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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신 예수님
설교본문 : 마태복음 27:27~56
참고 : 이사야 62~63장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5년 4월 13일(중려주일, 고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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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증거한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감당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결코 쉬지 않으시리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열망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말씀 듣기를 거부하자 답답한 이사야는
하나님께 매를 들어서라도 이스라엘이 정신 차리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이 거부하여
예수께서 그 사명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전히 감당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을 이사야 62~63장과 마태복음 27장에서 각각 살펴보겠습니다.
제 1 부 :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열망
1.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1)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사 62:1)
1. 나는 시온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1절에 나온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엄마가 아픈 아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온 힘을 다해 간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의가 나타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시온을 위하여 결단코 잠잠하지 않으며 쉬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나서 그 주변의 이방 나라들에게 비추어,
이방인들도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결단코 쉬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찾지 않던 자들을 위해서도 손을 펴고 기다리신 하나님(65:1~2)
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대답해 주었으며),
나를 찾지 않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내가 만나 주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하였노라.
2.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불선한(옳지 않은)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맞이하려고 불렀나니
위의 이사야 65:1의 구절에서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대답해 주었으며)”는
주님을 찾지 않는 자들일지라도
혹시 찾고 부르면 대답해 주려고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이방 신을 찾아간 자들이나,
악을 행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자들일지라도
혹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하면 응답해 주시려고 손을 펴고 기다리셨습니다.
마치 여인의 유리창 아래에서 기타를 치고 세레나데를 부르며
유리창이 열리기만을 학수고대했던 청년처럼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3) 너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사 62:2~3)
2. 열방(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열왕(뭇 왕, 세상의 왕들)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며,
3. 너는 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왕관이 될 것이라.
이스라엘이 이사야 40장 이후부터 계속 반복해서 나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여호와의 종의 사명을 감당한다면,
아니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새 이름을 불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 아름다운 면류관이 되고,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왕관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 나라의 모든 복이
그들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4) 너를 지으신 이가 너를 아내로 맞이하겠고, 너를 기뻐하시리라(4~5절)
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버림받은 아내)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니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너를 지으신 이가 너를 아내로 맞이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새 이름을
‘헵시바’와 ‘쁄라’라고 했습니다.
햅시바는 ‘나의 기쁨은 그녀 안에 있다’라는 뜻으로
히스기야 왕의 아내의 이름이고,
쁄라는 ‘결혼한 여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헵시바를 2절의 말씀과 연결 지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새 이름은
‘하나님의 아내, 하나님의 왕비’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버림받은 이스라엘을 다시 용서하여
하나님의 아내로 맞이하신다는 뜻입니다.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님의 신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 예루살렘이 감당해야 할 사명
1) 너희 여호와를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사 62:6)
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밤낮으로)
늘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 여호와께서 하신 약속을 여호와께 늘 일깨워드리는 일을 해야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이사야 40장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계속 반복해서 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여호와의 종’의 사명을 감당한다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모든 복을 다 내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여기 6절에서는
“여호와를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기억하시게 하는 일을 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이후부터 계속 말씀하고 있는
‘세상을 구원하는 여호와의 종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에게 약속하신 그 축복의 말씀을 기억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너희는 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2) 여호와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7절)
7.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여호와께서) 쉬지 못하시게 하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제 막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여호와의 종의 그 엄청난 사명을 감당할 힘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죄에 빠져 살았던 자들이 갑자기 그 죄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개인 경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방 민족까지 구원하게 하는
그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지금 당장 바울처럼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 돌아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기들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면,
그들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나게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결단코 쉬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1절).
하나님께서 이미 이 약속을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쉬지 못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7절).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계속 간구하면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말씀 묵상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멈추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돕기 위해 쉬지 못하시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3) 이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8~9절)
8. 여호와께서 그의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내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네가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이 마시도록 내주지 않을 것인즉
9. 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거둔 자가 그것을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하셨느니라.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면
우리를 치료하고 고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다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저 세상을 구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나도 그 구원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의 오른팔로 그를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가 수고하여 얻은 것을 마음 편안하게 먹고 마시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 2 부 : 선지자 이사야의 중보기도, 매를 들어서라도
1) 징계를 내려서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이사야(사 63:15~19)
15. 주여, 하늘에서 굽어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굽어보아 주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강하신) 권능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주의 간절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속량자)라 하셨거늘
17.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굳어지게) 하셔서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18.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19.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나이다.
15~19절은 선지자 이사야의 기도입니다.
7~1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돕지 않으시는 것에 탄식하며 기도했지만,
선지자 이사야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이사야는 도리어 이스라엘의 마음이 강퍅하게 되었음에도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면
징계를 내려서라도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섬기고
다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자기 민족의 부흥만을 위해 기도하지만,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육신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만,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심령이 부흥되기를, 신앙이 부흥되기를 기도합니다.
➀ 가장 무서운 심판 : 죄를 지었어도 징계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것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이사야의 이 기도에서 발견되는 이사야의 가장 큰 두려움은,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징계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다.
죄를 범했으면 징계를 해서라도 다시 돌아오게 해야 하는데,
죄를 범하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지 않고 가만히 계시면
회개할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여도 가만히 계시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 자식이라면 회초리를 들지만
남의 자식은 잘못을 하든 말든 회초리를 들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잘못할 때 징계를 내리시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죄를 범해도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➁ 징계하지 않는 것은 이미 심판을 내리신 것
죄를 범해도 징계하지 않고 평안히 살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시는 것은
이미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한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후에 주께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후에 오는 평안이 진짜 평안입니다.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음악을 듣는다든지,
교회 분위기가 좋아서 평안을 얻게 되었다면 가짜 평안, 가짜 거룩입니다.
2) 이스라엘이 비록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다시 긍휼을 내려주옵소서
15절은 이스라엘이 비록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다시 긍휼을 내려달라는 이사야의 간구입니다.
그러나 다시 긍휼을 내려달라는 일반적인 기도와는 그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다시 긍휼을 내려달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자들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을 앙망하는 자들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조건 육신이 평안하기만을 기도했지만,
이사야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참된 평안이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는 자들이 되도록,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간구하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제 3 부 :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신 예수님
1.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공통점과 차이
(이 부분은 제목만 적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구절 큐티방을 참조해 주십시오.)
1) 공통점 1 : 두 사람 다 예수님을 배반하여 두 사람 다 지옥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➀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
➁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향해 저주까지 한 베드로
2) 공통점 2 : 두 사람 다 괴로워하며 뉘우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➀ 두 사람 다 예수님을 배반한 후에 괴로워하며 뉘우쳤습니다.
➁ 그러나 그들의 괴로움과 뉘우침은 회개가 아닙니다.
● 묵상 : 종교적 감정 놀음에 조심하십시오.
➀ 회개와 단순한 뉘우침의 차이는 ➠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➁ 그러나 많은 사람이 단순한 후회와 슬픔에서 멈춥니다.
➂ 편하게 은혜받은 감동만 느끼게 해 주는 편리한 교회들 ➠ 지옥의 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길고 긴 회개의 시간과 아픔의 시간을 겪기를 싫어하니
적당히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교회를 찾고,
또 빨리 부흥하기를 원하는 목회자들이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음악과 분위기 등으로
마치 회개한 것과 같은 후련한 마음을 제공합니다.
얼마나 편하고 좋습니까?
갈등도 아픔도 겪지 않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니 말입니다.
그러나 회개 없는 은혜만 강조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지옥문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 문 앞에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목회자나 성도나 다 조심해야 합니다.
회개란 주님 앞에 내 죄를 고백하고
다시 주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그러나 베드로는 용서받았고, 가룟 유다는 지옥에 갔습니다.
➀ 베드로는 회개를 했고, 유다는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후회하고 괴로워하며 통곡을 했더라도
한 차례 울고 났더니 참 시원했다면서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베드로 역시 가룟 유다처럼 배반자로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를 바라는 간구의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질문을 세 차례 받았을 때에
참된 믿음의 고백을 함으로써 다시 그 신령함과 제자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➁ 배반했다는 공통점을 가졌으나, 끝까지 회개한 자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➂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은 5:3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부터
계속해서 자기의 죄를 심각하게 깨닫고 절규하듯 통곡하는 것을
구원의 시작점으로 증거 해왔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 묵상 :
적당히 마음의 때를 벗기고는 한껏 자신의 세련됨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신앙인을
주님은 회개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심각한 마음의 통증을 느껴야 합니다.
2. 고통을 온전히 당하신 주님
1) 담즙을 탄 신 포도주 : 약간의 마취 효과(마 27:34)
34. 포도주에 쓸개를 타서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는 그 맛을 보시고는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군병들은 예수께 담즙을 탄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으나
예수님은 맛만 보고는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신포도주는 마취 효과가 있어서
당시 귀부인들이 십자가에 달리는 죄수들에게 신포도주를 마시게 하곤 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입니다.
2) 약간의 마취 효과도 거부하신 예수님 : 온전한 고난을 위해
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저주의 심판을 온전히 당하시기 위해서.
그러나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신 것은
그들의 이런 가식적 행위가 싫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고통이 덜해지면
혹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대속의 죽음에 손상이 될까 싶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저주의 심판을 온전히 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➁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을 지키기 위해
또한 예수님은 마태복음 26:29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도래하기 전에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 묵상 :
우리를 위해 조금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조차 거부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3.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고
1) 3시간 동안 계속된 어두움(45절)
45. 제 육시(낮 12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오후 3시)까지 계속하더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지 3시간쯤 지나 낮 12시가 됐을 때입니다.
갑자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기까지 3시간 동안 계속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때 임한 어두움이 개기일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개기일식이라 하더라도
3시간 동안 1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어둡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때는 만월이었으므로 개기일식이 일어날 수 없는 때입니다.
이때의 어두움은 해가 그 빛을 잃어서 생긴 우주적인 어두움입니다.
이 어두움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2) 예수께서 느끼시는 절대고독과 고통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을 때부터 예수님은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때 성령께서도 예수님을 떠나셔서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고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으시는 것이므로
죄가 하나도 없으셨으나 진짜 죄를 지어 벌을 받으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고통과 통증 외에
하나님께 버림받은 고독과 아픔까지 함께 겪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어두움은 예수님의 절대고독과 절대고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1)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46절)
46. 제 구시(오후 3시) 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라.
예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께 절규하며 부르짖은 말씀이기도 합니다(시편 22:1).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다윗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그 절규를 합니다.
2) 우리의 죄를 위하여 철저하게 버림받으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렇게 절규를 하신 것은
적어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만큼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렸다면 느꼈을 법한 고통과 두려움과 외로움을
주께서 그대로 다 느끼신 것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야
우리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성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지극히 연약한 사람의 입장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 묵상 :
적어도 그 순간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셨으니
우리처럼 두렵고 우리처럼 고통스러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예수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견디기 힘드셨을까를 생각하십시오.
그 아픔과 고통을 다 겪으셨기에
오늘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도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기뻐하며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4. 끝까지 이기신 예수님(마 27:50~52)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숨을 거두시니라).
51. 바로 그때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잠자던(죽었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살아나되)
1)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 사탄의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운명하시는 것까지가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세상 만민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운명하시는 순간
사탄이 사람을 공격할 때 사용했던 그들이 가진 모든 무기들이
아무런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로 사탄과 마귀들의 나라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2) 그 사명을 끝까지 이루어 내신 예수님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하려고 마귀는 처음부터 미혹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라도
당장이라도 그 고통의 일을 중단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게 하려고
그 주변에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말로 조롱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통의 시간을 끝까지 견디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정하신 일을 끝까지 완수하셔서
우리같이 죄와 허물로 가득한 자들까지도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 묵상 :
주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견디고 이기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5. 그 사명을 우리가 이어받았습니다.
1) 그 복음이 세상에 전해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의 모든 사명을 마치심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모두 열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이 사람들에게 전해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우리의 구세주로 믿어야만 합니다.
2) 그 복음 전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한편으로는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면서,
다른 한 편으로 주님이 주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맡겨진 이 사명을 우리가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예수께서 그 고통을 겪으시면서 이루신 모든 일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끝까지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 묵상 : 주님처럼 우리도 끝까지 이기는 자들이 됩시다.
마지막 때의 혼란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지 아무도 모릅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께로부터 그 믿음을 인정받은 자들까지도
믿음의 길을 버리고 배교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이 나오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시간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날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그때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끝까지 이기셨던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믿음의 자리, 사명의 자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지키는 자들이 됩시다.
서로 넘어지고 실족했을 때
붙잡아 주고 격려하면서 마지막까지 이기는 자들이 됩시다.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고 가르쳐서 그들도 주님을 믿는 사람이 되게 하는 일에 힘을 다합시다.
6. 옛 시대는 가고, 새 영의 시대가 열렸습니다(마 27:51)
51. 바로 그때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1) 성전의 시대가 가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가 끝이 난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드려야 하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를 성전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바로 그 순간
구약 시대, 성전 시대가 종식되었습니다.
2) 새 영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영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든 간에 신령과 진정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주께 예배드리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영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어디에서든 아버지를 부르는 곳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영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어디든 주께 참되게 예배드리는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가 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 묵상 :
주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예배를 드리십시오.
그리고 참된 예배의 자리에 사람들을 초청하십시오.
이 일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7. 주께서 운명하실 때 많은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1) 주께서 운명하실 때 많은 성도들이 살아났습니다(마 27:51~53)
51. 바로 그때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잠자던(죽었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살아나되)
53.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 보이니라.
주께서 공생애의 활동을 하시던 3년여 기간 중에
주님을 믿은 자들 중에 죽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바로 그 순간에
무덤이 열리면서 자던(죽었던) 성도들의 무덤이 열리면서 다시 살아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이들은 거룩한 성(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자기들이 다시 살아났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2) 예수께서 우리를 살리실 능력이 있음을 보이신 것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셨으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당연하게 하겠지만,
죽었던 성도들이 주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바로 그 순간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주님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은 죽어도
다시 살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1)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돌을 제하라(사 62:10)
10.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큰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교회 다니다가 그만둔 사람들은
대부분 교인들로 인하여 상처를 받아서 그만두었습니다.
사람들을 믿음의 자리로 인도해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백성이 길을 예비하고 대로를 수축하고 돌을 제거하라는 것은,
하나님 앞으로 나오려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만한 걸림돌들을 치우라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 만민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것이니,
기껏 마음을 잡고 교회에 왔더니 기존에 있던 성도들의 못된 짓들 때문에
다시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령 오늘 어떤 사람이 여러분의 교회로 왔습니다.
와서 보니 사람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잘못 말하면 큰 봉변을 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다시는 교회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되도록 돕는 것,
마음이 상한 자를 돕고 위로하는 것들도 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런 사랑과 봉사의 일을 통해 사람의 마음이 열려
복음의 말씀이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2) 만민을 위하여 기를(기치를, 깃발을) 들라
이방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깃발을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그 깃발 아래 모여서
자기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무장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3)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11~12절)
11.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하셨느니라.
12.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여호와께서 속량하신, 건져 내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하나님께서 찾으신 자요, 버리지 않은 성읍’이라 하리라.
이렇게 믿음이 없는 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
그들도 믿음을 가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자,
그들이 믿음을 갖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 힘쓰고 애쓰는 자,
세상 앞에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자,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상급이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0장 이후에 기록된 모든 복의 말씀들이
다 이런 자들을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상과 보응들입니다.
● 묵상 : 이제 이 모든 복의 선언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로 옮겨집니다.
본래 이 복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해 마련한 것이었으나
그들이 끝내 거절하였으므로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이사야가 말한 이 모든 복도다 더 한층 업그레이드된 복이
그리스도인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세상 만민을 구하는 일은 모두 예수께서 다 하셨으면서도,
마치 우리가 그 모든 일을 다 한 것처럼 우리에게 그 영광의 상을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하는 신실한 성도들이 됩시다.
주님
적당히 신앙의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위장된 회개, 위장된 정의로 적당히 나를 포장하는
외식하는 신앙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주께서 끝까지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게 하옵소서.
영원토록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실 주께
참되고 온전한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주께서 맡기신 복음을 전할
힘과 능력과 뜨거운 열정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