 사람들은 영화가 아니라 극장 휴게실에 놓여있는 TV로 <여로>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어요.
이런 관객들의 마음을 헤아린 극장에서는 <여로>가 방영될 시간이면 영화를 중단시켰지요.
그 뿐인가요.
<여로>가 방영되는 시간이면 길거리에 인적이 뚝 끊기고, 수돗물 쓰는 양이 일제히 줄어들 정도였으니까요”.
태현실씨는 비록 몸에 살은 좀 붙었지만, 서구적인 이목구비며 또렷한 눈매만큼은 전성기 때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악극 <여로>에서는 젊은 시절 분이역은 귀순 여배우 김혜영이 맡았다.
20대 중반의 그녀는 “만나는 분들마다 ‘넌 행운아다.
여로가 어떤 드라마인 줄 아느냐?’고 말해주셔서 작품의 유명세를 실감했어요”라고 입을 뗐다.
김혜영(이하 김으로 표기) 처음에 <여로>를 맡았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아니, <여로>에서 무슨 역할 하세요?” 그러는 거예요.
“내가 젊었을 때 짝사랑했던 분이 역할을 네가 한다고?”하는 남자분의 반응도 있었어요(웃음). 지금도 과연 제가 분이역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에요.
태현실(이하 태로 표기) 혜영인 그동안 많이 늘었어. 호되게 혼나서 울기도 많이 울었고…. 그런데 가끔 이북 사투리가 나오는 게 자기한테 약점이지. 이런 큰 역을 한번 해내면 겁이 날 게 없어. 배우로서 아주 좋은 기회야. 열심히 해야지.
김 어유, 많이 긴장돼요. 선생님의 절반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태 또 울려고 그러네(웃음). 눈물이 많다는 건 감정이 풍부하다는 거야. 그건 연기자로서 아주 좋은 바탕이라고 생각해. 참, 혜영이가 몇 살이지?
김 스물여덟 살이에요.
태 이런, 딸이나 다름없네. 우리 큰딸이 서른둘이야. 아들은 스물일곱이고.
김 따님은 시집보내셨어요?
태 결혼한 지 벌써 3년이야. 근데 아직 아이가 없어.
“엄마, 실컷 놀 수 있을 때 노세요. 나중에 손자 생기면 놀 수도 없어요”라는 말만 하더니 여태 소식이 없어.
오죽하면 내가 그랬겠어. “야, 나 여태까지 실컷 놀았으니까 빨리 하나 낳아라. 심심한데 애나 보게(웃음)."
근데 혜영이는 이런 얘기 들으면 아직 남의 얘기 같지?
김 아직 어리니까요. 그래도 가끔 외로울 땐 있어요. 근데 우리 매니저가 보통 엄격한 게 아니라서…(웃음).
태 연애도 연애지만, 난 결혼만큼은 정말 서로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해.
특히 ‘배우’를 이해해주는 집안하고 해야 해. 우리 직업이 사실 보통 직업하고 다르잖아.
그런데 내 경우는 시댁에서 나를 너무 좋아해주셨어.
특히 시아버님이 아주 예뻐해주셨지.
우리 남편도 내가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는 다 챙겨본다니까.
혜영이도 그렇게 환영받는 집에 가야 결혼생활이 행복해.
김 선생님 결혼생활은 어떠셨어요? 말씀 들어보니 ‘분이’처럼 시집살이는 안 하셨을거 같은데요.
태 내가 스물여덟에 결혼했거든. 사실, 나 시집살이 안 했어.
우리 남편이 장남이긴 한데, 사정이 있어서 어머니를 우리가 못 모셨거든.
5년 전부터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그때부터는 우리가 모셨지.
그래서 나는 남들 다 (시집살이) 끝내는 시점에서, 이제 시작이라고(웃음).
이제 어머님도 나도 같이 늙는 처지에 뭐 어려운 게 있겠냐만, 아무래도 편찮으시니까 그게 신경 쓰여.
김 시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게 불편하세요?
태 우리 어머님이 더 불편해하시는 거 같아.
사실 우리 시어머니, 몸만 아프시지 않다면 절대 아들에게 얹혀 사실 분이 아니야.
자식 눈치 보는 거 그런 게 당신이 불편하신가봐.
하긴 나라도 그럴 거야.
내 또래에 며느리 맞이한 친구들을 봐도, 아무도 며느리 데리고 살자 하는 친구들이 없어.
왜냐하면 며느리하고 같이 산다고 꼭 정이 드는 건 아니거든? 아무래도 남인데, 얼굴 맞대고 살면 피곤한 일이 생길 수밖에 없어.
차라리 분가시키고 가끔 만나는 게, 정도 더 생기고 좋지 않을까? 나는 서로 ‘시집살이’한다고 생각해.
며느리만 힘든 게 아니야. 시어머니는 며느리 눈치 안 보는 줄 알아? 내 친구들 보면 (며느리보다) 더했음 더했지 모자라진 않아.
참, 혜영아. 북한에도 ‘고부 갈등’ 이런 게 있니?
김 그럼요. 드라마에서 보여주듯 그렇게 극단적인 형태는 아니어도 실생활에서는 그런 일들 참 많다고 들었어요.
‘누가 누구를 구박한다더라. 어떻다더라’ 하는 말들도 많고요.
태 어머. 거기도 마찬가지구나.
하긴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그런데 거기는 국가에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통제하거나 하진 않니?
김 이곳처럼 문제가 심각해지면 법적으로 문제를 풀 수도 있겠죠.
그래도 그런 얘긴 별로 못 들어본 것 같아요.
사실, 이혼도 북한보다 여기가 훨씬 자유로운 것 같아요.
참! 선생님, 아드님한테 어떤 배우자가 있으면 좋겠어요?
태 며느리 될 애는 일단, 양가 부모님 다 계신 집에서 사랑 듬뿍 받고, 제대로 교육받은 그런 아가씨면 좋겠어.
난 심성 착하고 성격 좋으면 돼. 근데 그게 내 맘대로 되나.
일단 아들이 좋아하면 그걸로 된 거지.
김 아드님 결혼하면 며느리와 함께 사실 생각이세요?
태 아, 난 싫어. 저희들도 싫어하지 않겠어?
사실 그냥 한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데리고 살고 싶지.
우리 집안의 풍습은 이렇다, 음식은 이렇게 무치면 맛있다 이런 것도 가르쳐주고 싶고….
그래도 난 저희끼리 결정하라고 할 거야.
‘자식하고 골프는 내 맘대로 안된다’는 말도 있잖아.
김 분이 같은 며느리 타입은 어때요?
“서로 시집살이 하는 거야. 시어머니는 며느리 눈치 안 보는 줄 아니?”
태 아유, 너무 좋지.
분이는 그 모진 구박을 받으면서도 시어머니에게 할 말 다 하면서 살았어.
사람들은 분이가 ‘청순가련’에 지극히 희생적인 줄로만 알고 있는데, 아니야.분이는 할 말 다하고 살았어.
게다가 ‘바보 남편’을 어엿한 사람 꼴로 만들어놨지, 자식 잘 길렀지.
그야말로 지극한 부부애의 귀감이자, 그 시대의 며느리 상이었어.
내가 전에 어떤 얘기를 들었냐 하면, 어떤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안 맞아서 집을 나갔대.
그런데 그 드라마를 보고 느낀 게 있어 가정으로 되돌아갔다는 거야.
그 시부모들이 나한테 찾아와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근데 말이 엉뚱한 곳으로 흘렀구나(웃음). 무슨 얘기했지?
김 (웃음) 분이 같은 며느리는 너무 좋다는 얘기 하셨어요.
선생님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착한 며느리역을 많이 하셨죠?
태 그렇지. 아무래도 내 이미지가 그런가 봐.
김 그런데 시어머니 역할 맡으신 박주아 선생님은 젊으셨을 때부터 시어머니 단골이셨다면서요. 그것도 못되고 독한 시어머니…(웃음).
태 아유, 말 마. 박주아랑 내가 KBS 1기 동기생이야.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 걔는 이상하게도 젊었을 때부터 노역을 했어.
노역이 참 어려운 건데, 잘 하니까 자꾸 시킨 거야.
이 얘기 꺼내면 주아가 할 말이 진짜 많을 거야.
젊어서부터 독한 시어머니 역을 많이 맡겨서 아직까지 결혼도 못했다고, 속상해서 죽으려고 하지.
김 선생님도 그렇고, 박주아 선생님과 장욱제 선생님도 그렇고….
다들 대단하세요. 연습하는 것만 봐도 호흡이 딱딱 맞는 게 느껴지거든요.
매일 5시간, 6시간 같이 연습하시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태 힘들긴. 그냥 옛날 그 기분 그대로 하는 건데.
사실 내가 봐도 장욱제씨는 정말 열심이더라. 그동안 연기를 쉬었다는 부담감 때문에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아.
한번 대본을 보니까 ‘세바퀴 돌고 제자리에. 옆에 양동이 놓여있다’자기가 지문도 써놓고 빨강, 노랑, 보라색 펜으로 일일이 체크해놨어.
대단해. 혜영이 너도 봤지만, 영구 역 너무 잘하잖아.
김 ‘바보 영구’를 하도 애들이 흉내내서 신문에서 ‘드라마가 아이들을 버려놓고 있다’ 이런 기사도 나갔다고 하시던데요.
근데 장선생님은 원래 그렇게 웃기세요?
태 장욱제씨가 너만 보면 ‘어이, 북한 노래 한 곡만 해봐’ 그러더라.
근데 너도 웃겨. 어쩌면 시킨다고 항상 그렇게 노래 부르니?
김 좋아서 부르는 건데요, 뭐.
사실 장선생님은 나이 드신 분 같은 느낌이 전혀 없어요. 꼭 ‘서방님’같다고나 할까…(웃음).
태 어머머, 얘 말하는 것 좀 봐(웃음). 그러는 넌 어떤 ‘서방님’이 좋은데?
김 마음 착하고,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을 것 같아요.
외모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태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데 대한 생각은 어때?
김 남자가 ‘모시고 살자’ 그러면 그러지 뭐, 이런 생각이에요.
그런데 가끔 드라마 보면 ‘진짜 심하다’ 싶은 경우가 많더라고요.
정말 그래요? 너무 못된 시어머니도 있고, 되바라진 며느리도 있고….
과장된 것 아니에요? 아까 태선생님 말씀하시는 것 들으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같은 여자라는 공감대만 잊지 않으면 고부 갈등도 줄지 않을까?”
태 유독 아들에 대한 집착이 강한 어머니들 아직 많아.
그러다 보니 드라마 속에서 보는 시어머니나 며느리 같은 케이스도 물론 있겠지.
그러니까 가끔 신문에도 나잖아.
고부 갈등 이유로 며느리 가출하고 그러는 거.
난 아무리 좋은 시어머니라고 해도 말이야, 친정엄마와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
며느리도 그건 알아야 해.
시어머니가 남편만 편든다고 섭섭해하는데 그것도 당연한 거야.
시어머니 입장에서 며느리는 남이고, 아들은 자기 자식이잖아.
그러니까 ‘시어머니는 원래 그런 법’하면서 대범하게 넘어가는 며느리가 현명한 거라고.
김 그렇게 말하면, 며느리가 너무 손해보는 것 같아요.
태 아냐. 꼭 그런 건 아니야.
‘여우하고는 살아도 곰하고는 못산다’고 하잖아.
기대치를 낮추고 자기가 지켜야할 것만 칼같이 지키면 돼.
안부 챙기기, 용돈 드리기, 경조사 이런 부분들은 확실히 하고, 대신 인격적인 모독이나 경제적 압박 같은 건 딱 잘라 거절하는 식으로 하는 거지.
그러면 ‘버릇없는 젊은 것’이런 말은 못할 걸.
김 고부간이라는 건 참 어려운 관계네요.
태 그래도 같은 여자잖아.
혜영이도 언젠가는 나처럼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그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도 시키고 그럴 거라고.
같은 여자라는 공감대만 잊지 않으면, 그 마음 서로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김 미래의 시어머니가 선생님 같이 생각이 젊은 분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네요(웃음).
선생님은 생각뿐만 아니라 얼굴도 참 고우세요.
이번에 1차 포스터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다들 30년전의 포스터인줄 알 정도로 젊은 느낌이더라고요.
태 옛날 감회가 그대로 떠오르더라고.
그 느낌이….
구본창 선생이 사진을 아주 멋지게 찍어주셨지.
나는 내 얼굴이 참 좋아.
나이에 맞게 자연스럽게 주름도 몇 가닥 보이고, 이런 게 더 멋스럽지 않아? 난 성형수술 같은 거 한번도 안했다고.
무슨 주사 맞는 것도 있다며? 나 그런 거 싫어.
김 그런데도 주름도 별로 없이 얼굴이 탱탱하신데요?
태 그건 친정엄마 닮았나봐.
우리 엄마도 83세이신데, 아주 단아하고 곱게 늙으셨어.
이 양반이 주름이 없었는데, 나이들수록 엄마 닮았다는 소릴 많이 들어.
그리고 1년 전부터는 경락 마사지를 받고 있어.
혈행이 원활해서 얼굴선이 고와지고 탱탱해지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
김 전 여기 와서 10대 연예인들이 이렇게 많은 것 보고 너무 놀랐어요.
저쪽만 해도 공헌배우라 해서 알아주는 배우들은 다 30대 이상이거든요.
연기를 하려면 연륜이 쌓여야 하잖아요.
근데 여기는 10대가 판을 치는 걸 보고 놀랐어요.
태 그러게 말이야. 난 참 그게 속상해.
몇 년 전부터 어떻게 들어오는 배역마다 시어머니 아니면 할머니야. ‘조로증’ 사회야, 우리 사회가.
사실 외국만 봐도 미셸 파이퍼, 수전 서랜든, 소피아 로렌도 아직 현역이라고. 멜로 드라마에도 나오잖아. 그녀들이 다 40, 50대라고.
우리나라는 반대야. 모든 주연은 다 젊은이들이 맡고 있어.
그러니 어린 사람들도 걸핏하면 ‘은퇴’ 소리나 하지. 나도 한 2년 쉬고 있었더니 은퇴했냐고 물어보더라.
난 은퇴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생각 없어. 나를 찾는 무대가 있다면 언제든지 나갈 거야.
김 진짜 꼭 그래주세요. 전 선생님의 연기를 오래오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도 한때 ‘반짝’하는 연기자가 되지 않도록 늘 노력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